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울타리에는 검은 양이 살고 있다

사고의 안개를 걷어내는 큐레이션 blacksheep wall

모든 울타리에는 검은 양이 살고 있다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수집품은 모은 이의 생각의 총체다.” 구경 차 들린 회현 지하상가의 한 LP 가게 사장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평생 LP를 수집한 당신의 삶을 반추하며 던진 이 문장은, 원고의 첫 문장을 고민하던 필자에게 실마리가 됐죠. 오늘 소개할 브랜드 blacksheep wall과 운영자 이광식도 ‘수집가’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blacksheep wall의 정체성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셀렉트숍’이르는 수어가 적절해 보입니다. 취급하는 품목들의 이면에는 일관된 메시지가 있고, 물건을 선별해 소개는 기준도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물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빈티지 숍’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지만, 블랙쉽 월이 방점을 찍는 것은 물건 자체보다 물건이 품고 있는 맥락과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셀렉트 숍’만큼 이곳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도 없습니다. 운영자 본인이 이 정의에 공감할지는 모르겠지만요.

blacksheep wall은 전주국제영화제와 스컬프 스토어 한남 등에서 팝업을 열며 오프라인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습니다. 운영자인 이광식은 필자와 동갑내기이자, 에디터로서 커리어를 쌓아온 인물입니다. 필자 역시 프리랜서로 일하며 나름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기에, 그의 활동을 지켜보며 적지 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자신의 방식으로 지속한다는 건, 현실적인 고민을 동반합니다. 그에게 blacksheep wall을 꾸리게 된계기와 이광식이 직접 경험한 ‘회사 밖의 자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든 양 떼에는 검은 양이 있다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blacksheep wall(이하 블랙쉽월)의 판매 품목은 티셔츠, 포스터, CD, 서적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저마다의 역사를 간직한 영화 포스터들입니다. 예컨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초기 개봉 포스터에는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지브리가 설립되기 전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죠. 이어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이전의 역사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짚으며,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티셔츠를 예시로 들면 좀 더 이해가 쉽게 갈 겁니다. 디즈니 캐릭터인 미키와 미니가 성관계를 충격적인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 순진하고 가족적인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훼손하는 악의적인 그림처럼 보이는데요. 하지만 이 옷은 70년대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이 운영하던 펑크 부티크 세디셔너리즈(Seditionaries)의 문제적 디자인을 바탕으로 합니다. 순수함과 낙관주의의 상징을 불온한 이미지로 전복시킨 이 티셔츠는, 당대 기성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의 맹목적인 믿음을 겨냥한 일종의 ‘이미지 테러’였다고 합니다.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유럽에는 “모든 양 떼에는 검은 양이 있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검은 양은 염색이 잘되지 않는 골칫덩이이자, 어두운 밤에는 늑대로 오해받기 쉬운 존재였는데요. 돈이 되지 않으면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말하자면 무리 안의 이질적인 존재였던 셈이죠. 그 이름처럼, 블랙쉽 월의 큐레이션은 ‘이면성’을 향합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이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처럼, 통상적인 기대와 주류의 통념을 비켜선 물건들을 집요하게 수집하고 소개합니다.

운영자 이광식은 이면성의 원천은 '시간'에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와 음악, 패션이라는 사적 취향의 영토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은, 블랙쉽 월을 거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고의 사각지대’를 밝힙니다. 마케터와 에디터를 거쳐 회사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지금, 오직 자신만의 기준으로 이 작은 브랜드를 일궈가는 중입니다.


PART 1. 집안 살림 팔아 연명하는 에디터

냉정하게 말해서 저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적인 ‘생산자’가 아닙니다.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물건들을 저만의 안목으로 모아서 판매하는 사람이지요.
사진 : 지정현

Q. 자기소개부터 시작해보죠.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쉬었음 청년입니다. 집안의 살림살이를 하나둘 팔아가면서 겨우 삶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Q. 시작부터 난관이네요. 편하게 말고 공식적인 버전으로 다시 부탁드립니다. 

이거 못써요? 음… 요즘 제 삶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알트탭(Alt+Tab)’이네요. 화면을 다급하게 오가듯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며 살고 있거든요. ‘이 일만으로도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익이 필요하다는 현실 때문에 ‘취업’에 대한 고민도 계속하고 있어요.

