출판의 자립이란 무엇인가

책이 도착하는 또 다른 경로를 만드는 출판사 3선

출판의 자립이란 무엇인가
이미지 출처: 6699프레스, 이재영 외 『차별 없는 디자인하기』

당신의 서가에 놓인 책들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나요? 매끈하게 제본된 형태, 낯익은 출판사로고, 신춘문예나 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의 이름. 책은 이미 완성된 모습으로 서가에 놓이고, 우리는 그 책이어떤 조건을 지나 독자 앞에 도착했는지는 좀처럼 생각해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단정적인 경로는 동시에 어떤 원고와 목소리, 형식을 지면 바깥에 남겨두기도 합니다. 출판은 단지 글을 인쇄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책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출판에서의 자립이란 무엇일까요. 규모나 유통 방식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책이되기 위해 통과해야 한다고 여겨졌던 조건을 다시 묻고, 아직 호명되지 않은 텍스트에게 지면을 내어주는 일에가깝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침달', '읻다', '6699프레스'를 통해 기성 문법 밖에서 책을 만드는 방식을따라가봅니다.


아침달

아직 호명되지 않은 시들의 자리

이미지 출처: 아침달, 강이현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관계자』

시집을 내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한국 문단에서 시인이 된다는 말은 오랫동안 등단이라는 제도와

시집을 내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한국 문단에서 시인이 된다는 말은 오랫동안 등단이라는 제도와 가까이 놓여 있었습니다. 신춘문예, 문학상, 문예지 발표를 통해 이름을 얻고, 그다음에야첫 시집을 내는 일. 이 익숙한 순서 안에서 아직 호명되지 않은 시들은 독자와 만날 지면을 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침달은 그 기다림의 순서를 조금 다르게 바꿔온 출판사입니다. 2018년 ‘아침달 시집’을 출범하며 아홉 권의 시집을 한꺼번에 펴낸 이곳은, 등단 여부보다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일 수 있는 목소리의 밀도에 주목해왔습니다. 시인이 큐레이터가 되어 원고를 읽고, 출간할 시집을 고르며, 시집이 한 권의 형태를 얻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이미지 출처: 아침달, 이제재 『글라스드 아이즈』

이 방향은 아침달 시집의 목록 안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제재의 『글라스드 아이즈』는 아침달 시집 21번으로 출간된 첫 시집입니다. 아픈 몸과 흔들리는 정체성, 편견 어린 시선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보는 존재들의감각을 그린 이 시집은, 하나의 이름으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 세계를 끝까지 자기 언어로 밀고 나갑니다. 아직 충분히 호명되지 못한 목소리를 한 권의 시집으로 놓아온 아침달의 방향과 잘 맞닿아 있는 책입니다.

아침달의 첫 시집들은 저마다 다른 결로 지금의 감각을 보여줍니다. 이새해의 『나도 기다리고 있어』, 박술의『오토파일럿』, 윤초롬의 『햇빛의 아가리』, 강이현의 『다른 명찰을 보여주는 관계자』, 김세희의 『뜻밖의미래 연구회』, 이자연의 『크런치 모드』처럼 아침달은 아직 독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을 꾸준히 한 권의시집으로 불러내왔습니다. 특히 『오토파일럿』이 이중언어자의 삶과 언어의 경계를 다루고, 『크런치 모드』가게임적 상상력을 통해 삶의 균열을 새롭게 그려낸다는 점은 아침달 시집이 지금의 언어와 감각을 얼마나 넓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아침달은 신인을 위한 자리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심보선의 『네가 봄에 써야지 속으로 생각했던』은아침달 시집 50번으로 출간되었고, 오랜 시간 자기 세계를 구축해온 시인의 책들도 이 시인선 안에 함께 놓입니다. 이 목록 안에서는 비등단, 신인, 기성이라는 구분이 하나의 위계로 작동하기보다, 서로 다른 시적 결들이 나란히 놓입니다.

아침달이 보여주는 자립은 혼자 책을 만드는 자립이 아닙니다. 등단이라는 외부의 승인 이전에도 시는 존재할 수있고, 누구에게나 읽힐 수 있다는 믿음. 문학 제도가 정한 순서와 위계에만 기대지 않고, 아직 호명되지 않은 시인들이 놓일 자리를 만드는 일. 아침달의 자립은 아직 지면을 갖지 못한 시의 언어를 고요히 호명하며 시작됩니다.


읻다

시장의 목록 바깥에서 다시 읽히는 책들

이미지 출처: 읻다, 미즈노 루리코 『헨젤과 그레텔의 섬』

어떤 책은 이미 오래전에 쓰였지만 이미 잊혀져 독자에게 닿지 않습니다. 어떤 텍스트는 너무 낯설다는 이유로, 어떤 작가는 덜 알려졌다는 이유로, 어떤 고전은 시장성이 낮다는 이유로 번역과 출간의 목록에서 밀려납니다. 책이 독자에게 닿기 위해서는 원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군가 그 책을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번역하고, 편집하고, 출간해야 합니다.

