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걱정 없는 추리 시리즈 3선
누가 했는지보다 어떻게 즐길지에 대한 이야기
콘텐츠를 보게 될 때에, 그 어떤 정보도 없이 보는 게 가장 적절한 감상 태도로 정착된 것 같습니다. '스포일러 없는 감상'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무언가를 처음 접하거나 경험할 때에 느끼는 '신선함'이 즐거움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겠죠. 특히 ‘경험 소비’라는 키워드가 강조되는 오늘날에는, 단순히 이야기를 아는 것보다 그것이 내게 어떤 체험이 되었느냐가 더 큰 가치를 지니는 시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미를 위해 스포일러를 가장 주의해야 하는 장르는 아마도 ‘추리물’일 것입니다. ‘탐정이 사건을 해결해 범인을 밝혀낸다’는 구조가 명확한 만큼, 장르의 공식이 독자와 시청자의 기대를 형성해온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알고 나면 당연히 앞선 이야기에 어떻게 몰입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추리물이 있습니다. 기존 추리물의 본질이 단순히 ‘범인을 알아내는 것’에만 있다면, 이 작품들은 그 공식에서 조금 벗어나 사건을 둘러싼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개해나가는 데에 집중합니다. 즉 '사건의 해결'이라는 스포일러를 알게 되더라도, 충분히 몰입하고 즐기는 것이 가능한 작품들인 것입니다. 과연 추리물의 공식을 각각 어떻게 비틀었는지 하나씩 확인해볼까요?
범인부터 밝히고 보는, <포커 페이스>

라이언 존슨(Rian Johnson)의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는 다들 보셨나요? 기존의 <나이브스 아웃>과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그리고 2025년 말에 넷플릭스로 공개된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까지, 탐정 브누아 블랑(Benoit Blanc)이 등장해 각 작품마다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독특한 남부 억양과 화려한 패션, 괴짜 같은 성격 모두 눈길을 끌지만 그의 막힘 없는 추리 솜씨가 제일 인상 깊은 캐릭터였죠. <포커 페이스>는 바로 이 추리물 시리즈 영화를 제작한 라이언 존슨의 작품입니다.
동영상 출처: 왓챠 공식 유튜브 채널
주인공 '찰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이 진실인지, 혹은 거짓말인지를 분간해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찰리는 이 능력과 본인의 관찰력을 적극 활용해, 자신이 마주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물론 모두가 진실을 밝혀지기를 원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어떠한 계기로 쫓기는 신세가 된 찰리는, 전국을 배회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우연히 엮인 살인 사건들을 해결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런 전국을 누비는 탐정 이야기는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포커 페이스>의 가장 큰 특징은 먼저 사건과 범인을 보여주고, 이후 찰리가 등장하여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리하며 범인을 밝혀내는 형식을 매 화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 입장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고민하며 스포일러에 대한 피로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범인이 어떻게든 혐의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주인공의 번뜩이는 재치를 확인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해결되는 스릴도 있지만,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유머 역시 이 작품에도 곳곳에 배어있습니다. 게다가 만약 할리우드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분들이라면, 매 화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카메오 배우들을 알아보는 즐거움도 있을 겁니다. 필자 역시 1화를 시작하자마자 <피아니스트>와 <브루탈리스트>로 유명한 에이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가 등장해서 깜짝 놀랐으니까요. 오직 이 시리즈를 보기 위해 왓챠를 구독하는 것을 추천할 정도로, 그만큼 재밌는 작품입니다.
시청 가능한 페이지 - 왓챠 (시즌 1 한정)

시청 가능한 페이지 - 쿠팡 플레이 파라마운트+(시즌 1, 2)

풀어나가는 과정을 짐작할 수 없는, <머더빌>

최근 추리 예능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꾸준히 방영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크라임씬>, <여고추리반>, 최근 시즌 2가 공개된 <미스터리 수사단>까지 다양한 상황 설정을 통해 출연진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머더빌> 역시 목표는 동일하지만,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상황 설명이나 대본 없이, 경찰의 조수 역할이 된 게스트 연예인이 즉흥 연기를 펼치고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입니다.