Q. 블랙쉽월을 시작하기 전에는 직장인이셨잖아요. 그동안 어떤 커리어를 거쳐 오셨나요?

첫 직장은 홍보 대행사 인턴이었어요. 그곳에서 반년쯤 기업의 리스크 관리 업무를 하다가, 패션 일을 하고 싶어 편집숍의 매장 스태프로 들어갔죠. 그 다음엔 패션 매거진에서 에디터로 2년 동안 일했고, 이후에는 다시 편집숍으로 자리를 옮겨 마케터로 1년 반 정도 근무했습니다.

사진 : 지정현

Q. 그간 쌓아오신 다양한 직무의 역량이 브랜드에 녹여있는 듯한데요. 자신을 소개할 때 보통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시는지요.

‘에디터’라는 단어에 가장 큰 애착을 느낍니다. 요즘은 워낙 여러 방면에서 흔하게 쓰이다 보니 거리를 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요. 냉정하게 말해서 저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적인 ‘생산자’가 아닙니다.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물건들을 저만의 안목으로 모아서 판매하는 사람이지요.

Q. ‘큐레이션’의 영역에서 ‘에디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이죠?

그렇죠. 요즘은 정보가 너무 넘쳐나서 오히려 취사선택하기 힘들어요. 대중에게 ‘이 물건을 왜 소장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설득해야 하죠. 가치를 발견해 내고, 거기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해 독창적인 가치를 만드는 게 바로 에디팅이라 생각해요.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기도 하고요.

Q. 공감합니다. 술자리에서도 ‘What To Say(메시지)’가 없으면 에디팅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술자리가 아니어도 맨날 얘기하긴 해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바'나 선명한 메시지가 없다면 그건 에디팅이 아니라고요. 에디팅을 그저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만지는 기술적인 편집으로만 접근해 버리면, 에디터라는 역할의 무게감이 너무 납작해지잖아요.


PART 2. 어둠을 밝히는 울타리

영화나 사물의 백그라운드에 곱씹을 만한 서사가 있는 물건들에 마음이 가요. 평면적인 물건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툭 튀어나온 의외의 지점들을 건드리는 거죠.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Q. 그런 에디팅 철학을 바탕으로 시작한 브랜드가 바로 ‘블랙쉽 월’이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브랜드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패션 매거진을 퇴사한 뒤, 정형화된 글보다 재밌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만든 계정이 'BlackSheep Farm(이하 블랙쉽 팜)’이었습니다. 정치, 패션, 예술 등 여러 문화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하는 콘텐츠를 올렸죠. 이름 그대로 검은 양처럼 어디에도 쉽게 섞이지 못하는 비주류나 이단아들의 서사를 다루고 싶었어요. 이후 제 소장품을 소개하는 계정으로 따로 만든 것이 블랙쉽 월이고요.

Q. 블랙쉽 팜이 먼저네요? 저도 종종 찾아 읽는데, 어떤 집요함이 느껴져요. ‘이런 것도 있었는데, 몰랐지!’하고 꺼드럭거리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요.

거드럭도 중요하죠. 인간이 단 하나의 취향만 가지는 건 아니잖아요? 패션, 영화, 음악 같은 잡다한 취향들도 결국 ‘문화’라는 거대한 지붕 아래에선 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블랙쉽 월은 그렇게 연결된 문화 안에서, 시간의 흔적이 있는 물건을 소개하는 브랜드입니다.

사진 : 지정현

Q. 브랜드 이름이 심오해요. 90년대생들에게는 스타크래프트의 맵을 환하게 밝히는 치트키로 익숙한 단어잖아요. 

‘꿈보다 해몽’하기 좋은 이름이잖아요. 말씀하신 대로 '어둠에 싸인 맵을 밝히는 치트키라'는 해석도 좋네요. 우리가 평소 미처 보지 못했던 문화의 이면을 선명하게 밝힌다는 의미잖아요. 

