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을 다시 쓰는 이야기
규범의 바깥을 향하는 자립과 연결의 시도
삶은 여러 규범 아래 놓여 있습니다. 나이에 따라 기대되는 역할이 있고,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가족, 친구 관계의 양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규범에 따라야 하는지 계속해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답변에 따라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조정하기도 하죠. 얼마 전 SNS에서 청첩장 모임을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묻고 사람들이 토론하는 것을 보았는데요. 결혼을 하는 이상 청첩장 모임을 가지는 게 도리라는 생각처럼, 규범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규범의 힘에 의해 각자의 삶이 정형화되는 까닭에, 자신의 삶의 양식을 다시 쓰는 작업은 대항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장애를 가지지 않아야 하는, 경제적인 성취를 위해 투신해야 하는, 재생산하고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되기를 경주해야 하는 풍습 속에서, 견고한 질서에 틈을 내는 삶의 실천들은 우리를 억압적인 규범의 바깥으로 이끄는 해방적 가능성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몸과 관계, 거주의 방식을 새로 발명하는 일상적인 양식에서 출발하죠. 어쩌면 일상적인 양식의 변화가 커다란 혁명의 바람을 이루게 될지도 모르고요.
저 작업의 예시가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세 권의 책으로 소개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규범을 교란하고 삶을 재구성하는 힘과, 이상하고 이상한 일들 앞에 무어라고 말하는 끈기가 곳곳에 포진한 책들이에요.
우정을 다시 쓰기
조프루아 드 라갸느리, 『셋. 바깥을 향한 열망』

디디에 에리봉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분들도 있을 거예요. 『랭스로 되돌아가다』와 최근에 출간된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으로 국내에도 많은 독자가 있는 학자이죠. 이 책, 『셋. 바깥을 향한 열망』의 저자인 조프루아 드 라갸느리는 디디에 에리봉의 연인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로, 푸코와 부르디외를 계승하는 사회학자입니다. 라갸느리는 디디에, 그리고 작가인 에두아르 루이와 함께 우정을 삶의 기본적인 역학으로 재정립합니다. 삶의 일부를 이루는 요소로서 중요한 친구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을 ‘감싸안고’, ‘산출하며’, ‘다른 유대를 맺거나 맺지 않을 출발점’으로서 ‘삶 자체’인 양식으로요.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주의 기반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친구란 가족으로부터 도피하는 대안이나 일시적으로, 또는 가족의 다음에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관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규범을 뒤집고 주체적으로 욕망을 정립해가는 세 사람의 실천적인 우정은 제도와 의례, 관습에 의해 고착화된 삶의 형식들로부터 자립하는 방법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여러 집단에서 명시적, 암묵적인 규칙들을 경험합니다. 라갸느리에 따르면 우정은 그런 규칙들에 속박되지 않고 서로 지지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자율성과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삶의 사회적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자 한다면 세 사람의 사례로부터 우정의 한 모양을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연애를 다시 쓰기
하은빈, 『우는 나와 우는 우는』

이 책은 희귀 질환인 진행성 근이영양증을 가진 장애인 애인 우와의 시절을 회고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 문장으로는 이 책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와 함께하는 삶이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며, 그 삶을 회고하는 일은 ‘씻어내고 씻어내도 각질처럼 끝없이 피부 위로 다시 일어서는’ 조각들을 다시 맞추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를 사랑해서 살아갔고, 또 우를 떠나야만 살 수 있었던 수많은 장면과 마음들을 요약하려면 사랑의 기록이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장애에 관한 르포나 과거의 연애담이 아니라 장애의 비당사자이자 연애의 당사자로서 쓸 수 있는 이 사랑의 기록은 그 사랑을 통해 존재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요약할 수 없는 세부로 가득합니다. 하물며 아무도 반대하거나 연민하지 않는 규범적인 연애를 기억하는 일조차도 제대로 추억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하은빈은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장애가 이 책의 표면에 해당하고, 그 표면 아래에서 그가 몰두한 주제는 어떤 잘못이나 실패, 후회에 대해 이야기라고 말합니다.[1] 우와의 연애가 지니는 양식과 그것이 지속되고 끝나는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자 사회적인 것이며, 우리도 그것을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은빈이 욕망했던 것들을 따라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판단할 수도 있지만, 동의하고 설득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한 사랑이 지닌 근본적인 불능에 대해 안다면요.
재활을 다시 쓰기
구마가야 신이치로, 『재활의 밤』

재활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대개는 부상을 당한 운동선수나 사고를 당한 사람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떠올릴 듯합니다. 저자 구마가야 신이치로는 선천적 뇌성마비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뇌성마비를 전문가들이 흔히 ‘뇌의 손상 때문에 의도한 대로 운동을 반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표현하는 탓에, 이들은 근육이나 뼈에는 문제가 없고, 노력에 따라 ‘정상적’인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이에 구마가야 역시 어려서부터 정상적인 모델에 따른 재활 캠프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사나 트레이너가 어떻게 요청하더라도 뇌성마비 장애인이 정상인의 모델처럼 움직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재활은 치료가 아니니까요. 장애 당사자에게 재활과 자립은 비장애인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건과 외부의 조건, 물리적, 감정적 환경과 교섭하고 협응하며 자신의 신체성을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내가 바라보는 나와 외부에서 바라보는 나, 실제의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율의 과정을 거치는데요. 뇌성마비 장애인에게 이 일은 사소한 동작, 쾌락을 느끼는 방식 등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를 주변과 맞춰 나가야 하는 긴 상호 적응을 필요로 합니다.
구마가야는 장애 당사자이지만 의사이자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매개로 세계와 타협해 온 경험을 상세하게 기술하는데요. 유머러스하고 직관적인 삽화들이 수록된 덕분에 이 기록은 장애와 재활의 한 단면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논리적인 보고서처럼 읽힙니다. 정상의 세계에 동화할 것을 요구하는 수많은 규범 앞에서, 이 보고서는 뇌성마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계 맺기와 자립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많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동지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마라.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굳게 믿어라.” 물론 저 제목에서 nourri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양식’은 먹을거리나 지식, 사상의 원천을 뜻하는 양식(糧食)이지만, 지드의 문장을 유미적인 감상에 가두지 않고 대항적인 삶의 기획으로 연결해 보면 지상의 양식(糧食)을 새로운 양식(樣式)으로 전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자립에 관한 규범적인 가치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가족을 떠나 가정을 꾸리는 등이 대표적일 텐데요. 자립 또한 우리가 삶의 양식을 다시 쓰며 재정의할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의에는 연결과 사랑, 투쟁과 고통이 모두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무언가를 극복하기보다 새로운 가능성의 틈을 열어 보이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희망하고 서로에게 더 잘 받아들여지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가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의 양식을 창조하기를 기대하며, 이 이야기들이 다른 삶의 양식이 되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