즉 이 시리즈는 작중 벌어진 사건을 밝혀내는 것보다, 사건 해결에 필요하다고 요청받는 콩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수사를 위해 필요하다며 난데없이 주어지는 상황극에 게스트는 어떻게든 대처를 해야만 하지요. 죽음이 뭔지 모르는 어린이에게, 왜 마술 공연이 중단되었고 조수가 움직이지 않는지 설명하는 조수 코난 오브라이언(Conan O'Brien)의 모습을 보면 너털웃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샤론 스톤(Sharon Stone), 켄 정(Ken Jeong) 등 익숙한 연예인을 보는 것도 이 시리즈의 쏠쏠한 재미입니다.
에피소드가 끝날 때에 게스트는 각자의 근거로 범인을 지목합니다. 과연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여러 임무를 수행한 경찰의 조수답게, 그들이 내린 판단은 옳을까요? 놀랍게도 이 시리즈는 해결하는 과정이 얼렁뚱땅이었을지 몰라도, 시청자라면 충분히 추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역시 즐겁기 그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스페셜 에피소드 <머더빌: 누가 산타를 죽였나?>까지 놓치지 마세요.
시청 가능한 페이지 - 넷플릭스


추리 없는 성장물, <루드비히: 퍼즐로 푸는 진실>

소셜 미디어에서 '2025년의 미스터리 시리즈'로 많이 거론된 작품이라, 필자 역시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볼 수록 '이게 과연 추리 시리즈인가?'라는 의문이 점차 커졌습니다. 왜냐하면 사건을 해결할 때에 범인이 사용한 트릭을 보는 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 시리즈는 그 어떤 사건도 명확한 설명을 제시해주지 않습니다. 즉 추리물이라는 형식을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 '존'은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한 '루드비히'라는 필명으로 퍼즐 제작을 직업으로 삼은 채 은둔하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오랜 친구이자 자신의 쌍둥이 형의 형수인 '루시'가 그를 찾아옵니다. 그의 형이 갑작스레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 그의 도움이 누구보다 절실했던 것이었습니다.

남들 앞에 절대 나서지 않는 소심한 성격의 존은 결국 루시의 반 협박으로, 형의 진상을 밝히고자 형사였던 형의 흉내를 내며 경찰서로 출근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말인 즉슨, 형이 담당하는 형사 사건 역시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존은 사건 현장에 출동해 상황을 확인해야하는 점에 당황스러워 하지만, 동시에 퍼즐 제작자만의 비상함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해결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존은 소심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점차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쩌면 필자처럼 범인이 어떻게 완전 범죄를 저질렀는지 해설을 기대하고 시청한다면, 실망할 수 밖에 없을 드라마입니다. 시청하는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는 존과 루시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따뜻한 관계, 잔잔한 영국식 유머까지 함께하며 왜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게다가 추리물에서 강조하는 치밀한 논리에 집중하느라 오히려 흘러가는 이야기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시청자였다면, 이 작품은 분명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시청 가능한 페이지 - 왓챠

시청 가능한 페이지 - 티빙
추리물의 본질은 흔히 ‘범인을 밝혀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한 작품들은 그 공식에서 벗어나, 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범인을 먼저 드러내거나, 즉흥성과 유머로 흐름을 바꾸고, 때로는 추리 자체를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까지, 전부 진부한 형식에서 새롭게 도전해 시청자에게 기존과는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장르의 ‘본질’이란 과연 고정된 규칙일까요, 아니면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는 걸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르의 형식 내에서 과연 어떻게 새롭게 풀어내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작품을 시청하는 태도 역시, 더 폭넓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요? 스포일러를 걱정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이 작품들이, 스포일러를 두려워하지 않는 데에 좋은 출발점이자 도전이 되어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