Q. 이름에 걸맞기 위해선, 아무거나 모으진 않을 텐데요. 바잉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있다면요?

‘숨겨진 이야기’의 유무가 중요해요. 겉보기에 예쁘기 보다는, 영화나 사물의 백그라운드에 곱씹을 만한 서사가 있는 물건들에 마음이 가요. 평면적인 물건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툭 튀어나온 의외의 지점들을 건드리는 거죠.  <해리포터> DVD를 보다 보면, 세계관 속 밴드가 등장해 공연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펄프의 자비스 코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처럼 실제 영국 밴드 멤버들이 연기하고 연주했죠. 본편에서는 짧게 편집되어 전체 공연을 확인하기 어렵지만요. 모두가 아는 주류 콘텐츠 안에서 나만 알아본 듯한 디테일을 발견하고, 그걸 소개하며 슬쩍 꺼드럭거리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고요.


PART 3. 아카이브를 지탱하는 시간의 힘

고집스럽게 그 사물이 품은 시간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치가 맞는지 집요하게 살펴보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Q. 포스터, CD, 티셔츠 등 블랙쉽 월이 다루는 영역을 보면 영화, 음악, 패션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세 분야를 애호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전문가분들처럼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창작물을 모조리 흡수하는 타입은 아닙니다. 그저 저라는 사람의 사상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것들이라 곁에 두고 좋아하는 것이죠. 대신 ‘왜 좋아하는지’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Q. 그걸 보통 애호한다고 부르긴 해요. 그럼 ‘왜' 좋아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영화는 ‘타인의 시선을 엿볼 기회’에요. 인간은 평생 자신의 한정된 시각에 갇혀 살아가는데, 카메라 렌즈를 빌려 감독이나 인물의 시선을 완전히 훔쳐보며 타자성을 경험할 수 있죠. 음악은 과거의 특정 순간을 불러오는 강력한 매개체입니다. 존 메이어의 노래를 들으면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의 공기와 날씨가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것처럼요. 마지막으로, 저는 패션을 제 내면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입을 수 있는 매체’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Q. 블랙쉽 월의 아카이브를 관통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시간성'이요. 은연중에 부모님에게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어요. 아버지는 물리교육을, 어머니는 사회교육을 전공하셨는데 전혀 다를 것 같은 두 학문의 공통점이 바로 ‘시간’이더라고요. 그래서 저 역시 시간이 내포된 것들에 끌리는 것 같아요.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Q. 그럼 ‘시간성’이 부여된 물건 중, 맨 처음 탐닉했던 게 뭔지 궁금한데요.

역사서와 사회과부도요. 지도라는 시각 매체 안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경이 변하고 역사가 바뀐 내역이 담겨있으니까요. 어릴 적 남들이 공룡 이름을 외울 때 저는 고집스럽게 국가와 수도, 국기를 외워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당시엔 좀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Q. 별난 지점이 있긴 하네요. 말씀하신 ‘시간성’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요? 단순한 ‘오래됨’과는 다른 것 같아서요.

사물이라는 평면성 위에 서사와 맥락이 쌓이는 거죠. 서사는 그 물건이 사회와 맺는 관계 속에서 생겨날 수도 있고, 때로는 그걸 바라보는 개인의 시선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요. 결국 핵심은 ‘알고 싶다’라는 탐구심입니다. 고집스럽게 그 사물이 품은 시간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치가 맞는지 집요하게 살펴보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Q. 대화를 나눌수록 자신의 기준에 확신을 둔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 같아요. 고집스러운 거 인정하시죠?

제 고집이 타인을 배척하는 ‘아집’은 아니에요. 아집이 대상을 제대로 탐해보지도 않고 편협이라면, 고집은 대상을 깊숙이 탐구해 보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어요. 탐하고, 거기에 지금 새로운 가치를 더하려면 반드시 고집이 있어야 하죠. 고집이라는 중심 뼈대가 제대로 서 있어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고요.


PART 4. 위트라는 적분상수

삶을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잉여의 가치, 그 적분상수가 바로 위트와 여유입니다.
사진 : 지정현

Q. 조직 생활을 하면서도 충분히 취향을 다룰 수 있었을 텐데, 안정적인 회사를 벗어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마케터와 에디터로 일하며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많이 경험했는데요. 실무자로서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갈증도 커졌어요. 회사에 제 에고(Ego)를 너무 많이 투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 결과물이 온전한 내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진짜 ‘내 것’을 해보고 싶어서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Q. 저도 비슷한 갈증을 느껴 퇴사해서 공감이 가는데요. 하지만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건 현실적인 일이잖아요.

