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잠든 사이 너의 잠결에 나는 비로소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악몽과 마주할 용기 죽음의 이별을 받아들일 용기 풋풋한 사랑을 꿈 꿀 용기 아, 사실을 말하자면 모두 거짓말이다 아마도 너의 그리움이나 욕망의 변신일 뿐 이런저런 용기는 그저 너의 명령어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너의 잠결에서 나는 젊고 순수하다 저만치 어린 나의 청춘이 아니, 너의 청춘이
동백꽃 소식 진눈깨비 내리는 아침 까치가 들고 온 소식에 선운사 동백꽃 이야기도 있고 동박새 이야기도 있었다 사랑스러운 연둣빛 깃털로 마냥 어려 보이는 동박새는 꿀독에 빠져 세상사 아무것도 모른다는 둥 흉을 보았다 그나저나 까치가 동백꽃 소식을 물어왔으니 어이할까 하늘이 뽀얗게 눈이 내리면 동백꽃 내 심장보다 붉겠구나 꽃을 보러 가려는 게 아니니 다음을 기약하자
갈 곳 없는 마음 바람에는 날개가 있어 날개 없는 것들을 실어 나르네 죽어있던 겨울 잎들이 너울너울 몸을 섞으며 날아가는 것이 부럽기만 하여라 내 영혼은 날지 못하는 설움에 하루하루 시들어가도 바람은 내게만 야박한 것인지 이 마음 하나 실어 주지를 않네
나미브 사실 나미브의 사막은 죽어라 바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바다가 밀려오는 경계에서 파도에 씻기어 환희에 젖는 사막의 치맛자락 어쩌면 흰 소금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막의 모래알들 사실 나미브의 바다는 수천 갈래 수만 갈래 제 몸을 부수어 아득히 빛나는 사막의 숨결, 그 시간의 낱알들을 제 품에 쓸어 담고 있었다 바다는 저 멀리 보이는
파랑새 파랑새를 품고 있는 건 나였는데 내가 둥지인 줄도 모르고 나는 허튼 곳에 한눈을 팔고 있었네 지금 내가 웃고 있으면 둥지 속 파랑새가 산들바람에 지저귀는 것이고 오늘 내가 반가운 이를 만나면 파랑새가 제 짝을 부른 거였네 나는 나의 파랑새를 너는 너의 파랑새를 저마다 품고 있으니 저 멀리에서 날아오는 파랑새가 없는 이유를
고양이와 물고기 나의 물고기 물을 싫어하는 고양이가 발을 적시며 어항 속 금붕어와 놀아 준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나의 물고기 고양이와 어항 속 물고기가 사랑을 한다면 그건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었겠지 어항은 엎질러진 적이 없고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여전히 춤추고 고양이의 우주 같은 두 눈에는 애타는 맑은 햇살이 떨어지네
내가 사는 이유 오늘 한 사람이 바다에 와서 사는 이유를 물었어 물고기라도 되려는지 바다 속으로 뛰어들 기세야 괜스레 겁이나서 엉겹결에 말했어 나는 작은 물고기라 뇌도 작고 아는 것이 없으니 큰 바다로 나가 혹등고래에게 물어보라고 사는 이유를 캐는 건 해초가 물고기의 단단한 비늘을 들추고 여린 살결을 더듬어 보려는 일 같은 거야 사람들은 왜 사는
겨울비 겨울비 바다를 적시고 해변을 기어올라 기어코 내 슬픔을 적시네 슬픔은 겨울비에 씻겨 바다로 돌아가는데 잎 벗은 가지에 가던 길 멈추고 비를 맞고 있던 작은 새 나를 바라보네 아! 내 품에서 날아간 새 내 두 눈 속에 머물며 겨울비를 맞고 있네 겨울비가 내리네
숲에 눈이 내려도 숲은 너무도 은밀하다 며칠 눈이 내리고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겨울 숲일지라도 훔쳐보기를 멈출 수가 없다 산까치는 박새를 훔쳐보고 박새는 산토끼를 훔쳐보고 산토끼는 나를 훔쳐본다 나는 내리는 눈을 훔쳐보느라 모든 것을 놓쳤다 하늘도 나무도 지나가는 새도 내리는 눈송이에 은밀히 숨었다 숨어도 숨어도 낙하하며 훔쳐보는 눈이 수천수백만 개 쌓인다 내 두 눈을
가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거리에 나섰다 저이는 어떤 가면을 썼을까 저이는 또 어떤 가면을 썼을까 공원 벤치에 한 사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가면을 벗어 놓은 사람이다 무심하니 가면 따위 있을 리 없다 가면의 의도가 없다 아, 그러나 말이지 우리 모두가 가면 없는 무심함으로 산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