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자리는 어디인가
극장 바깥으로 나간 연극이 묻는 것들
연극을 보러 간다고 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극장을 떠올립니다. 지정된 자리에 앉고, 불이 꺼지고, 막이 오릅니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혹은 함께 무언가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왜 꼭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을까요. 그리고 지금, 극장 밖으로 나가고 있는 연극들은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요.
1. 극장은 어떤 시공간이어야 하는가

연극의 시초는 극장이 아니었습니다. 선사시대 제의(Ritual)에서 시작된 공연에는 퍼포머와 관객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동굴, 계곡과 나무. 자연 지형 자체가 공간이었고, 공동체 전체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공연은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이르러 처음으로 구분이 생겼습니다. 언덕 경사를 깎아 만든 원형극장은 테아트론(theatron, 관객석), 오케스트라(orchestra, 연기 공간), 스케네(skene, 무대 구조물)로 나뉘었습니다. 배우와 관객이 처음으로 분리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천장이었고, 태양이 조명이었고, 시민 모두가 함께 폴리스의 문제를 다루는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관객과 퍼포머는 분리되었지만, 벽은 없었습니다.
처음엔 평평한 오케스트라에서 코러스와 배우가 어우러졌으나, 점차 스케네 앞에 프로스케니온(Proskenion)이라는 높은 단상이 세워졌습니다. 배우가 코러스의 머리 위로 올라선 이 작은 높이의 차이가, 훗날 무대와 객석을 완전히 갈라놓을 '프로시니엄'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글로브 극장 — 환영의 공간
1599년, 템스강 남쪽 사우스워크에 목조 원형 건물 하나가 세워졌습니다.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입니다. 다각형 구조의 이 건물은 최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1페니를 낸 평민들은 무대 바로 앞 야외 공간인 야드(yard)에 서서 공연을 봤고, 더 많은 돈을 낸 관객들은 지붕이 있는 갤러리 좌석에 앉았습니다. 조명은 없었습니다. 공연은 한낮에 야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공간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공연됐습니다.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 이 나무로 만든 O자형 건물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글로브 극장에는 사실적인 배경 세트가 없었습니다. 왕좌나 침대 같은 상징적 오브제만이 무대를 채웠고, 장면의 풍경은 대사가 만들어냈습니다. 무대 위엔 배우들의 동선을 돕는 상징적인 무대 구조(트랩 도어, 발코니 등)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무대는 객석 안으로 돌출되어 있었고, 배우는 관객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관객은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배우를 에워쌌습니다. 배우와 관객이 같은 햇빛 아래 있었습니다. 환영은 완성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제4의 벽이 세워지다
르네상스 이후 프로시니엄 극장이 등장하면서 그 관계는 달라졌습니다. 아치형 틀이 무대와 객석을 엄격하게 갈랐습니다. 19세기 사실주의 연극이 정점에 달하면서 그 벽은 더 두꺼워졌습니다. '제4의 벽' — 무대와 관객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가상의 경계. 관객은 어두운 객석에 앉아 밝은 무대 위의 가상 세계를 몰래 엿보는 사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세트 디자이너가 만든 배경, 조명 디자이너가 설계한 빛과 분장사가 만든 얼굴들을 관람합니다.관객은 목격자였고 완성된 환영을 소비하는 수혜자였습니다.

