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선택한 여자들을 그린 영화 3편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나로 사는 방법
한 때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을 꿈꿨던 적이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완전히 자립하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취업, 돈 같은 다양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조건을 이루기 위해 달려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나'와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완벽한 조건만이 자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야구소녀>의 수인과 <소공녀>의 미소, <아워바디>의 자영도 그랬습니다. 세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꿈꾸는 완벽한 자립은 아니지만, 싸우고, 버티고,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세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자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끝까지 공을 던지는 이유, <야구소녀>

졸업반이었던 정호가 프로 지명을 받으며 백송고 야구부에 경사가 납니다. 친구인 정호와 삶은 하루만에 바뀝니다. 20년 만에 탄생한 여자 야구 투수인 수인은 줄곧 천재로 불렸지만, 프로 입단도 불분명한 상태. 어차피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수인은 선생님은 물론 부모님과도 삐걱거립니다. 엄마는 수인이 야구를 그만두고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 일하길 바랍니다. 수인을 생각하는 감독님은 야구를 취미로 하거나, 핸드볼 선수로 전향하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수인을 위한 말이지만 수인이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인은 홀로 서기 위해서 프로팀의 오디션에도 지원하지만 여자 선수라는 이유로 실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그런 수인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새로 부임한 최코치 뿐입니다. 프로 입단에 실패했던 최코치는 수인을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며, 네가 프로가 안 된 건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말합니다. 수인을 오롯이 선수로 바라봐주는 말과 함께 수인은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기 위해 너클볼을 연습하기 시작합니다.
영화 <야구소녀>의 수인은 달리고, 끊임없이 공을 던지고 또 던집니다. 어쩌면 끝이 뻔히 보이는 이야기인데도 수인은 깊이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수인의 모습은 불규칙하게 날아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공, 때로는 강속구보다 빠른 너클볼을 닮아있습니다. <야구소녀>는 수인이 프로선수가 되고 성공하는 모습을 그리는데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정해둔 길을 묵묵히 가는, 세상을 향해 너클볼을 끊임없이 던지는 수인의 모습을 비춰줄 뿐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수인이 선택한 자립입니다.
집 대신 나를 선택한 이유, <소공녀>

<소공녀>의 미소는 일단 4만 5천 원을 받으며 3년째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소의 낙은 남자친구 한솔과 보내는 시간,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갑입니다. 그런데 미소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새해와 함께 담뱃값이 오르고, 집값에 담배와 위스키까지 감당하기 어려워진 미소는 집을 포기하고 자신의 일상을 지키고자 합니다. 미소는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의 집을 전전합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집에서 머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잠귀가 예민하다고 거절하고, 결혼한 친구는 남편 때문에 미소의 존재를 불편해합니다. 이런 와중에 남자친구 한솔도 빚을 갚기 위해 사우디행을 택합니다. 모두가 현실과 타협하는데 미소는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입니다.

미소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집도 돈도 없고, 제대로 된 직장도 없는 미소의 불완전한 삶은 이상하게도 부족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립에는 종종 조건이 붙습니다. 안정된 직장, 내 집, 결혼 등 사회가 말하는 '안정적인 삶'의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삶은 자립이 아닌 걸까요. 미소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평생 행복하게 살았을지를 영화는 명확히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미소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자신의 삶을 꾸려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달리기 시작한 이유, <아워바디>
명문대를 졸업한 자영은 8년 동안 준비하던 고시 공부를 포기합니다. 시험도 포기하고, 그대로 시간을 허비하던 자영은 남자친구에게 "공무원은 포기해도 사람답게 살아야지"라는 말을 듣고 이별하게 됩니다. 시험을 포기한 자영은 엄마와도 크게 다투고 삶이 이래저래 휘청입니다. 그러던 중 자영은 우연히 달리기를 하던 현주를 만나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현주의 밝은 에너지에 매료됩니다.

자영의 자립은 불완전합니다. 친구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친구가 보내는 동정 어린 시선, 다른 아르바이트생 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나이와 삶의 어긋남. 모든 것이 자영을 불편하게만 만듭니다. 그런 자영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은 딱 하나, 달리기 뿐입니다. 자신의 욕망도 삶도 미뤄두었던 자영에게 달리기는 단순히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영의 삶은 우리에게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2030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삶의 방황을 자영은 온 몸으로 겪습니다. 현주의 어두움을 목격하고 정부장과 잠자리를 하는 등, 자영의 모든 선택이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달리기를 통해 돌파구를 찾은 것처럼, 자영은 스스로 인턴을 포기합니다. 어떤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내 몸만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스스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아워바디>가 그린 자립입니다.
삶에서 가장 괴로웠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잘못된 선택을 한 순간이 아니라, 원치 않던 선택에 몰두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때로는 부모님 때문에,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서 원치 않던 시간에 매몰된 순간. 우리는 왜 끊임없이 그런 순간에 갇히게 되는 걸까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소공녀>의 미소와 끊임없이 공을 던지는 <야구소녀>의 수인. 헤매면서도 계속 달리는 <아워바디>의 자영. 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엉망진창이어도 괜찮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향해 가고 있다면, 그것이 자립하는 방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