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와 신체의 조건을 해체하는 SF 3편
나는 나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성립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하나의 몸, 연속하는 기억, 타인과 구분되는 경계. 내가 속한 관계와 공동체.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이 조건들이 동시에 유지될 때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본질을 묻는다는 것은 결국 이 조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SF는 바로 그 조건들을 건드립니다. 설정 하나로 신체를 교체하고, 경계를 허물고, 자아를 타자화시킵니다. 그렇게 당연했던 것들이 흔들리는 순간, 질문이 남습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 사유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sf 소설 3편을 소개합니다.
그렉 이건 「대여금고」
신체가 바뀌어도 나는 나인가

매일 아침, 낯선 몸에서 눈을 뜹니다. 거울 속 얼굴은 어제와 다르고, 손의 모양도, 키도, 목소리도 달라져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그대로입니다. 22년 전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기억, 천 여명의 몸.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오로지 대여금고의 기록뿐입니다.
세계는 지금과 같습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렉 이건(Greg Egan)의 단편 「대여금고」는 태어날 때부터 매일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나는 존재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제와 같은 몸으로 일어납니다. 그는 그러지 못합니다.
몸은 매일 교체되지만 의식과 기억은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유일한 장치가 대여금고입니다. 도심 중심부의 번호 자물쇠식 금고 안에, 1968년부터 거쳐 온 숙주들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을 빠짐없이 기록해왔습니다. 22년, 천여 명의 흔적. 신체가 사라지고 이름이 없어도, 이 금고만이 자신의 어제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금고가 그의 몸입니다.
숙주들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1951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태어났고, 모두 같은 도시에 삽니다. 이 설정에는 비밀이 있고, 그것이 어떤 신경외과적 실험의 결과일 수 있다는 가설이 소설 후반부에제시되며 섬뜩한 진실은 향해 달려갑니다. 해석의 여지를 남긴 채, 소설은 주인공의 내면 한 줄로 수렴합니다.
"내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다. 이름을 가지는 꿈이다. 오직 하나뿐이고, 죽을 때까지 내 것인 이름. 그게 어떤 이름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이름을 갖는다는 것. 우리는 이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깁니다. 태어나는 순간 이름이 붙고, 그 이름은 같은 몸, 같은 얼굴과 함께 평생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몸도, 이름도, 누군가가 알아봐주는 얼굴도 없습니다.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타인이 나를 인식하고, 기억하고, 다시 불러주는 행위입니다. 나를 어제와 같은 사람으로 대해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어제의 나와 연속됩니다. 주인공이 꿈꾸는 것은 결국 이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줄 관계입니다. 자아는 신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억하는 타인과의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나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 이름을 불러주는 누군가의 호명 앞일까요.
우다영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합쳐져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
한 몸에서 둘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는 날, 다시 하나가 됩니다.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수록 단편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는 이 설정 하나로 자아의 경계를 묻습니다. 이 소설의 세계에서 사람은 알파와 오메가, 둘로 분리되어 태어납니다. 쌍둥이처럼 보이지만 다릅니다. 둘은 하나의 완성된 존재가 분리된 상태입니다. 같은 기원에서 나왔고, 언젠가 다시 합쳐질 운명입니다. 그때까지 알파와 오메가는 각자의 몸으로, 각자의 삶을 삽니다.
나의 오메가는 나와 같은 여성이었고, 나와 같은 왼손잡이였다.
문제는 같은 곳에서 왔다고 해서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리된 채 살아가는 동안 둘은 서로를 낯설어하고, 때로는 혐오합니다. 공유할 수 없었던 시간이 각자에게 다르게 쌓이고, 그 거리가 생경함이 됩니다. 같은 기원을 가진 존재인데도 둘 사이에는 끝내 좁혀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소설의 제목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있는 칼.
그리고 열여덟 번째 생일, 잠든 사이 성인식이 이루어집니다. 깨어나면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트윈의 경험, 생각, 기억이 하나의 자아로 합쳐집니다. 알파와 오메가와 하나가 된 '나'는 여느 날처럼 할머니와 차를 마시며 친숙한 사랑을 느낍니다. 합일은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완성됩니다. 그러나 소설은 묻습니다. 하나가 된 이후의 '나'는 알파인가, 오메가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누군가인가.
이 소설은 하나를 둘로 분리한다는 설정 자체로 역설을 만듭니다. 가장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타자가, 사실 나와 같은 기원의 존재라는 것. 이 설정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가족, 같은 공동체, 같은 언어를 공유하면서도 서로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들. 알파와 오메가의 거리는 SF적 설정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감각은 우리가 매일 겪는 것입니다.
타자를 이해하는 일이 곧 나를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 나라는 것의 본질은 어쩌면 나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내가 속한 세계의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를 이해하게 됩니다. 합일 이후의 '나'가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내가 만든 이야기가 나를 다시 쓸 때

당신의 기억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요. 당신이 믿어온 세계는 어디까지 진짜인가요.벽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안 뒤에도, 우리는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요.
우다영의 단편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는 지구 종말 직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감마선 폭발로 종말을 앞둔 인류는 요람이라는 캡슐 안에 몸을 보존한 채, 매기라는 시스템 안에서 의식과 감각만으로 살아갑니다. 이 세계에서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공동체 감각을 유지하는 문명적 장치입니다.
주인공 혜경은 그 세계의 영화감독입니다. 영화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세계를 보여주는 창조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승용이라는 인물에게서 편지가 옵니다. 승용은 혜경의 영화를 동경했고, 그 영화를 통해 자신이 사는 세계를 의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 시스템 바깥으로 나갔다고 주장합니다. 혜경은 그 편지를 처음엔 믿지 않으려 합니다. 바이러스일 수도, 망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읽어버린 뒤였습니다.
혜경은 창조자였습니다. 자신이 만든 영화가 승용을 바꾸고, 승용은 다시 혜경에게 돌아와 그녀가 믿던 세계를 흔듭니다. 내가 만든 이야기가 나보다 커져, 결국 나를 다시 쓰기 시작하는 것. 이것은 혜경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 공동체, 사회가 만들어놓은 이야기들을 진실처럼 흡수하며 자랍니다. 그것이 허구일 수 있다고 의심하기 전까지는, 그 이야기들이 곧 나입니다.
이 소설이 건드리는 것은 가상세계의 진위가 아닙니다. 내가 진짜라고 믿어온 세계가 누군가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안에서 형성된 나는 어디까지 진짜인가. 우리는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가치관, 기억, 세계관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사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공동체가 진실이라고 말한 것을 진실로 흡수하고, 반복된 이야기를 기억으로 착각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을 나라고 부릅니다. 혜경의 머릿속에 남은 까만 개처럼, 내가 나라고 믿는 것들이 어느 순간 타자의 이야기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 나를 나이게 한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이 소설은 그 흔들림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세 소설을 읽고 나면 나를 구성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하나씩 흔들립니다. 「대여금고」는 신체를,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는 관계를,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는 기억을 건드립니다. 나를 나이게 한다고 믿었던 조건들이 차례로 무너진 자리에 서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세 소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완성된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 신체와 관계와 기억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매 순간 다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것. 그것은 불안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나를 이해하는 더 정직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나는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라, 타인과의 사이에서, 내가 속한 세계의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있는 존재입니다.
세 소설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독자를 다양한 조건과 질문 앞에 서게 만듭니다. 세 소설은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