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연인의 초상
본질이 아닌 것들로 사랑을 남기는 방식
어렸을 때, 좋아하는 친구의 손바닥을 공책 위에 얹어 그 윤곽을 따라 그려본 적이 있는가? 다른 곳에 전학가는 그 애에게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손을 빌려 와 연필로 손가락 사이사이를 지나갔다. 그 아이의 공책에도 괜히 내 손을 따라 그려 주고, 그 밑에 이름을 썼다. 우리 둘이 함께 찍힌 사진보다 내게 더 선명하게 남은 것은, 손의 테두리를 스쳐 갔던 연필의 간지러운 감촉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대상의 ‘본질’을 알고 싶어 한다. 본질은 “그것이 그것으로 있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어떤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빠짐없이 붙잡아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짝사랑의 증거는 그 아이의 얼굴도 목소리도 아닌, 삐뚤빼뚤한 손바닥의 윤곽선이다.
본질을 찾으려는 인간의 시도는 고대에서부터 시작한다. 플라톤은 ‘동굴의 우화’를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를 그림자에 비유하며, 감각적 세계는 진정한 실재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그림이란 본질에서 한 단계 더 멀어진 복제의 복제품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를 붙잡기 위해 남겨진 흔적은 정말로 진실에서 멀어진 것일까. 우리는 왜, 가장 본질에서 멀어진 것에서 더 살아 숨쉬는 감각과 감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인가.
사랑과 상실, 그림의 발명가
고대 로마의 학자 대(大)플리니우스는 그의 저서 『박물지』에서 ‘그림의 기원’에 관한 전설을 전한다. 기원전 6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코린트 섬의 도공 부타데스의 딸 코라는 먼 나라로 떠날 연인과 마지막 밤을 보낸다. 언제 돌아올지,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이별의 순간, 그녀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전등불을 들고 숯을 집어 벽면에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린다. 곧 사라질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가장 덧없는 형태를 택한 것이다.
그림은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대상의 사라짐을 견디기 위한 시도였다. 상실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 이미 떠나기 시작한 존재를 어떻게든 남기려는 간절한 마음이 인류 최초 회화의 시작이었다.
이 전설은 18세기 신고전주의 화가들에 의해 반복해서 재해석된다. 그림의 기원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은 1770년대부터 1840년대 사이에 유독 번성하다가 사라졌는데, 마리나 워너는 빛을 포착해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고정시키는 신물물인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이 전통이 사라졌을 거라고 추측한다. 사랑하는 상대의 그림자를 따라 그렸던 인류 최초의 초상화를 시작으로, 인간의 본질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던 화가들의 노력 이후에, 찰나의 순간에 인간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인해 그림의 기원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것이다.



루이 뒤시 (Louis Ducis), 「회화의 발명」(The Invention of Painting), 1808년경, 유화, 소장처 미상 조제프 브누아 쉬베 (Joseph Benoît Suvée), 「드로잉의 발명」(The Invention of the Art of Drawing), 1791년경, 유화, 더비 미술관 및 아트 갤러리 조지프 라이트 (Joseph Wright of Derby), 「코린토스의 처녀」(The Corinthian Maid), 1782–1784년경, 유화, 소장처 미상
코라의 전설을 재해석하는 화가들의 시선은 각기 조금씩 다르다. 원래 이야기에 충실하게, 깜깜한 밤에 등불을 하나 밝혀 두고 연인의 실루엣을 벽에 따라 그리는 코라와 가만히 앉아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는 남자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루이 뒤시와 조제프 브누아 쉬베의 작품은 벽에 드리운 그림자가 도드라지는 반면, 조지프 라이트는 그림자보다 인물의 색채와 생기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 다양한 해석들 사이에서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코라와 연인이 서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라의 시선은 언제나 눈앞의 인물이 아니라, 벽에 드리운 연인의 그림자에 머문다.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보다, 곧 사라질 흔적이 더 중요한 것이 된다. 현재의 존재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부재의 형상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알렉산더 런시먼의 <회화의 기원>(1773)에서는 이 긴장이 더욱 또렷해진다. 잠든 연인의 실루엣을 따라 그리는 코라의 팔을 큐피드가 붙잡고 있다. 사랑의 신은 그녀의 손을 인도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 장면 전체를 조용히 지켜보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서 가장 오묘한 것은 시선의 방향이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는 ‘향수’의 대상이 되어 이미 멀어진 존재처럼 보이고, 코라는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림자에 몰두한다. 오히려 그를 가장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큐피드이다. 화살을 날려 곧 이별할 두 연인을 사랑에 빠지게 만든 것이 미안하다는 듯이.

