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고리를 뒤로 하고

홀로서기를 택한 이브(Yves)의 세 앨범

안정적인 고리를 뒤로 하고
출처: 이브(Yves) <LOOP> 앨범 커버

자유로워지는 것에도 연습과 적응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도 마치 관성이 작용하는 듯, 어딘가에 오랫동안 심리적으로 종속되어 있던 이들은 자유를 환영하다가도 뒷걸음질 쳐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 하곤 하죠.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며 사람마다 비로소 홀로 서게 되는 과정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자립하려는 이들은 여러 개의 감정적 터널을 거쳐서 제 발로 단단히 서게 되는 듯합니다. 이 터널의 이름은 설렘이기도, 두려움과 막막함이기도, 혹은 그 무엇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혼란 그 자체이기도 할 겁니다. 

이런 감정적 동요를 자주 접하게 되는 컨텐츠 중 하나는, 그룹으로 활동을 이어가다 새롭게 솔로 활동을 시작한 아티스트의 인터뷰입니다. 그룹의 일원으로서 정해진 시스템과 규칙을 따르고, 내 옆에 있는 멤버와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익숙했던 이들이 홀로 걷는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 의심에 빠지기도 하고, 자율성이 안겨 주는 부담감에 좌절하기도 하죠. 우리가 받아 드는 결과물은 매끈할지언정,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독립하는 자의 많은 시행착오와 고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The 9th Single Album <Yves> - new (이브의 데뷔 프로젝트 싱글 앨범 타이틀곡 MV)

오늘 소개할 솔로 아티스트 ‘이브(Yves)’ 또한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감정의 터널을 지나는 중입니다. 2017년, 데뷔 프로젝트 싱글 앨범 <Yves>를 발매하며 ‘이달의 소녀’라는 걸그룹의 멤버로 활동을 시작한 이브는 기존 소속사와의 전속 계약 효력이 정지되며 활동을 중단한 뒤, 얼터너티브 장르를 기반으로 한 음악 레이블 ‘파익스 퍼 밀(PAIX PER MIL)’에서 새롭게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죠. 앞을 가로막는 것을 넘어 새로운 내가 되겠다고 선언하며(‘new’) 세상에 얼굴을 비췄던 아티스트 이브는 다시 한번, 그러나 오롯한 개인으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케이팝 장르의 얼터너티브(Alternative) 음악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솔로 아티스트 중, 이브의 앨범이 유독 독립, 자립이라는 키워드와 가까이 닿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이브의 상황적 배경이 고스란히 앨범에 담겨 있고, 이에 따른 감정적 서사와 생각의 솔직한 변화가 앨범을 거치며 단계별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솔로 아티스트로 홀로 서고자 하는 첫 다짐에서 시작해 자아와 내면을 향한 탐구를 거치지만, 다시금 혼란과 불안에 빠져버리는 세 앨범의 연결된 서사는 그 자체로 낯선 길을 홀로 걷는 이들의 심리적 변화를 대변하기도 합니다. 비록 아직 앨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싱어송라이터는 아니더라도 작사·작곡부터 비주얼 디렉팅까지 앨범 제작 전반에 이브의 의견과 호오가 적극적으로 반영된다고 하니 충분히 이브라는 아티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브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린 미니 1집 앨범부터 감정적 오류와 혼란을 솔직하게 담아낸 미니 3집 앨범까지, 그녀의 음악을 따라가며 독립이라는 행위가 수반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천천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길을 잃어야 다른 길이 보여, 1st EP <LOOP>

1st EP <LOOP> - LOOP

Can't stop 덫에 갇힌 너
이미 다쳐 버린 너
Lookin' in the mirror, oh
거울 속에 비친 쉿
Stuck in the mirror, oh
내가 들어온 네
I'm in paradise, yeah, yeah
Yeah, I'm lost but I like it

솔로 아티스트로 독립을 선언한 이브의 첫 번째 미니 앨범입니다. 오랜 기간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며 팀의 방향성과 아이돌 산업 시스템에 자신을 맞춰 온 이브가 ‘정해진 규칙의 고리(loop)’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기꺼이 길을 잃어 온전히 자신을 마주하기를 선택하겠다는 주제 의식이 담겨 있죠. 다시 익숙한 ‘그룹’이라는 형태로, 익숙한 문법의 케이팝 음악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자신의 가능성을 꿈꾸고 탐색하고 표현하고자 홀로서기를 택한 이브의 포부가 빛나는 앨범입니다.

