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립의 관계를 고찰하는 로맨스 영화
사랑은 자립을 무너뜨리는가
자립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기대지 않는 상태’를 떠올립니다. 타인의 부재가 자신의 하루를 침식하지 않고, 외부의 충격에 감정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 현대 사회는 자립한 인간을 성숙한 개인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립은 건강한 관계의 전제 조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랑을 주제로 다루는 로맨스 영화의 연애 서사는 언뜻 사랑과 자립을 대립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인물은 어김없이 이전보다 취약한 심리 상태에 놓입니다. 타인의 부재에 영향을 받고, 지나치게 이해받고 싶어 하며, 때로는 상대가 원하기도 전에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고 보답받지 못함에 상처받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자립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립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랑 앞에서 허구였음이 드러나는 것일까요? 사랑 속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사랑과 자립의 관계를 고찰해 봅니다.
욕망은 결핍을 채우지 못한다

<클로저>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댄과 앨리스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영화는 이 만남이 낭만적인 설렘이 아닌, 복잡한 욕망을 동력으로 파국을 향해 굴러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댄은 앨리스를 사랑하면서도 사진작가 안나에게 끌리고, 안나는 래리와 결혼하지만 댄을 원합니다. 네 사람은 결핍을 욕망 뒤에 숨기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다치게 합니다.

<클로저>의 인물들이 욕망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상대에 대해 자신이 투사할 수 있는 여백입니다. 낯선 사람이 매력적인 이유는 내가 아직 그를 모르기 때문이며, 그 무지의 공간에서 욕망은 상대를 원하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형상화합니다. 그리고 그 여백에 투사되는 것은 주로 자신의 결핍입니다. 하지만 서로가 가까워질수록 그 여백은 줄어들고 상대는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닌 실제 인간으로 변모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공허를 마주하기보다 욕망으로 덮으려 하고 영화는 그 전략이 끝내 실패한다는 것을 예외 없이 보여줍니다.
사랑이 결핍을 발명한다

이탈리아 북부의 여름, 열일곱 살 엘리오는 아버지의 조수로 온 올리버와 함께 휴가를 보내게 됩니다. 엘리오는 아직 결핍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정확히는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아직 의식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올리버가 그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 엘리오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그 무지를 끝냅니다. 올리버를 향한 감정이 커질수록 엘리오는 이전에 몰랐던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랑하므로 인해 자기 자신이 낯설어지는 감각, 그것은 자립이 이전의 방식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합니다.

여름이 끝나고 올리버가 떠난 후 엘리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지금 느끼는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고, 이런 감정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단순 위로를 넘어 결핍을 직면한 인간만이 더 깊은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전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홀로 모닥불 앞에 앉아 울음을 삼키는 엘리오의 얼굴에서 우리는 슬픔과 성장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랑은 엘리오의 결핍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한 일은 결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자신을 알게 한다

미아는 배우를 꿈꾸며 오디션을 전전하고, 세바스찬은 자신만의 재즈클럽을 열기를 꿈꿉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꿈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 앎 속에서 사랑에 빠집니다. <라라랜드>는 함께 있는 것과 꿈이 다른 방향을 향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묻습니다. 함께하는 삶과 각자의 삶의 간극이 커지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두 사람은 꿈을 선택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미아는 유명한 배우가 되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재즈바를 갖게 됩니다. 우연히 세바스찬의 바에 들어선 미아는 피아노 앞의 그를 봅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가 함께였다면 어땠을지를 상상하지만, 짧은 눈빛을 나눈 채 작별합니다. 그 눈빛에는 후회도 원망도 없습니다. 함께 하는 삶을 잃은 슬픔이면서, 각자가 자신이 되는 일을 선택했다는 것에 대한 조용한 긍정입니다. 그 앎 속에서 그들은 더욱 정확한 사랑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클로저>의 인물들은 결핍을 욕망 뒤에 숨기다가 서로를 망가뜨립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는 사랑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결핍을 대면하고 자신을 이해합니다. <라라랜드>의 미아와 세바스찬은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립합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이 자립이라면 그것은 자립이 아니라 결핍의 억압일지도 모릅니다. 로맨스 영화는 결핍을 눈 가리듯 덮어두는 전략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자립이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다. 사랑은 자립에 대한 그 환상을 무너뜨리는 경험이며 자신의 결핍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사람만이 그 붕괴를 통과합니다. 사랑은 결핍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하는 일은 자신의 결핍은 무엇인지를 나 혼자서는 알 수 없었던 방식으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립은 결핍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은 결핍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