읻다는 바로 그 목록의 바깥을 바라보는 출판사입니다. 2015년 번역가, 편집자, 마케터, 북디자이너 등이 함께 노동을 나누는 독립출판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읻다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새롭게 읽힐 필요가 있는 텍스트들을한국어 독자 앞에 놓아왔습니다. 이곳의 출판은 단순히 외국 문학을 들여오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다시 읽힐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목록을 만드는 일에 가깝습니다.

이미지 출처: 읻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전쟁일기』

초기 작업인 ‘괄호 시리즈’는 읻다의 방향을 잘 보여줍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쟁일기』, 미즈노 루리코의『헨젤과 그레텔의 섬』,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Y 교수와의 대담』처럼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새롭게읽힐 필요가 있는 텍스트들이 이 시리즈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이미 닫힌 목록 안에 자리 잡은 고전을 반복하기보다, 아직 충분히 번역되지 않은 문장들을 다시 불러오는 방식입니다.

이후 읻다는 ‘읻다 시인선’을 통해 그 방향을 더 넓혀갑니다. 세상 여러 언어로 쓰인 낯설지만 아름다운 시집을 한국어로 옮기는 이 시리즈는, 번역을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못한 세계를 잇는 일로 만듭니다. 낯선 언어와 시대에 놓인 시가 한국어 독자 앞에 도착할 때, 책은 단지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읽힐 자리를얻게 됩니다.

읻다가 보여주는 자립은 시장이 고른 목록으로부터의 자립입니다. 잘 팔릴 책을 따라가기보다, 아직 읽히지 못한책을 다시 고르는 일. 번역될 가치의 기준을 외부의 유명세에만 맡기지 않고, 스스로 믿는 텍스트의 가치를 독자앞에 세우는 일. 읻다의 책들은 그렇게 시장의 바깥에서 다시 도착할 길을 얻습니다.


6699프레스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경험의 좌표가 되는 책들

디자인은 종종 보기 좋은 형태를 만드는 작업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6699프레스의 책에서 디자인은 조금 다른역할을 맡습니다. 이곳에서 디자인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담는 형식이자, 사회적 현장을 읽어내는 방법이며, 서로다른 경험을 연결하는 기록의 선언이 됩니다.

이미지 출처: 6699프레스 『우리는 서울에 산다』

6699프레스의 첫번째 책,『우리는 서울에 산다』는 관악구 신사동에 위치한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우리들학교’에서 진행된 ‘서울 워크숍’의 디자인 리서치 결과물입니다. 이 책은 탈북 청소년을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이 직접 바라본 서울의 색과 장면, 감각을 따라갑니다. 이들이 그려본 회색 도시 서울은 무슨 색인지, 이들이 찍어본 서울은 어떤 모습인지, 이들에게 이 도시는 어떤 의미인지 묻습니다. 여기서 서울은 모두에게 익숙한 대도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새롭게 감각되고 다시 해석되는 장소가 됩니다.

이미지 출처: 6699프레스, 『차별 없는 디자인하기』

『차별 없는 디자인하기』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만들어낸 이들의 실천을 기록합니다. 책은 ‘퀴어’, ‘비인간’, ‘연대’, ‘도시’, ‘장애’라는 다섯 가지 주제를 따라 길벗체, 핫핑크돌핀스, 스투키 스튜디오, 리슨투더시티, 다이애나랩의 디자인적 실천을 다룹니다. 차별적 현장에서 시작된 활동이 어떻게 각자의 경험과 방식으로 사회적 변화를 향한 행동이 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누군가를 대신 말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서울에 산다』가 탈북청소년의 시선으로 서울이라는 도시를 다시 보게 한다면, 『차별 없는 디자인하기』는 각자의 자리에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움직여온 이들의 고민과 실천을 느슨히 이어냅니다. 6699프레스에게 출판은 완성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와 경험이 만날 수 있는 지면을 설계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6699프레스가 보여주는 자립은 재현 방식으로부터의 자립입니다. 기록당하는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감각이 책 안에서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일. 그리고 그 좌표들이 느슨히 이어질 때, 출판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만드는 방식이 됩니다.


출판의 어떤 경로가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익숙한 경로는 오랫동안 수많은 책을 독자에게 안정적으로전달해왔고, 여전히 많은 작가와 텍스트가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습니다. 다만 어떤 경로가 안정적이라는사실은, 동시에 그 경로가 미처 품지 못하는 원고와 목소리, 형식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침달은 아직 호명되지 않은 시인들이 놓일 자리를 만들고, 읻다는 시장의 목록 바깥에 있던 텍스트를 다시 독자앞에 세웁니다. 6699프레스는 누군가의 경험이 대상화된 기록으로만 남지 않도록, 자기 감각이 놓일 수 있는형식을 설계합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출판이 미처 품지 못한 것들을 받아낼 수 있는또 다른 지면입니다.

출판에서의 자립은 그래서 하나의 경로에서 벗어나 다른 경로를 만드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시와 충분히 번역되지 못한 텍스트, 쉽게 기록되지 못한 감각이 자기 방식으로 독자에게 닿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 책이 자기 방식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세계에 도착할 수 있는 지면을 조금 더 넓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