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느를 나와, 오프화이트를 넘어 자기만의 언어를 만든 디자이너들
디자이너는 어떻게 자기만의 브랜드 언어를 만들까?
패션에서 독립은 흔히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시작하는 순간으로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주목받는 디자이너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진짜 자립은 브랜드를 만드는 행위 자체보다 자신만의 시선과 언어를 구축하는 과정에 가까워 보입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기존 패션 하우스와 브랜드 안에서 경험을 쌓은 뒤, 그 위에 자신만의 감각을 덧입혀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피터 도(Peter Do), 사무엘 로스(Samuel Ross), 록 황(Rok Hwang) 역시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디자이너들입니다. 누군가는 럭셔리 하우스에서 익힌 문법을 새롭게 해석했고, 누군가는 스트리트웨어의 영향력을 사회적 메시지로 확장했으며, 또 누군가는 클래식한 의복의 구조를 다시 바라봤습니다. 이들이 기존 시스템 안에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자신만의 브랜드 언어로 발전시켰는지 살펴봅니다.
셀린느 이후 — 피터 도가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방법

오늘날 피터 도(Peter Do)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조용한 럭셔리’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단순히 최근의 미니멀리즘 트렌드 안에만 두고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피터 도의 디자인 언어를 이야기할 때 피비 파일로 시대의 셀린느를 빼놓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뉴욕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를 졸업한 그는 피비 파일로가 이끌던 셀린느 팀에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셀린느는 로고와 장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던 럭셔리 시장의 흐름과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과시적인 요소 대신 정교한 실루엣과 소재, 그리고 실제 여성들이 입는 방식과 생활에 가까운 옷을 제안하며 새로운 럭셔리의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회자하는 ‘올드 셀린느(Old Céline)’ 역시 이 시기를 가리킵니다.

피터 도 역시 이곳에서 패턴과 구조, 테일러링에 대한 높은 기준을 익혔습니다. 다만 그의 브랜드가 셀린느의 연장선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같은 문법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셀린느가 정제된 실루엣과 균형에 집중했다면, 피터 도는 그 안에 숨겨진 구조를 드러내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재킷의 안감을 노출하거나 셔츠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는 방식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디자인 언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스타일의 차이라기보다 미니멀리즘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가깝습니다. 피비 파일로의 셀린느가 완결된 형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면, 피터 도는 그 질서를 살짝 비틀어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익숙한 옷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예상과 다른 구조가 드러나는 이유입니다.
패션 산업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지금도 피터 도는 브랜드 규모를 무리하게 확장하기보다 테일러링과 구조적 디자인을 중심으로 컬렉션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방향성을 유지해왔습니다. 어쩌면 피터 도의 자립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기준을 꾸준히 밀고 나가는 태도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프화이트 이후 — 사무엘 로스가 패션으로 사회를 이야기하는 방법

2010년대 중반 패션계를 이야기할 때 오프화이트를 빼놓기는 어렵습니다. 버질 아블로가 이끈 오프화이트(Off-White)는 스트리트웨어를 럭셔리 패션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며 새로운 시대의 문법을 만들어냈죠. 그리고 사무엘 로스는 그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영국 레스터 출신의 사무엘 로스(Samuel Ross)는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한 뒤 버질 아블로의 초기 팀에서 활동하며 오프화이트의 성장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습니다. 당시 오프화이트는 패션과 음악, 예술, 인터넷 문화를 연결하며 기존 럭셔리 브랜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로스 역시 이 과정에서 브랜드가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목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를 시작하며 그가 주목한 것은 스트리트웨어의 인기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2015년 설립한 어 콜드 월(A-COLD-WALL*)은 그가 성장하며 체감했던 영국의 계급 구조와 노동계급 문화, 도시 환경을 디자인 언어로 풀어낸 브랜드였습니다. 브랜드명 역시 노동계급 주거지의 차가운 벽면에서 착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러한 문제의식은 컬렉션 전반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콘크리트와 산업 시설을 연상시키는 색감과 소재, 기능적인 디테일, 실험적인 실루엣은 어 콜드 월을 대표하는 특징이 되었습니다. 오프화이트가 스트리트 문화의 영향력을 럭셔리 시장으로 확장했다면, 어 콜드 월은 패션을 통해 사회 구조와 현실을 이야기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 콜드 월의 컬렉션은 단순히 멋있는 옷이라기보다 하나의 질문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누가 도시를 만들고, 누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가. 그리고 패션은 그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사무엘 로스는 이러한 질문을 옷과 공간, 소재를 통해 꾸준히 탐구해왔습니다.
실제로 그는 패션뿐 아니라 산업 디자인과 가구, 설치 작업, 전시 프로젝트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 영역을 확장해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한 행보라기보다 디자인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에 가깝습니다.
사무엘 로스의 자립은 오프화이트와 결별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오프화이트가 열어놓은 가능성 위에서, 패션이 어디까지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 더 가까웠죠. 그가 만든 것은 또 하나의 스트리트웨어 브랜드가 아니라, 자신만의 시선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새로운 디자인 언어였습니다.
셀린느, 끌로에, 루이 비통 이후 — 록 황이 클래식을 해체하는 방법

