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이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믿음과 진실을 성찰하는 문학과 영화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너무나도 근본적이고 심오한 질문이라 딱 떨어지는 하나의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대별로 문화별로 답을 내리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죠. 셰익스피어는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온 세상은 무대요 모든 남녀는 한낱 배우일 뿐이라오. 각자 등장과 퇴장이 있고, 한 사람은 자기 시대에 여러 역할을 맡게 마련이지요." 세계를 극장으로, 삶을 하나의 연극 무대로 보는 이 관점을 라틴어로 'Theatrum Mundi(극장으로서의 세계)"라고 합니다.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유럽의 바로크 시대 작가들 사이에서 공유된 이 생각은, 이 세계에서 우리의 역할은 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이기에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함축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이 역할을 내려놓고 옷을 벗듯이 모든 것이 그저 일시적이고 자의적인 것에 불과한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사는 이 연극이 지나가고 나면, 모든 것은 그대로 사라지고 마는 의미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바로크 시대는 이성, 진리 등의 키워드를 강조하던 르네상스 시기가 지난 뒤에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바로크 시대의 예술가들은 인간이 이성만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고 이성적이라 한들 이 세계의 모든 진실을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 연극 무대와 같은 삶 위에서 내가 선택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삶 그 자체를 즐기는 일입니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믿음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작품 세 편을 소개합니다. 두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문학이며, 마지막 작품은 우리 시대의 영화입니다. 세 작품이 여러분만의 삶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 아티클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소설 <돈키호테 I>
'돈키호테'라는 이름은 많이들 익숙하실 겁니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기사를 자처하는 돈키호테가 풍차를 괴물로 알고 달려드는 장면이죠. 기사도가 더 이상 의미 없는 시대에 자신을 기사로 정의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역할의 선택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소설의 주제의식을 한껏 부각해주는 하나의 예화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의 이야기(El curioso impertinente)>는 돈키호테 1권의 후반부에 삽입된 짧은 예화입니다. 소설 속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죠.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셀모와 로타리오라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안셀모는 카밀라라는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아무런 흠도 없는 아내를 보며 안셀모는 엉뚱한 일을 계획합니다. 카밀라가 정말 자기만을 바라보는 정숙한 여인인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죠. 안셀모는 로타리오에게 아내를 유혹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아내가 친구의 꾐에 넘어가지는 않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로타리오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하는 수 없이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게 됩니다.

카밀라는 당연히 로타리오의 유혹을 뿌리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문제가 생깁니다. 로타리오가 단호하게 남편만을 위하는 카밀라의 모습에 정말로 그녀에게 반하고 만 것입니다. 로타리오의 구애에 카밀라도 결국 마음이 흔들리며 두 사람은 불륜을 저지르게 되고, 안셀모와 로타리오, 카밀라 세 사람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결국 '당치 않은 호기심'이란 아내가 신의를 지킬 것인지 시험하고자 한 안셀모의 호기심을 말합니다. 아내가 정절을 지키는지 확인하려 한 행동이 도리어 아내가 정절을 버리도록 만들었으니까요.
이 예화가 돈키호테 내에 삽입된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합니다만, 한 가지 해석은 이 이야기의 교훈이 돈키호테의 '광기'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돈키호테의 광기란 자신이 기사라고 주장하며 엉뚱한 모험을 계속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모험의 일환으로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농사꾼 처녀가 자신의 귀부인 '둘시네아'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산초가 그녀는 그저 시골 처녀일 뿐이라고 말하자 돈키호테는 '어차피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찬양받는 여인들은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들일 뿐, 나 역시 둘시네아가 고귀한 여인이라고 믿으면 그만'이라고 답합니다. 결국 돈키호테에게 '진실'이 무엇인가를 의심하고 증명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믿는 대로 행하는 일일 뿐입니다.
최선을 다할 것, 꿈이라 할지라도
희곡 <인생은 꿈입니다>
<인생은 꿈입니다(La vida es sueño)>는 스페인 바로크 시대의 유명 희곡 작가인 칼데론 데 라 바르카(Calderon de la Barca)의 대표작입니다. 제목에서부터 극장으로서의 세계라는 개념을 드러내고 있죠. 여기서 꿈은 연극과 비슷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일시적이고 임의적인 꿈은 연극 무대와 같이 허구의 것이지만 우리 삶의 본질을 은유하는 키워드로 등장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세히스문도는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폭군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죄수와 같은 삶을 삽니다. 그의 부왕은 그가 성군이 되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그에게 어떤 진실도 알려주지 않으려 다짐합니다. 어느 날 세히스문도는 잠든 사이에 궁정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왕자로서 잠에서 깨어납니다. 감옥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그는 난폭한 행동을 일삼고 부왕은 그를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낼 것을 명합니다. 감옥에서 다시 눈을 뜬 세히스문도는 왕자가 되었던 하루와 감옥에서 보내는 삶 중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갈팡질팡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결국 어느 쪽이 꿈인지 알 수 없다면, 어느 쪽에서든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결국 왕이 된 그는 예언을 뒤집는 성군이 됩니다.