앨범 속 음악들의 영어 가사는 다소 난해하고 어수선하게 읽히지만, 그 난해함과 어수선함이 앨범 전반을 감싸고 있는 들뜬 시작의 분위기와 어우러집니다. 수록곡 중 ‘DIORAMA’와 ‘LOOP’에서는 익숙하게 인식하던 자신과 자신의 삶에 변화를 더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납니다. 특히, 이브가 “이상적인 버전의 자신을 만난다면 어떤 기분과 감정을 느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곡이라고 밝힌 ‘DIORAMA’는 새로운 꿈을 꾸고 더 나은 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의 에너지를 품고 있죠. 앨범의 주제 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풀어낸 타이틀 곡 ‘LOOP’에서도 안정적인 길에서 벗어난 자의 두려움보다는 억눌러왔던 것을 실현하는 자의 즐거움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자유 안에서 유연하게 유영하고자 하는 이브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자유롭고 싶어요. 전 자유로워야 행복한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지난 수 년 간 몸 담아온 시스템이라는 틀이 저의 어딘가를 무의식 중에 막아 서요. 지금 그걸 하나씩 깨 나가는 중 같아요.
- 디에디트, "이브, 날 궁금해해요", https://the-edit.co.kr/80455

길을 잃었지만 이대로도 좋다는 ‘LOOP’의 가사에서, 오히려 어디로든 갈 수 있게 된 해방감과 그 안에서 솟아난 자신감이 읽힙니다.


온전히 떠오르기 위한 침잠, 2nd EP <I Did>

2nd EP <I Did> - Viola

감당 못해 이 세계의 나
덤덤한 척 하는 네 눈빛 속
무너져버린 내 무대 뒷 편에서
무감각해진 나를 바라봐

본격적으로 내면의 이야기와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두 번째 미니 앨범입니다. 온전한 자신을 마주하고 나만의 길을 가기로 했다면, 이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아가야 할 차례입니다. 이브는 자기 안에서 어지러이 표류하는 목소리들과 채 정리되지 못했던 감정들을 응시하며 이를 음악으로 담아냅니다. 이브는 자신의 행복에 큰 영향을 주는 감정이 평온함과 안정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과정과 결과를 녹인 앨범인 만큼, 2집 앨범은 ‘평온함을 찾아나가며 마주했던 감정’과 깊은 내면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브의 갈망이 더 섬세하고 다채롭게 드러나는 자아 탐구 보고서 같은 앨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I did’가 단순하게 ‘나는 했다.’는 뜻이잖아요. 제가 울고, 웃고, 불안해하던 모든 순간들을 다 거쳐서 이 앨범이 나왔다는 뜻에서 ‘나는 했다.’는 우직한 메시지를 목적어 없이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 weverse magazine, "이브 “주변에 함께하는 모든 분들의 행복이 저의 행복이에요” - 이브 EP ‘I Did’ 인터뷰", https://magazine.weverse.io/article/view/1311

주어진 것을 따르고 소화하기만 해도 충분했던 종속과 의존의 시기를 지나, 자신의 길을 더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결정해 나아가려 하는 자에게는 스스로가 품고 있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돌아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독립이란 자신이 향할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고, 그 방향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해 온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의 복합적인 작용을 통해 그 윤곽이 그려지기 마련이니까요.

수록된 곡 중 ‘Viola’와 ‘DIM’은 자기 안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조금 더 뚜렷이 확인하기 위해 생각의 파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던 이브의 솔직한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Viola’에서 화자는 무너진 무대 뒤편에 서서 ‘덤덤한 척’하고 ‘무감각해진’ 것처럼 보이는 ‘나’를 거리를 둔 채 다시 바라보며 혼란을 감내하죠.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를 지난 ‘나’는 이제 정말 괜찮은 걸까요? 여전히 아픔이 남아 있는 걸까요?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맴돌며 충돌하는 자기 안의 소리에 지친 화자는 반복적으로 ‘space’를 외칩니다. ‘복잡하고’, ‘뇌가 타버릴 것 같’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들여다봐야 내 발길을 어디로 향하게 할지 알 수 있을 것이기에, 이제 시작된 내면으로의 잠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낯설고 깊은 곳으로 향해 갑니다.

