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블링크 본질을 마주하다
존 버거로 읽는 데미안 허스트의 상어와 늑구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동물을 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튜브에는 강아지, 고양이는 물론 물고기나 파충류까지 각종 동물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넘쳐나고, 동물원과 아쿠아리움에는 언제나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죠. 동네마다 반려견 산책 모임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어느새 '도둑고양이'라는 오명을 벗은 길고양이는 우리의 이웃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동물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아티클은 존 버거의 철학을 경유해 데미안 허스트의 '상어'와 대전 오월드의 '늑구'를 바라보며, 인간과 동물 사이에 단절된 시선을 짚어보고 잃어버린 그들의 '본질'에 대해 재고해봅니다.
본질은 시선의 교환 : 존 버거의 『왜 동물을 바라보는가』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는 그의 에세이 『왜 동물을 바라보는가(Why Look at Animals)』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시선의 상호성에 기반해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버거는 제목 그대로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지금 동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태초의 인간에게 동물은 상상력의 원천이자 또 다른 세계의 메신저였으며, 약속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원초적 관계의 본질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있었죠. 그러나 19세기에 도래한 자본주의와 산업화는 동물을 노동의 파트너 자리가 아닌 생산의 상품으로 전락시켰고, 일상에서 사라진 동물의 자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등으로 대표되는 기호화된 이미지가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본질은 삭제되고, 거세된 형상만이 남은 것이죠.
버거는 이 본질의 상실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동물원을 지목했습니다. 동물원은 구조적으로 인간이 동물을 일방적으로 관람하는 공간이기에, 원초적 관계의 핵심이었던 상호 간의 시선 교환은 그 안에서 완벽히 파괴되죠. 그렇다면 이 에세이가 쓰인 1980년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떻게 동물들과 마주하고 있을까요?
완벽한 시선의 단절 :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버거가 말한 '단절된 시선'이 예술 작품 안에서 가장 선명하게 구현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이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입니다.
상어의 사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근 이 작품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투사해온 상어를 통해 죽음의 순간을 느끼도록 합니다. 입을 크게 벌린 채 멈춰 있는 상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죽어 있고, 그 간극에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공포감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상어가 작품 제작을 위해 포획되고 살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데미안 허스트는 어부를 고용해 더 난폭해 보이는 외모의 상어를 요청했다고 하죠. 모순적이게도 죽음의 불가능성을 주제로 한 작품 속에서 상어는 전시 도중 계속 부패했고, 결국 한 차례 교체되며 또 한 마리가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시선을 돌려줄 수 없는 사체. 버거가 말한 상호적 시선은 이 작품 앞에서 예술적으로, 동시에 윤리적으로 완벽히 단절됩니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구조적으로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허스트의 상어는 죽음으로써 시선의 가능성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관람객은 일방적으로 상어를 볼 뿐이죠. 이 앞에서 느끼는 공포를 온전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선의 비극적인 어긋남 : 대전 오월드 ‘늑구’

존 버거의 이야기는 대전 오월드 늑대 사파리 방사장에서 탈출한 여섯 살 늑대, 늑구에게도 이어집니다. 혹은 오월드가 늑구를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만요.
탈출 직후 SNS에서는 기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늑구 목격 사진’이라며 퍼진 이미지가 알고 보니 AI로 조작된 가짜 사진이었던 것이죠. 덕분에 초기 대응이 늦어졌고, 구조 과정 역시 지체되었습니다. 버거가 말한 ‘기호화된 이미지가 실체를 대체하는 현상’이 21세기에는 AI 생성 이미지로 진화하여 한 마리 늑대의 수색을 방해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인데요. 실제로 늑구는 동물원 근처 수풀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화면 속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늑구의 이미지가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늑구를 추적하는 방식 역시 버거가 비판한 동물원의 시선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드론을 띄워 늑구를 내려다보았죠. 직접 눈을 마주치는 대신, 더 높은 곳에서 안전하지만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낯선 기계의 시선에 놀란 늑구는 번번이 달아났고, 구조는 계속 늦어졌습니다. 늑구는 구조 과정에서 인간과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죠.
9일간의 짧은 봄 나들이를 마치고 늑구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러운 자세로 먹이를 먹는 늑구의 일거수일투족이 SNS에 실시간으로 공유되었고, 늑구가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AI 합성 사진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배 속에서 낚싯바늘이 발견되어 시술을 받아야 했던 그 늑구는 없었고, 소비하기 좋게 가공된 늑구의 이미지만이 인간의 화면을 가득 채웠죠. 자유를 누린 대가를 치르고 돌아온 생명은 다시 한 번 이미지로 인간에게 소비되었고, 버거가 말한 완벽히 시선이 단절된 그 공간에 다시 한 번 전시될 예정입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상어도, SNS에서 소비되는 늑구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물을 바라보면서도 스크린 너머로, 유리 너머로 볼 뿐, 그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죠. 존 버거가 진단한 시선의 단절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이웃이 된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다 보면, 필자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고양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신뢰와 애정을 담아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행위, ‘슬로우 블링크(Slow Blink)’죠. 그 순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이 다정한 눈맞춤의 순간이었다는 것을요.
예로부터 눈은 영혼의 창이라 불렸습니다. 버거의 철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눈을 맞추는 행위는 동물의 본질을 마주하는 가장 직관적이고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 될지도 모릅니다. 다른 존재이기에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 몰이해의 심연을 가로질러 시선을 마주하고 교환하는 것. 오늘 누군가의 눈을 온전히 마주한 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