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은 왜 예고편에 옛날 팝을 틀까

예고편을 꾸미는 BGM이 아니라 관객의 기억을 불러내는 옛날 팝송입니다

마블은 왜 예고편에 옛날 팝을 틀까
이미지 출처: Marvel Studios, 영화 ‘아이언맨’ 스틸

혹시 마블 영화 예고편을 보다가 "아, 이 팝송" 하면서 무심코 따라 부른 적이 있나요.

폭발과 로고의 굉음은 금세 잊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팝송의 첫 소절은 며칠씩 귓가에 남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웅을 처음 보는 것처럼 앉아 있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던 노래를 다시 듣는 자리에도 함께 앉아 있는 셈입니다.

히어로 영화라면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어울린다는 통념과 달리, 마블은 핵심 예고편과 오프닝의 첫 자리에 익숙한 팝송을 올려놓았습니다. 그것도 대개는 히어로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곡들입니다.

이 선곡은 단순한 취향일까요, 아니면 히어로를 관객의 삶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설계일까요. 다섯 가지 예고편과 함께, 그 답을 음악만 놓고 따라가 봅니다.

이미지 출처: Marvel Studios, 영화 '아이언맨' 공식 포스터 / AC/DC, [Back In Black]

[Back In Black], 히어로의 기원이 아니라 록스타의 입장

마블의 세계는 '아이언맨'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작의 톤을 결정하는 건 금속성 효과음이나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기타 리프 하나입니다.

AC/DC의 [Back In Black]은 1980년에 발표된 곡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선언입니다. 다만 이 선언에는 그늘이 있습니다. 이 곡은 그해 세상을 떠난 밴드의 전 보컬 본 스콧을 기리기 위해 쓰였습니다. 검은 옷을 다시 입고 무대에 오른 밴드의 자기확신 이면에는, 상실을 딛고 다시 서야 한다는 애도가 깔려 있는 셈입니다.

이 곡을 오프닝에 얹는 순간 마블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계의 첫 히어로는 구세주가 아니라, 자기 삶을 퍼포먼스로 아는 사람이라고. 하드록은 여기서 전투 음악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영웅의 테마라기보다, 과잉된 자기확신을 가진 사람의 등장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존재라기보다, 처음부터 자신을 문제없는 존재로 믿는 사람입니다. 영화 속 대사보다 먼저, 음악이 이 태도를 설명해 줍니다. 아이언맨의 첫 곡은 그래서 캐릭터의 테마라기보다 마블식 자기 과잉의 첫 사운드 로고에 가깝습니다.

이미지 출처: Marvel Studios,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공식 포스터 / Blue Swede [Hooked on a Feeling]

[Hooked on a Feeling], 우주 SF가 아니라 지구의 기억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점에서 MCU는 우주로 확장됩니다. 행성 이름이 늘어나고, 캐릭터의 국적은 더 이상 지구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세계관은 넓어지지만, 마블이 선택한 음악은 오히려 작은 방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많은 이들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떠올릴 때 Redbone의 [Come and Get Your Love]를 먼저 떠올립니다. 실제로 그 곡은 스타로드의 오프닝 장면을 대표하는 얼굴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VOL.1 1차 공식 예고편에서 팀의 라인업과 정체를 처음 소개할 때 흐르는 곡은 블루 스위드의 [Hooked on a Feeling]입니다.

1974년의 이 올드팝 위로 "우가차카" 합창이 울려 퍼질 때, 관객은 가장 먼저 SF가 아니라 지구의 과거를 떠올립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혹은 부모님의 카세트테이프에서 들었던 그 묘하게 촌스러운 훅 말입니다. 이 어긋남은 유머를 만들면서 동시에 감정의 축을 바꿉니다. 우주 전쟁의 위압감보다 "이 노래 정말 오랜만에 듣는다"는 반가움이 앞섭니다.

마블은 세계관을 확장하면서도 감정의 기준점을 계속 지구의 과거에 둡니다. SF적 상상력이 아니라 노스탤지어가 먼저 오는 구조입니다. 영화는 우리를 우주로 데려가지만, 음악은 우리를 유년기의 방으로 다시 데려갑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래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기보다, 지구의 기억을 반복해 재생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미지 출처: Marvel Studios,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공식 포스터 / MGMT, [Time to Pretend]

[Time to Pretend], 영웅의 탄생이 아니라 십대의 허세

스파이더맨이 MCU에 합류할 때, 마블의 음악 선택은 또 다른 방향으로 꺾입니다. 토니가 록스타 같은 기업가였고 스타로드가 향수의 플레이리스트 관리자였다면, 피터 파커는 아직 그런 정체성을 가질 만큼 나이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물에게 웅장한 히어로 테마를 붙이는 것은 마블의 방식이 아닙니다.

MGMT의 [Time to Pretend]은 2008년 발표된 인디 일렉트로팝입니다. 록스타의 삶을 동경하지만 그 동경이 끝내 허상임을 아는 사람의 자의식. 이 곡이 '스파이더맨: 홈커밍' 예고편의 얼굴이 되는 순간, 마블은 이번에는 성장물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제작진이 기획 단계부터 존 휴즈(John Hughes)의 80년대 하이틴 영화를 참조점으로 공언한 작품이니, 이 선곡은 그 선언에 사운드를 입힌 셈입니다.