이 작품에서 세히스문도만큼 중요한 인물은 로사우라입니다. 세히스문도의 사촌에게 강간당한 뒤 명예를 되찾으려 하는 로사우라는 본래 여인이지만 남성의 복장을 하고 왕궁을 찾아옵니다. '여성'이라는 정해진 역할 대신 자신의 명예를 위해 남자 행세를 하고 세히스문도를 위해 검을 들기도 하는 로사우라는 스스로의 역할을 창조해 내는 돈키호테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녀는 세히스문도가 왕이 되는 걸 도움으로써 그가 자신의 명예를 찾아주도록 합니다.
이처럼 <인생은 꿈입니다>는 세히스문도와 로사우라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믿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각자가 선택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낸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 역할이란 세상이 부여한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것을 넘어 타인이 요구하는 정의마저 실현해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리건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영화 <버드맨>
바로크 시대 작품 두 가지를 봤다면, 이젠 현대의 작품으로 시선을 옮겨 봅시다. 영화 <버드맨>은 주인공 리건의 시선을 따라 전개됩니다. 리건은 과거 '버드맨'의 주연을 맡은 스타 배우였지만 이제는 '퇴물'이 되었습니다. 연극 무대를 통해 재기를 노리는 그는 자신이 진짜 버드맨처럼 초능력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진짜 현실' 대신 '그가 보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돈키호테의 시점으로 보는 <돈키호테>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영화는 우리가 본 장면이 '진짜'가 아닐 수 있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예를 들면 리건이 거리를 날아 이동한 장면 뒤에 택시 기사가 그에게 말을 걺으로써 사실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죠. 따라서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리건이 믿는 그의 삶이 그의 망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작품의 결말은 이런 믿음을 뒤집습니다. 리건은 병원 창문으로 몸을 던지고, 그의 딸은 놀라 창문 밖을 내려다 봅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점점 위로 향하며 영화가 끝맺죠. 이 미묘한 시선처리는 리건이 위로 떠올랐다고 믿게 합니다. 하지만 관객은 리건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결국 리건이 몸을 던져 추락했다고 믿을 것인지, '버드맨'으로서 하늘을 날고 있다고 믿을 것인지는 관객의 선택에 맡겨집니다.

조금은 허황된 이 결말에 앞서 영화의 후반부 리건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이런 망상이나 판타지가 아니라도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덧없고 허황된 것인지 꼬집습니다. 자신의 연극 무대를 성공시킬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리건은 무대 위에서 소품이 아닌 진짜 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눕니다. 그가 무대 위에서의 자살을 시도한 것인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평단은 그에게 '슈퍼 리얼리즘(super-realism)'이라는 개념을 부여하며 그의 무대를 극찬합니다. 리건이 총격을 통해 다시금 얻어낸 이 명성은 과연 '실제'일까요, 아니면 평론가들에 의한 '허구'일 뿐일까요?
여기에서 영화의 촬영 방식 역시 눈여겨볼 만합니다. 롱테이크를 연속적으로 배치한 이 영화는 마치 컷 없이 원테이크로 촬영한 듯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수백개의 숏을 이어붙인 결과물입니다. 이냐리투 감독과 스태프들의 인터뷰는 원테이크처럼 느끼는 것이 단순히 관객들의 착각이 아니라 의도된 연출임을 밝힙니다. 컷은 영화를 감상하는 데 있어 그것이 실제상황이 아닌 연출된 영상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하지만 이 컷을 감춤으로써 <버드맨>은 허구와 실제의 경계를 흐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화의 내용과 형식은 모두 우리가 믿는 현실이 어쩌면 '객관적 진실'이 아닌 '진실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름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바로크 시대의 소설과 희곡, 그리고 현대의 영화를 통해 하나의 연극과 같은 삶, 그 안에서 믿음과 진실의 관계에 대해 성찰해 보았습니다. 세 작품은 '무엇이든 원한다면 이루어진다'는 허황된 믿음을 설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객관적 진실이 과연 '진짜'인지 질문합니다. 그런 것은 과연 존재하는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결국은 광기 혹은 꿈으로 표현되는 허구, 상상, 믿음과 같은 것들이야말로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세 작품은 우리 삶은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더 정확히는 결국 무엇이 진실인가는 우리의 믿음을 좇아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우리의 본질로 삼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충실하게 산다면 우리의 믿음은 끝내 우리의 본질 혹은 진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 작품이 여러분 삶의 진실에 관해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