반면, 잔느 엘리자베스 쇼데의 <연인의 초상을 찾아온 디부타데>는 위의 다른 남성작가 들과는 다른 상상력을 보여준다. 쇼데는 코라가 연인의 그림자를 그리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떠난 이후를 상상한다. 코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여성 화가로 여겨진다. 그리고 수세기가 지난 뒤, 이 오래된 전설을 다시 그린 수많은 화가들 가운데, 여성 화가 쇼데가 코라의 마음을 읽어낸다.
쇼데의 작품에서 코라는 자신이 남긴 그림을 바라본다. 이미 연인은 떠나갔고,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자리에 앉아 코라는 벽에 남겨진 연인의 얼굴을, 그 희미한 윤곽선을 바라본다. 만족감에 젖어 있는 코라를, 이미 그림자가 된 그가 은은한 미소를 띄고 애틋하게 바라본다. 얼굴의 형상이 없음에도 두 연인이 시차를 뛰어넘어 서로를 응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코라가 벽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린 순간부터 그녀는 향수에 젖은 사랑을 하고 있었고, 끝내 윤곽선으로 남을 운명을 아는 연인 역시 자신이 남길 부재를 알고 있었다. 쇼데는 코라의 사랑과 예술을 적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복제는 어떻게 사랑이 되는가

다시 플라톤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를 설명한다. 인간은 지하 동굴에 살며 꽁꽁 묶인 채로 동굴 안 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보며 그것이 ‘실체’라고 믿는다. 동굴 밖의 세상, 진짜 실체, 즉 본질이 존재하는지 꿈에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는 단지 바깥 세계의 사물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본질은 동굴 밖에 있으며, 인간은 그 이데아를 직시해야만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그림은 이데아에서 이중으로 멀어진 것이다. 실재를 모방한 사물을 다시 모방한 것, 즉 ‘복제의 복제’이기 때문이다. 빅터 I. 스토이치타가 말하듯, 코라의 작품은 “표현의 표현”, 그림자의 이미지를 옮긴 최초의 그림이었다. 본질에서 가장 멀어진 자리에서 회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플라톤이 비천하게 보았던 모방의 행위이지만, 동시에 가장 절실한 사랑의 형태이다.
그러나 코라는 이데아를 탐구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 아니다. 가장 덧없고, 가장 쉽게 사라지는 형상인 그림자를 선택한 것은 그 순간 그것만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크 데리다는 이 장면에서 그림자가 이미 시간적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림자는 “지각의 현재로부터 분리된 것”이며 동시에 기억이다. 이미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흔적이다. 코라는 아직 떠나지 않은 연인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떠난 이후의 그를 (혹은 그마저)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림은 현재의 재현이 아니라 부재를 다루는 방식이 된다. 사랑과 예술의 세계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림은 본질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인 상실 이후의 시간을 꿈꾸는 형식이 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은 코린트의 전설을 이어받아, 초상화를 그리는 행위에 깃들어있는 사랑의 역학을 포착한다. 이 영화는 실제로 그림의 기원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을 시기인, 17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작업 의뢰를 받은 화가 마리안느는 브루타뉴 섬에 사는 ‘아가씨’ 엘로이즈를 위해 초상화 작업을 시작하며 엘로이즈의 본질을 그림에 담기 위해 애를 쓴다. 초상화를 완성하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엘로이즈는 귀족 남성과 결혼을 해야 한다—을 시작한 이들은 코라의 이야기와 같은 결을 띈다. 그러나 코라가 상대의 부재를 예감하며 그림자를 따라 그렸다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초상화 작업이 서로를 응시하며 함께 그려나가는 것임을 상기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초상화는 일방적인 복제가 아니다. 엘로이즈 몰래 작업을 시작한 마리안느는 그녀의 얼굴을 끊임없이 눈에 담아 기억을 되짚어가며 붓을 움직인다. 그렇게 완성한 첫 작품에는 엘로이즈의 얼굴이 있지만, 그녀의 영혼은 없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될 때 작업이 다시 시작된다. 화가 마리안느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를 바라볼 때, 엘로이즈 역시 자신을 그리는 마리안느를 응시한다. 그들의 시선은 코라의 전설을 그린 대다수의 작품들과 달리, 더이상 엇갈리지 않는다. 화가와 뮤즈의 시선, 사랑하는 두 연인의 시선은 끊임없이 부메랑처럼 오고가며 서로를 수정하고 다시 창조해낸다.
코라의 그림이 사라질 것을 붙잡기 위한 단 한 번의 선이었다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그림은 반복되는 응시 속에서 계속해서 갱신되는 이미지다. 영화는 그림이 본질을 그대로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사랑의 행위임을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윤곽을 어설프게 따라 그리는지 모른다. 완전한 본질은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불완전한 그림자들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감정이 지속되고 예술이 탄생한다.
“따라서 연인은 예술가이며, [그녀의] 세계는 사실 뒤집힌 세계이다. 그 안에서 각 이미지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 롤랑 바르트, 『연인의 담론』
바르트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 숨쉬는 감각적 세계 안에서 우리는 각자 화가가 되어 대상을 해석하고, 덧붙이고, 변형한다. 본질이 먼저 있고 그것의 복제품이 있다고 본 플라톤과 달리, 연인의 세계에서는 본질보다 우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이미지가 선행한다. 뒤집힌 연인의 세계에서 사랑은 본질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방식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니 코라의 그림자, 마리안느의 그림이 알 수 없는 사랑의 본질보다 진실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참고문헌
Hunter Dukes, The Public Domain Review, The Shadow of Desire: Painting the Origins of Art (ca. 1625–1850), https://publicdomainreview.org/collection/origins-of-painting/
Marina Warner, Cabinet Magazine, Darkness Visible: The view from the shadows, https://www.cabinetmagazine.org/issues/24/warner.php
조선일보,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2] 코린트의 아가씨, 2012.02.21,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21/2012022102993.html
중부일보, 그림의 기원과 '부타데스', 2016.05.19, https://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3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