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고개
박지호, 엄정섭

스무고개
TWENTY
QUESTIONS
박지호엄정섭
JIHO PARK
JUNGSUB EOM
2025.4.18.-5.9
피코
PCO
예상보다 길게 이어진 풀밭을 경험했다. 그 방식은 단연 걸음이었고, 전진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무심코 지원을 바랐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은 꽤 여러 번이었다고, 지금보다 적은 나이의 나에게 말을 건다. 동시성이 분주한 듯 뜀박질하며 눈앞을 칠했다.
‘부리로 뿌리를 쫀다. 그것은 곧 푸르뎅뎅해진다. 색 변화를 따지기보단 탓할 구멍을 매우고,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도 내치고 크게 몸을 부풀려도 보았다.’
지붕에 파열음을 얹은 것이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고, 또 그렇게 한 세계의 작동 방식은 적잖이 점잔을 떨었다. 면전이 수풀로 가득해지는 때가 종종 쇠붙이를 불러일으킨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은 평소에 생각하지도 않던 외형으로 가득해지고, 점점 빈틈이 줄어드는 것을 성실한 사무원이 되어 기록한다. 이와 동시에 기껏 다짐한 방랑은 여러 측면으로 접힌다.

크기가 반으로 줄어든 장대를 휘둘렀다. 의도한 것보다 격한 움직임에 사방 중 한 곳으로 치우치며 바닥과 인접해지기 전 모서리를 찾았다. 그것은 밤중에 자주 깨는 사람의 방 안에 있을 법한 모서리였다. 모가 진 가장자리, 그 곳에서 내기를 해도 좋다. 나에게로 기운 인사성이 밝으면 또 얼마나 밝을지. 밤낮으로 환한 일대가 잔바람을 일으키며 손등에 나타났다. 소매로 눈가를 훔치는 것만으로도 예의 일대가 범람해 기분은 근사해지곤 했다. 굳이 수고를 캐묻지 않는 심성이 드높은 도약을 경험한다.
한동안이었을 거다. 아는 사람들은 전부 부표로 보이고, 발바닥에 잎사귀가 돋아난 것이. 대낮의 꿈이나 한밤중에 들이닥친 외로움 같은 상황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그 시간의 다발은 다분히 붉은 기를 띠었다. 그때 불었던 바람은 지금도 여전히 이동을 일삼으며 지낸다. 사물의 뒤틀림을 인지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로 미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푸름을 속되게 발음하여 그것이 어떤 지시에 대한 불응이 되도록 하였다. 내가 돌아갈 빈자리는 시간을 앞당기고 시선을 두드리며 생활을 꾀했다. 종일 흐렸던 날이 맑게 개었다. 천연덕스럽게 들려온 사실에 뙤약볕 사내들의 애간장이 녹은 건 그들의 넉넉하지 못한 형편과 잦은 토로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만히 회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상들의 존재 방식 차이에 대한 식견이 불쑥불쑥 밖으로 튀어나와 겨우 마련한 자리 - 개념적으로 앉거나 서는 공간 - 가 지저분해지곤 했다. 얼음에 생긴 얼룩이 이와 같을까, 하고 공들여 혼잣말하였다.
침묵으로 강을 메우고 반달 모양의 나뭇잎으로 숲의 껍질을 구성했다. 분주한 과정이었으나,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단편적인 생각엔 그에 어울릴 구두점이 필요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 수면 위로 윤곽이 흐릿한 발자국이 찍힌다.
박지호, We All Dance, on the Eve, 2020, 1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분 7초 | 영상_양승규
간간이 중심에 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사교적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수줍은 걸까. 길은 없다가도 있었다. 그것의 상실은 불안정했고, 그에 따라 행보는 필연적으로 걸음을 바닥에 떼었다가 붙였다. 탈착과 더불어 행해진 무엇이 천성을 결정하는지도 모른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진작부터 이를 알고 있는지도. 그러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앎을 구기고 숭고한 테제를 숨기느라 급급한지도 모른다.
시의적절하게 생각나는 사람은 어딘가 좀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의 절반은 가파른 낭떠러지나 깊은 계곡을 찾으러 떠났고, 그럴 때마다 시야는 좁아졌다.
할 말 없는 사람의 선택은 외로워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없는 듯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세상 모든 신호등이 꺼진다면 봐줄 만한 광경쯤은 되겠죠." 새장에 갇혀 날갯짓하는 새의 체념이 어째 옳게 느껴진다.


엄정섭, 캘리포니아 자국 연작, 2021, 종이에 펜, 각각 26x37cm / 박지호, 2100년의 한국 인구 기상도 #1-4, 2025, 한국 인구피라미드 데이터셋, 미래 예측 알고리즘, 잉크젯 프린트, 각각 14.8x10.5cm | 이미지_양승규
시도를 일삼는 사이에 그에게 커다란 동공(洞空)이 생겼다. 그것의 위치는 정해져 있지 않아(오히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외형과 윤곽, 혹은 껍질 같은 개념을 두르고 있는 것은 최소한의 배려 같은 거라고. 후임자를 위해 남겨 놓은 한두 줄 메모 같은 배려. 사나운 글씨체가 가리킨 방향엔 출구가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수를 세다 보면 열에 아홉은 말끝을 흐리게 되는 날씨였다. 그것의 변덕을 마치 자신의 보화라도 되는 듯 굴어도 늘어난 숨은 줄어들 낌새조차 없고. 두 손 가벼운 차림으로 밖을 나선 그가 결국엔 두 어깨가 무거워지는 상황에 사로잡히더라도 그를 밖으로 떠민 방은 무사태평한 시기를 지겹도록 겪을 터였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간밤의 꿈을 설명한다면 그들은 신경 다발 중 한 가닥을 꿈틀거릴지 아니면 철저한 무관심의 영역으로 침잠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