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진실이 아니다 유통되는 방식이다
히토 슈타이얼이 말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새로운 정의
이미지는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화면 속 장면을 보고 무언가를 사실이라고 판단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켜고, 무수한 이미지들을 스크롤하는 우리를 생각해봅니다. 뉴스 사진, 인스타그램 스토리, 유튜브 썸네일, 광고 배너까지. 우리는 여전히 화면 속 장면을 보고 무언가를 사실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미지가 어디서 왔고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 지금 우리 앞에 도달했는지는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흘러온 결과만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이미지가 무엇을 보여주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유통되는지에 주목합니다. 이상하게도 이 관점이 더 진실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미지는 더 이상 원본을 가지지 않는다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는 끊임없이 복제되고 변형되며 유통됩니다. 히토 슈타이얼은 이러한 이미지를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라 칭하며, 그 질이 낮고 해상도가 떨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인터넷에서 무수히 돌아다니는 저화질 사진들, 여러 번 압축되어 화질이 떨어진 동영상들, 누군가 핸드폰으로 다시 찍은 스크린샷들. 이들은 원본에서 멀어질수록 더 빨리 퍼져나갑니다. 빈곤한 이미지는 복제될수록 품질이 저하되지만, 동시에 더 빠르게 퍼져나가며 광범위한 접근성을 획득합니다. 과거 이미지는 원본의 아우라와 가치를 중시했지만, 디지털 이미지는 원본과 사본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기술은 예술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위치를 이동시킵니다. 이미지의 가치도 마찬가지예요. 희소성이 아닌 속도와 유동성이 새로운 기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이미지들 대부분이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과연 몇 개나 될까요?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그런 질문 자체가 의미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신화'가 있었습니다. 고해상도, 원본과 동일한 복제 품질, 무궁무진한 표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디지털 이미지의 신화죠. 하지만 실제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들은 다양한 저장 장치를 거치고, 빠른 전송을 위해 압축되고, 일부가 결여된,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복제되고 압축되며 이동하는 '파일'에 가깝습니다. 완벽함보다는 접근성이, 정확성보다는 확산성이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말이죠.
슈타이얼의 에세이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In Defense of the Poor Image)'는 이러한 현상을 포착합니다. 그는 이미지가 더 이상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퍼져나가는가'로 그 힘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기술은 예술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위치를 이동시킵니다. 이미지의 가치도 이제는 희소성이 아닌 속도와 유동성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괜히 알고리즘을 탓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밀려난 기분이 들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슈타이얼의 에세이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를 읽고 나서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미지는 더 이상 원본이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퍼지느냐로 결정된다는 문장. 과거 이미지가 지녔던 아우라나 유일성 같은 건 이제 무의미해졌다는 뜻이니까요.
저화질 이미지는 왜 더 강해지는가
이미지의 힘은 해상도가 아니라 접근성에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화질을 '144p'로 설정해본 적 있나요? 픽셀이 뭉개져서 뭘 보는지도 모를 정도지만, 어쨌든 끝까지 봅니다. 데이터를 아껴야 하거나, 인터넷 속도가 느리거나, 급해서 빨리 확인해야 할 때는 화질 따위 상관없거든요. 슈타이얼이 말하는 '빈곤한 이미지'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밈(meme)을 보세요. 대부분이 저화질에 텍스트가 덧붙여진, 몇 번의 복제를 거쳐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이미지들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유하고, 변주합니다. 이미지는 망가질수록 더 많이 퍼진다는 역설을 보여주죠.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 '태양의 공장'에서도 이런 맥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샘플링한 이 작품은 완벽한 화질보다는 대량으로 유통되고 재조합되는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특성을 보여줍니다. 비물질 노동의 시대에 이미지 자체도 노동이 되고, 유통이 되고, 가치가 됩니다.
불완전한 이미지들은 때로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대변인 역할을 합니다. 고화질 전문 사진기로 찍힌 정제된 이미지보다, 핸드폰으로 급하게 찍어 올린 흔들린 사진이 더 진실해 보일 때가 있잖아요. 어쩌면 불완전함이야말로 이미지의 진짜 힘인지도 모릅니다.
이미지는 누군가의 시선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개인의 표현이나 시선의 결과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히토 슈타이얼은 이미지가 개인의 표현이 아니라 권력 구조의 산물이며, 보는 것이 아니라 통제되는 것임을 날카롭게 반박합니다. 그의 작업은 디지털 기술이 우리 삶의 기본적 조건이 되는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 대해 성찰하도록 합니다.

대표작 '안 보여주기(How Not to Be Seen: A Fucking Didactic Educational .MOV File)'은 디지털 환경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정치학을 탐구하며,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 하면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위성 이미지, 얼굴 인식 기술, 감시 카메라 등 현대 사회의 광범위한 시각적 통제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거든요.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고, 분석되고 있고, 카테고리화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셀피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자기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리즘은 그 이미지를 분석해서 나이, 성별, 관심사, 소비패턴을 추론합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다시 광고 타겟팅에 활용되죠. 우리가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슈타이얼의 초기작 '비어 있는 중심(Empty Centre, 1998)'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텅 빈 포츠담 광장에서 새로운 경계와 배제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보여주죠. 가시적인 장벽은 무너졌지만, 빈 공간에는 자본과 권력이 새로운 선을 긋고 사람들을 나누는 경계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미지는 단순히 그 과정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뭐 어때, 어차피 우리는 계속 찍고 올릴 텐데요.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무엇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가장 섬뜩한 깨달음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아닐까요? 스마트폰을 들고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는 순간을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이미지를 선택해서 보는 게 아닙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과거 행동을 분석해서 선별한 이미지들이 피드에 나타나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반응할 뿐이죠. 좋아요를 누르고, 스토리를 확인하고, 댓글을 다는 모든 행위가 다시 데이터가 되어 다음 이미지의 흐름을 결정합니다. 슈타이얼이 말하는 '경계'의 개념이 여기서 중요해집니다. 그의 작업 전체는 경계가 생성되고 소멸하며 새롭게 구축되는 풍경을 그리는 일이거든요.
히토 슈타이얼은 우리가 단순히 이미지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지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SNS 피드를 스크롤하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보는 행위는 단순한 시청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클릭, 좋아요, 공유는 데이터로 축적되어 다음 이미지의 흐름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이미지 유통 시스템의 능동적인 참여자이자, 동시에 그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존재가 됩니다.
슈타이얼의 초기작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계(boundary)'에 대한 인식은 이미지 유통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의 작업 전체는 가시적인 경계가 약화되거나 해체되고, 동시에 무수히 많은 경계가 새로이 생성되며 구축되는 풍경을 그리는 일입니다. 이미지와 데이터, 자본은 이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유동합니다.

그의 작품 '11월(November, 2004)'에서는 여러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것들의 충돌. 그 충돌의 조건으로서의 경계들. 우리는 그 경계들 사이에서, 이미지라는 사물들과 함께 떠다니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이미지가 우리를 통해 세상을 흐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지 네트워크의 능동적인 노드가 되어 있는 거죠.
결문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을 들여다보고 나니 조금 어지러웠습니다.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식들이 하나씩 해체되는 기분이었거든요. 이미지는 더 이상 무엇을 보여주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보다는 어디로 이동하고, 어떻게 소비되고, 누구에 의해 분석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이런 깨달음들이 생각보다 불편했습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이미지는 우리를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AI가 생성한 완벽한 이미지들이 무한 생산되는 지금,본을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우리는 이미 이미지의 흐름 속에서, 그 일부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괜히 알고리즘을 탓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밀려난 기분이 들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독자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아니, 어디에서 흘러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