처음에는 개인 플리마켓에서 소장하던 책들을 판매했는데, 잘 팔리더라고요. ‘나 혼자만 이런 취향을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죠. 결정적으로 ‘스컬프 스토어 한남’이나 전주국제영화제, 매버릭하우스 등에서 팝업을 진행하며 반응을 확인했을 때였어요. 내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 모은 물건들을 살펴보는 분들을 만나면서 혼자만의 취향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Q. 최근 진행한 스컬프 한남 팝업에서는 특히 비주얼 에셋과 티셔츠 등 굿즈 제작에 공을 들인 걸로 알아요.

수익과 상관없이 재밌고 멋있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주변 지인들에게 연락해 함께 포토그래피 촬영을 진행했죠. 이후에는 곡을 골라 CD를 구워서 인비테이션도 보냈고요. 팝업 현장에서는 패러디 요소가 가미된 티셔츠류가 가장 반응이 좋았어요. 저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생산자가 될 수 없으니, 기존의 아이콘을 비틀어 ‘위트’를 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죠.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Q. 말씀하신 ‘위트’라는 키워드가 블랙쉽 월을 이해하는 핵심 같은데요. 광식 님이 생각하시는 위트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가끔 취향과 문화를 수학의 ‘적분’에 비유하곤 합니다. 흘러가는 시간의 단면들을 정적분 해 촘촘히 모으면 결국 하나의 ‘인간’이자 ‘문화’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적분을 마쳤을 때 끄트머리에 붙는 '적분상수(C)'가 바로 ‘위트’라고 생각합니다.

Q. 적분…상수요? 전 수학 때문에 재수했단 말이에요.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세요. 

인류의 문화는 늘 먹고살 만한 이후의 ‘잉여 산물’이 있을 때 발전했습니다. 짐승의 공격을 막기 위한 옷이 패션이 되고, 움집이 가구가 된 것처럼요. 삶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게 만드는 잉여의 가치, 그 적분상수가 바로 위트와 여유입니다. 블랙쉽 월과 제 물건을 좋아하는 분들도 결국 이 위트를 좇고 향유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PART 5. 고독한 자립 대신, 서로를 지탱하기로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Q. 지금의 일을 본인의 평생 ‘업(Job)’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솔직히 매달 고정 수익이 없다 보니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을까?” 하는 현실적인 불안감은 늘 안고 삽니다. 나중에 개인 매장을 열더라도, 안정적인 프리랜서 에디터 일 같은 메인 잡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죠. 하지만 블랙쉽 월을 그만둘 마음은 없습니다. 회사는 이직하거나 퇴사할 수 있지만, 이건 ‘자아실현’ 그 자체거든요.

Q. 결국 현실적인 불안과 애정이 함께 가는 일이네요. 그런 점에서 광식 님에게 ‘자립’은 어떤 모습이에요?

저는 제가 온전히 혼자서 자립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제 주변의 지인들과 서로 끊임없이 도움을 주고받는 ‘연결성’ 덕분에 이 브랜드를 영위하고 있어요. 혼자 브랜드를 운영하면 늦잠을 자도 되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자유가 있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명확합니다.

Q. ‘현실적인 한계’를 체감한 때가 있다면요.

당장 비주얼 촬영을 해야 하는데 제게는 좋은 카메라가 없고, 모델을 고용할 돈도 없었죠. 그래서 주변 친구들에게 무작정 부탁했어요. 그런데 그 바쁜 평일, 저 하나를 돕겠다고 무려 17명의 친구가 촬영장에 모여주었죠.

이미지 출처 : blacksheep wall

Q. 평일날 17명은 대단하네요. 전 친구 17명 모을 자신 없어요.

인생 제대로 살았구나 싶더라고요. 화보를 찍고, 포스터와 CD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전부 제 주변의 동료들이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덕분이에요. 같은 고민을 나누는 동료들과 서로를 지탱 삼아 함께 ‘자립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며 단단해지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배워가는 자립의 의미입니다.

Q. 마지막으로, 블랙쉽 월이 어떻게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거창한 성장은 바라지 않아요. 딱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크면 좋겠습니다. 돈은 적당히 벌더라도, 제가 정성껏 모아둔 아카이브에 관심을 두는 이들과 복작복작 재미있게 지내는 삶을 꿈꿔요. ‘검은 양’은 애초에 주류가 아니에요. 유심히 지켜볼 때 비로소 재미있어지는 브랜드로 남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