오늘날 로크(rokh)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해체된 트렌치코트와 셔츠입니다. 익숙한 클래식 의복을 분해하고 다시 조합하는 그의 디자인은 전통적인 럭셔리와는 다른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디자인 언어가 여러 럭셔리 하우스에서 경험을 쌓은 뒤 탄생했다는 사실이죠.
한국에서 성장한 록 황(Rok Hwang)은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뒤 셀린느(CELINE)와 끌로에(Chloé), 루이 비통(Louis Vuitton) 등 여러 럭셔리 하우스에서 커리어를 이어갔습니다. 서로 다른 브랜드를 거치며 그는 테일러링과 패턴,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물론 럭셔리 하우스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의복 제작의 기준을 가까이에서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이후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됩니다.

2016년 자신의 브랜드 로크를 설립한 이후, 록 황은 완성된 옷 자체보다 그 안에 숨겨진 구조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셔츠는 여러 겹으로 겹쳐지고, 트렌치코트는 분리와 결합을 반복하며 새로운 형태로 변주되죠. 기존 클래식 의복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합하지만, 완전히 낯선 옷을 만들기보다 익숙한 요소들을 유지한 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로크의 대표적인 디자인 언어가 되었습니다. 컬렉션에는 탈부착 가능한 패널과 스트랩, 레이어링 구조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요. 이는 하나의 옷이 다양한 방식으로 착용되고 해석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전통적인 럭셔리 브랜드가 완성된 결과물의 아름다움에 집중했다면, 로크는 옷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과정 자체를 디자인의 일부로 끌어들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실험이 결코 과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록 황은 럭셔리 하우스에서 익힌 테일러링을 기반으로 디자인을 전개하기 때문에, 구조적인 실험이 더해져도 옷은 여전히 현실적인 착용 가능성을 유지합니다. 실제로 그는 2018년 LVMH 프라이즈 특별상을 수상하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동시대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죠.
패션은 종종 완벽하게 완성된 결과물을 보여주는 산업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록 황은 그 완성된 옷을 다시 열어보고, 익숙한 규칙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합니다. 어쩌면 그의 자립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문법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내는 능력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Rokh의 옷은 늘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전통적이면서도 동시대적으로 느껴집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기존 브랜드를 떠나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경험했던 시스템을 어떻게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냈는가에 있죠.
피터 도는 셀린느에서 경험한 테일러링과 구조에 대한 감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사무엘 로스는 오프화이트가 보여준 문화적 영향력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했습니다. 로크 황은 럭셔리 하우스에서 익힌 클래식한 문법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했죠.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모두 이미 성공적인 시스템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안에 머무르기보다 자신만의 질문을 던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누군가는 옷의 구조를 다시 바라봤고, 누군가는 사회를 이야기했으며, 또 누군가는 익숙한 클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결국 패션에서의 자립은 단순히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미 존재하는 문법을 그대로 반복하기보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디자이너들이 보여주는 진짜 독립에 더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