블랙박스의 가능성과 한계
20세기 아방가르드는 그 위계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르지 그로토프스키는 화려한 무대 장치를 걷어내고 배우의 몸과 관객의 현존만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가난한 연극(Poor Theatre)'을 주창했습니다. 무대는 비워질수록 본질에 가까워진다는 생각. 그 실험들이 쌓이면서 블랙박스 극장이 등장했습니다.
블랙박스는 무대와 객석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면을 향할 수도 있고, 양쪽을 마주보게 할 수도 있고, 관객이 무대를 사방에서 둘러쌀 수도 있습니다. 창작자가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공간의 구조를 결정할 수 있었고, 공간이 작품을 따라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와 관객이 같은 높이에서 같은 빛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프로시니엄이 만들어낸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것 — 그것이 블랙박스가 처음으로 가능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랙박스 안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관객은 입장권을 사고 건물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상을 밖에 둔 채로, 공연을 위해 준비된 공간으로 진입합니다. 블랙박스는 무대 위 가상의 벽은 걷어냈으나, 극장이라는 육중한 외벽까지는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관객은 여전히 '일상'이라는 외투를 극장 보관소에 맡긴 채 안으로 들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2. 꼭 극장이어야 하는가 — 탈극장 연극
극장이라는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극장은 이미 많은 것을 결정해 둡니다. 관객이 어디 앉을지, 어느 방향을 볼지, 언제 조용해야 할지. 불이 꺼지는 순간 관객에게는 어떤 신호가 전달됩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보는 사람입니다. 움직이지 말고, 말하지 말고, 다른 관객을 방해해선 안 됩니다. 시선은 앞을 바라보십시오.
이 설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정교해졌습니다. 프로시니엄 극장이 무대와 객석을 분리한 이후, 극장은 점점 더 완벽한 통제 장치가 됐습니다. 관객의 몸은 고정되고, 시선은 한 방향으로 향하고, 일상은 건물 밖에 두고 들어옵니다. 그렇게 예술은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이 됐습니다.
탈극장 연극이 극장 밖으로 향한 것은 단순히 새로운 공간을 찾는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극장이라는 제도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 — 관객의 자세, 시선의 방향, 예술과 일상의 경계 — 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입니다. 왜 관객은 앉아 있어야 하는가. 왜 한 방향만 바라봐야 하는가. 왜 공연은 저 무대 위에서만 일어나는가.
극장 밖으로 나갔을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건 관객의 몸입니다. 정해진 자리가 사라집니다. 어디를 봐야 할지, 어디 서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퍼포머가 거리를 걷기 시작하면 관객도 따라 움직입니다. 시장 안에서 공연이 펼쳐지면 어디까지가 공연이고 어디서부터가 일상인지 경계가 흐릿해집니다. 그 흐릿함이 핵심입니다. 극장 안에서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 바로 그 흐릿함.
안산국제거리극축제 — 도시가 무대가 될 때
2005년부터 매해 열리는 안산국제거리극축제(ASAF)는 한국에서 탈극장의 정신을 이어온 플랫폼입니다. 안산 도심의 광장, 골목, 공원이 무대가 됩니다. 입장권도, 지정 좌석도 없습니다. 관객의 자리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국내외 극단들이 이 공간을 채우는 방식은 저마다 다릅니다. 거리를 행진하며 관객을 끌어들이는 이동형 공연, 광장 한복판에서 예고 없이 시작되는 장면들, 관객이 퍼포머를 따라 도시 블록을 가로지르는 로드씨어터. 공연이 끝나도 극장 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거리는 원래대로 거리로 남고, 관객은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탈극장 연극은 결국 극장이라는 제도가 연극에서 무엇을 가두어 왔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서 어떤 가능성이 열릴 수 있는지 탐구합니다.
3. 장소가 사건이 된다 — 장소특정적 연극
탈극장이 "극장 밖으로 나간다"는 이야기라면, 장소특정적 연극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탈극장 연극이 공간을 도구로 삼는다면, 장소특정적 연극은 공간 자체를 주인공으로 세웁니다.
단순히 새로운 공간을 빌리는 것이 아닙니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그 장소의 역사, 기억, 질감이 공연의 내용이 됩니다. 장소는 배경이 아닙니다. 형식이자 내용이며, 역사적·사회적·정치적 맥락을 지닌 스토리텔러가 됩니다. 이 공연은 다른 곳에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 공간이 꼭 유명한 곳일 필요는 없습니다. 서울 을지로 골목, 문을 닫은 공장, 곧 철거될 건물 —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속화되면서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 도시의 틈새들에서 예술가들은 공연을 이어왔습니다. 좁은 골목,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 기름 냄새가 배경이 되는 공간. 곧 사라질 장소에서 벌어지는 공연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발언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바키 「남산 도큐멘타」 — 극장이 스스로를 증언할 때
2014년 크리에이티브 바키(연출 이경성)는 남산예술센터 무대 위에서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 — 극장 편」을 공연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극 중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공연이 벌어지는 건물 자체였습니다.
1962년 드라마센터로 개관한 최초의 현대식 극장이었던 남산예술센터는 중앙정보부의 개입과 국가 검열의 역사를 품은 공간이었습니다. 배우들과 제작진은 오랜 기간 신문 아카이브를 뒤지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렇게 수집한 역사의 층위들이 무대 위에 쌓였습니다. 관객은 그 극장의 좌석에 앉아 그 극장의 역사를 봤습니다. 다른 극장에서는 동일하게 재현될 수 없는, 장소특정적 연극입니다.

장소특정적 연극에서 관객의 이동은 단순한 물리적 움직임이 아닙니다. 걷고, 멈추고, 만지고, 냄새 맡는 행위를 통해 관객은 그 장소에 축적된 것들을 몸으로 지각합니다. 텍스트가 아니라 공간이 서사를 만들고, 관객의 몸이 그 서사를 완성합니다.
탈극장 연극이 관객의 몸을 활성화한다면, 장소특정적 연극은 그 몸을 장소의 기억과 연결시킵니다. 관객은 그 장소 기억의 증인이 됩니다. 그렇게 공연은 퍼포머와 관객만의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품어온 시간 전체와 함께하는 사건이 됩니다.
관객의 자리
그리스어 테아트론(theatron)은 '보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공연하는 곳이 아니라 보는 곳. 극장이라는 공간은 처음부터 관객의 행위를 중심으로 이름 붙여졌습니다.
탈극장과 장소특정적 연극이 궁극적으로 되묻는 것도 어쩌면 그것입니다. 관객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라면 — 그곳이 어디든 — 그게 극장입니다. 관객의 자리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연극의 본질은 처음부터 가장 단순한 자리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피터 브룩이 말했듯이. "어떤 이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걷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면 —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