앨범의 마지막 트랙 ‘DIM’은 그렇게 깊이 침잠해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들은 것과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곡입니다. 고요함이 커다란 소리로 들릴 만큼(“You can hear the silence growing on the floor”) 깊고 조용한 곳을 향해 파고든 화자는 깊숙이 가둬 두었던 자기 안의 모순, 고통, 슬픔을 담담히 읊조리듯 노래합니다. 마치 평온함을 찾은 듯이 말이죠. 점점 안으로 향하는 나선형의 길을 걷듯, 나아갈수록 끝을 향해 소멸해 버릴 것 같았지만, 그 끝은 소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출발점에 서게 되죠. 자신에 대해 알고 싶고(“Let me see now, who I really am”), 계속해서 자유를 좇는(“Chasing freedom from this weight again”) 화자는 오랜 침잠 끝에 다시 해저를 박차고 수면 위를 향할 겁니다. 이 앨범은 그렇게 떠오르는 것까지 해내고야 만 이의 이야기입니다.


필연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의 오류, 3rd EP <Soft Error>

3rd EP <Soft Error> - White cat

If I was lost here, would it be better?
If I just can’t go back that day
I’m hoping hopes for another chance to be coming back
I’m hoping hopes for another chance to stay or run away

변화를 겪고 조금은 달라진 자아와 정체성으로 홀로 세상에 섰지만, 혼란이 끝나지 않은 상태를 표현한 세 번째 미니 앨범입니다. 이때의 혼란은 변화한 자신과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 사이의 거리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성장한 나와 여전히 불안한 내가 공존하고 있는 데서 생기는 이질감에서 피어나기도 하죠. 전자기기 등에 발생하는 일시적인 오류를 뜻하는 ‘Soft error’는 이브가 겪은 거리감, 이질감, 불안함 등의 감정적 오류를 상징하는 은유로 기능합니다.

더블 타이틀곡이자 첫 번째 트랙의 ‘White cat’은 “완벽한 외형을 지녔지만 길 위에 버려진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정체성에서 탈주했지만, 결국 또다시 감정의 종착지 없이 부유하는 나를 그린다”라는 곡의 소개만으로도 이브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앨범의 주제를 관통하는 음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완벽에 가까운 미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사랑받기 위해 애써야 했던 아이돌의 정체성을 탈피하고, 더 자유로운 ‘나’와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선택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이브의 혼란이 투영된 가사들이 엿보입니다. 문득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허공에 물으며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Can I undo?”), 시끄럽게 일어나는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최면을 걸기도 하죠. (“Hypnosis my mind till it’s fine”) 홀로 선다는 건, 평온함에 이르렀다가도 불현듯 이렇게 불안에 사로잡히는 시간의 굴레를 견뎌내는 일 같습니다.

‘Soft error’는 어쨌든 일시적인 오류. 이 감정적 오류는 해결될 것이고 이 오류를 단단한 발판 삼아 우리는 또 다른 미래로 걸어갈 수 있겠죠.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와버렸다면 계속해서 앞으로 가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화자는 불안함으로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오늘 밤보다 더 나은 건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입니다. (“Can’t be better than tonight”) 타인의 이야기보다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음을 향해 걸어갑니다. 

'소프' 마지막 가사에 '내 목소리 들리지? 걔네 말은 무시해'라는 가사가 있다. 솔로를 시작할 때 '너는 이런 음악을 해야 해' '넌 아직 솔로를 할 때가 아니야'라는 외부의 목소리가 많았다. 오히려 '나 할 수 있는데?' 하는 반감이 들더라. 더 도전하고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아직 방황하고 있지만 그 과정 역시 즐기고 있음은 분명한 거 같다.
- jtbc news, "'전기맛' 음악 향한 여정…이브 "방황해도 즐거워요"", https://news.jtbc.co.kr/article/NB12258448

지난 4월, 미니 4집 앨범을 공개한 이브는 꾸준히 새로운 도전과 틀을 깨려는 시도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5곡 중 4곡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며 이전보다 조금 더 주체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하고, 그동안 초점을 두었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감각을 독특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한 시도가 앨범에 담겼죠. 물론 아직 참여 비중이 작사에 치중되어 있긴 하지만, 본인의 앨범을 주도적으로 프로듀싱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인 빛깔을 가진 아티스트가 되어 있을 언젠가를 기대하게 됩니다.

어딘가에 의지하고 기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안정적으로 자신만의 궤도를 확립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발이 묶여있던 기존의 고리가 안락했다면 이를 끊어내는 것은 더욱 어렵죠. 익숙지 않은 방향으로 발을 뻗은 이는 몇 번이고 의심과 불안에 이끌리겠지만, 어떤 날은 그런 상황의 반복 속에서 지치기도 하겠지만, 계속 걸어 나의 궤도를 선명히 만드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입니다. 타인이 만든 고리에 매여만 있는 것보다는, 적어도 내가 만든 궤도 위에 안착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행복의 형태를 더 분명히 마주할 수 있도록 내면의 해상도를 높여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