피터 파커는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어른 흉내를 내는 십대입니다. 슈트를 입고 도심을 날지만, 여전히 숙제를 하고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며 어벤저스 어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 어설픈 허세와 불안의 감정을, 인디팝의 사운드가 정확하게 포착합니다.

스파이더맨 예고편은 뉴욕의 동네 히어로를 소개하지만, 음악은 한때 과장된 꿈을 꾸던 청춘의 자의식을 함께 호출합니다. 마블은 스파이더맨을 장르의 정점이 아니라 세대의 거울로 재배치합니다. 소년의 슈트가 아니라 소년의 플레이리스트를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이미지 출처: Marvel Studios,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 공식 포스터 / Guns N’ Roses, [Sweet Child O' Mine]

[Sweet Child O' Mine], 신화의 숭고함이 아니라 레트로 록의 자기패러디

페이즈가 거듭되며 MCU는 피로를 축적합니다. 토르는 네 번째 솔로 영화에 도달하고, 관객은 이미 수차례 세계가 멸망할 뻔했다가 다시 구원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같은 서사를 더 진지하게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긴장을 만들기 어려운 시점입니다.

이때 마블은 신화를 더 장엄하게 만드는 대신, 그 신화를 과잉된 록 오페라처럼 다시 연출합니다. 건즈 앤 로지스의 [Sweet Child O' Mine]은 북유럽 신화와 직접 맞닿아 있지 않은 1987년의 하드록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긋남 때문에, 토르는 운명을 짊어진 신이라기보다 자기 신화를 스스로 낮추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토르는 이제 진지하게만 바라봐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이 한때 전성기였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과잉과 피로를 공연처럼 보여주는 얼굴에 가깝습니다. 레트로 록은 신화의 무게를 줄이고 과거의 과잉을 함께 웃어넘기게 만듭니다. 관객은 토르에게 감탄하기보다, 토르와 함께 자신이 지나온 시대를 떠올립니다.

이 선택은 피로를 숨기는 방식이 아니라 피로를 함께 견디는 방식입니다. 같은 히어로도 네 번쯤 보면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마블은 음악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피로를 '같이 듣던 옛날 노래'라는 공통의 기억으로 묶어주는 쪽을 택합니다. [Sweet Child O' Mine]은 토르의 신성을 보강하는 대신, 토르를 한 세대의 피로와 향수를 같이 짊어지는 얼굴로 재배치합니다.

이미지 출처: Marvel Studios, 영화 ‘썬더볼츠*’ 공식 포스터 / Starship, [Nothing’s Gonna Stop Us Now]

[Nothing's Gonna Stop Us Now], 무적의 팀이 아니라 결핍의 연대

썬더볼츠* 시점에서 마블은 새로운 팀을 답으로 내놓습니다. 하지만 이 팀은 처음부터 완벽한 영웅들이 모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핍과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여기에 어울리는 음악은 군가나 웅장한 스코어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낭만적인 팝 발라드입니다.

스타십의 [Nothing's Gonna Stop Us Now]는 1987년 발표된, 원래 연인을 위한 곡입니다. "우리 둘이라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문장은 슈퍼히어로 팀보다 로맨틱 코미디의 엔딩에 더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상처 입은 히어로들의 테마로 옮겨오는 순간, 의미는 조용히 뒤틀립니다. 썬더볼츠 예고편에 이 곡이 실제로 사용되면서, 팀의 정체성도 함께 번역됩니다.

무적의 팀이라기보다 서로를 버티게 만드는 약속. "아무도 불가능을 막을 수 없다"가 아니라 "우리는 망가진 채로도 함께 갈 수 있다"는 다짐처럼 들립니다. 팝 발라드는 승리의 확신보다 관계의 확신을 노래하는 장르입니다. 마블은 이 장르를 통해 팀무비의 중심을 전투력에서 관계력으로 옮깁니다.

초기의 MCU가 세계 구원에 집착했다면, 썬더볼츠 속 MCU는 웅장함보다 관계, 승리보다 생존을 보여주며 결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연대에 관심을 둡니다.

이미지 출처: Marvel Studios, 영화 ‘썬더볼츠*’ 스틸컷

마블 예고편의 팝송은 장엄한 서사를 위한 배경음이 아니라, 관객의 기억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초대장에 가깝습니다. 히어로를 처음 소개하는 순간에도, 마블은 낯선 세계보다 익숙한 노래를 먼저 건넵니다. 새로운 히어를 설명하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감정을 먼저 불러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블의 팝송은 캐릭터를 설명하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관객을 설명하는 음악이기도 합니다. 토니 스타크의 자신감, 스타로드의 향수, 피터 파커의 허세, 토르의 자기패러디, 썬더볼츠의 연대는 모두 한 곡의 팝송을 거치며 우리의 기억과 연결됩니다. 영화가 세계관을 확장할수록 음악은 오히려 우리의 기억과 일상으로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결국 히어로를 보러 극장에 갑니다. 다만 그 히어로를 처음 마주치는 순간, 예고편 속 팝송은 영화가 가진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기억까지 함께 재생합니다. 그 초대가 우리를 위한 환대인지, 익숙한 기억을 다시 호출하는 장치인지는 판단을 미뤄둡니다.

다만 예고편 앞에서 무심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순간, 초대장은 이미 개봉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