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르는 실재하는가?

'느낌'으로 실재하는 세계에 대하여

에테르는 실재하는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이미지 출처 hemoviedb

아리스토텔레스의 5원소 개념을 담은 중세 우주론 필사 삽화본 이미지 출처 brewminate

에테르, 존재하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은 것

수백 년 동안 빛의 매개체로 상정됐다가 과학계에 공식 부정된 가상의 물질, 에테르. 에테르는 인간의 믿음 속에서 다양한 역할로 존재했습니다. 2,500년 전의 고대 시인들은 에테르가 하늘을 채우는 영원한 물질이라고 믿었습니다. 에테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흙·물·불·공기와 같은 원소들에 이어 '제5원소'로 정의되기도, 19세기에 들어서는 빛이 이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개체로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빛은 매질 없이도 진공을 가로질러 이동한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비로소 에테르는 실재하지 않는 물질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에테르는 수많은 문화 예술 속에서 여전히 하나의 에너지, 장르, 감각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에테르는 실재하는 걸까요? 에테르의 영역 안에서 탄생한 예술 작품들을 살펴봅니다.

에테르에 의지한 아이들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이미지 출처 hemoviedb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가상의 뮤지션 릴리 슈슈를 중심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영화 속 '에테르'는 아이들과 릴리 슈슈를 연결해 주는 음악적 매질이자, 뮤지션 릴리 슈슈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폭력과 무관심을 견디는 아이들에게 릴리 슈슈의 팬사이트는 유일한 안식처입니다. 그 음악 안에서 느껴지는 에테르를 나누며 아이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연결됩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이미지 출처 hemoviedb

릴리 슈슈를 신격화하고 삶의 구원처로 삼는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폭력을 견디는 유이치, 협박으로 원조교제를 끊지 못하는 시오리, 성폭행을 당하는 쿠노. 심지어 이 모든 폭력의 가해자인 호시노에게도 큰 가정 문제를 겪습니다. 에테르에 더 깊이 의지할수록, 아이들의 현실은 더 가혹해집니다.

영화는 그렇게 소외와 외로움, 사랑에 대한 열망을 '릴리 슈슈'라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통해 그려냅니다. 에테르는 끝내 아이들을 구원하지 못했지만, 희망과 사랑으로서 존재했습니다.

에테르에서 탄생한 또 다른 세계

영화 〈애프터 양〉

애프터 양(2021) 이미지 출처 imdb

한 가정의 AI 로봇으로 설계된 '양'은 인간과 로봇 사이에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주인 제이크는 양을 수리하려다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합니다. 양이 살아오는 동안 매일 하나의 기억 조각을 저장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풍경, 한 여성의 모습 등 양의 내면에는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은 기억과 그리움이 존재했습니다. 영화는 무한한 기억과 의식을 품고 살아야 하는 AI의 삶을 조명하며, 유한성에서 오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킵니다.

양의 세계를 세밀하게 빚어낸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감독 '코고나다'의 의견으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OST인 'Glide'의 리메이크 버전이 삽입되었습니다. 그는 양의 세계를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쓸 때, 청소년의 소외와 그리움을 담은 그 곡이 문득 떠올랐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코고나다는 Glide를 직접 시나리오에 포함했고, 추후 릴리 슈슈의 팬이기도 한 가수 '미츠키'에게 커버를 의뢰했습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이미지 출처 hemoviedb

'연'이라는 뜻을 가진 곡 Glide는 호시노로 인해 자유 의지를 상실한 시오리의 테마곡이기도 합니다. 곡의 가사에는 하늘, 바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존재하는 자연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시오리는 하늘에 나부끼는 연을 바라보며, 하늘을 날고 싶은 열망을 가집니다. 에테르를 동력으로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소녀와, 홀로 기억의 조각을 저장하며 인간의 유한함을 꿈꾸던 양의 모습은 어딘가 닮아 있습니다. 청소년기 아이들의 불완전한 세상을 통해, 감독은 다르지만 비슷한 면을 가진 AI 로봇의 세계를 탄생시켰습니다.

에테르에서 자라난 음악

앨범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국내 인디 밴드 파란노을이 2021년에 출시한 앨범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발매 직후 국내보다 해외 인디씬에서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가 청소년기에 보고 자라온 수많은 것들로부터 영감받아 탄생한 앨범으로, 그 중심에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이미지 출처 hemoviedb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앨범 아트는 실제 영화 속의 장면이고, 수록곡 '아름다운 세상'의 도입부에도 영화 속 장면의 실제 대사를 실었습니다. 호시노에게 함께 괴롭힘을 당하는 유이치와 시오리가 기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유이치가 시오리에게 CD를 건네며 릴리 슈슈를 처음 알려주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이미지 출처 hemoviedb

피해망상, 열등감, 도피와 무기력. 파란노을은 이 앨범을 그가 10대 느꼈던 수많은 감정에 대한 불평과 하소연을 담은 음악이라 표현했습니다. 그 속에는 어떠한 극복도, 위로의 메시지도 없다고 말합니다. 에테르를 믿었던 극 중 아이들처럼, 부유하고 압도하는 슈게이즈 사운드에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청소년기의 감각이 담겨있을 뿐입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지점에서, 파란노을의 음악은 누군가의 에테르가 되어주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_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에프터 양'의 엔딩크레딧에서 Glide를 듣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그 곡은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또 그 영화는 ‘파란노을’이라는 음악을 새로이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에테르'는 영화 바깥에서도 어느덧 20년이 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의 세계에서 이렇게 에테르는 실재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나의 에테르가 당신과 닿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