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고였을 뿐>이 묻는 자립의 조건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영화 안팎에서 수행한 저항
자립은 흔히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현실에서는 가시적인 홀로서기의 상태를 갖추냐보다 끝까지 자기 판단을 지킬 수 있느냐의 문제와 더 자주 마주칩니다. ‘외부의 압력이 가해질 때 과연 자신의 감각과 기억, 선택을 끝까지 붙들 수 있는가.’ 조직의 분위기 속에서, 관계의 위계 안에서, 때로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질서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을 조금씩 양도하며 살아가곤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립은 거대한 힘 앞에서도 자기 기준을 잃지 않으려는 저항의 태도와 가까워 보입니다.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은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통과하는 영화입니다. 과거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한 남자를 자신들을 고문한 가해자로 의심하며 벌어지는 도덕적 갈등을 따라가는데요. 여기에 영화 바깥에서의 경험까지 공명합니다. 영화 안에서는 인물들이 복수와 정의, 침묵과 발화 사이에서 자기 기준을 세우려 하고, 영화 밖에서는 감독 스스로 검열 체제를 피해 영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자립의 형식을 실천합니다.
저항은 자립의 전제

영화는 우연한 사고에서 시작합니다. 한 남자가 어두운 밤길에서 사고를 겪고, 차를 수리하러 들른 정비소에서 중심 인물 바히드와 마주칩니다. 바히드는 그를 보자마자 확신에 가까운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을 감옥에서 고문했던 인물일지 모른다고. 단,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감각이 먼저 반응합니다. 삐걱거리는 의족 소리가 몸에 각인된 공포의 기억을 소환한 것이죠. 그렇게 영화는 국가폭력의 흔적이 개인의 몸에 얼마나 오래 남는지를 보여주며 출발합니다. 사소한 사고는 과거가 현재로 비집고 들어오는 균열을 만듭니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바히드는 같은 폭력을 겪은 이들을 불러 모읍니다. 복수를 위한 의기투합처럼 보였으나 이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릅니다. 복수의 스릴러가 아닌, 판단의 윤리를 묻는 드라마로 전개를 트는데요. 누군가는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처벌을 원하고, 어떤 이는 그가 정말 맞는지 끝까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며, 또 한편에서는 폭력을 되돌려주는 순간 자신들 역시 다른 방식으로 망가질 수 있음을 직감합니다. 같은 피해를 겪고도 서로 다른 태도가 나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혼자 버티는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논리에 똑같이 끌려가지 않는 저항성, 그 저항의 방식이 저마다 타당한 윤리적 자율성을 갖춰야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빚진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이 흥미로운 이유는 복잡다단하게 얽힌 저항성이 작품 내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방식 자체가 이미 자립을 상징합니다. 자파르 파나히는 2022년 7월 체포돼 2023년 2월 단식 투쟁 뒤 석방되었고, 그 수감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의 경험이 영화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기억의 조각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전직 수감자가 자신을 고문한 사람과 다시 마주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즉 영화의 서사는 개인적 체험과 타인의 증언이 축적되어 형성된 것입니다.
제작 조건은 자파르 파나히의 저항을 더 강화했습니다. 그는 석방 이후에도 당국의 승인을 요청하지 않고 비공식적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압박 속에서도 촬영본 제출 요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죠. 여성 배우들이 히잡 없이 등장하는 선택 역시 현재 이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결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그저 사고였을 뿐>은 단지 내용만 ‘정권 비판 영화’가 아닙니다. 외적 환경 자체가 저항의 형식인 영화, 다시 말해 압도적인 힘에 종속되지 않고 형식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창작적 자립의 선언이 됩니다. 검열 속에서 신념을 지켜낸 창작은 2025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국제적으로 큰 응답을 받기도 합니다.
복수의 완성 대신 획득되는 윤리적 자세

<그저 사고였을 뿐>에서 끝내 통쾌한 응징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직선적 정의극으로 끝났다면 이야기는 납작해졌겠지만, 오히려 폭력 이후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해야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한때 피해자였던 이들이 다시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처분하는 위치에 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해온 폭력의 문법으로부터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을까요. 물음은 있되, 정답은 없습니다.
자립은 단호한 몸가짐이나 강한 의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분노와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지난한 과정을 반드시 거칩니다. 폭력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마음, 침묵을 강요받아도 기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결심, 타인의 언어가 자신의 삶을 대신 정의하지 못하게 하려는 고집. 이 모든 자립의 모양은 늘 미완성이겠지만 과정을 여과한 끝에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선명하게 품게 될 겁니다.
물론 질문은 자파르 파나히가 놓인 정치적 현실 안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직 그곳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 <그저 사고였을 뿐>을 오래 붙들게 합니다. 꼭 국가권력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강한 힘이 작용합니다. 조직의 논리, 관계의 위계, 다수의 분위기, 침묵을 강요하는 관성, 자신의 판단보다 타인의 언어를 먼저 믿게 만드는 환경들이 있습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자기 감각을 지키고,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며, 쉽게 규정되지 않으려 애쓰는 모든 저항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