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공예다운 자립

로에베 공예상 수상자, 박종진

가장 공예다운 자립
@loewefoundation

지난 5월 12일, 2026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 최종 수상자가 발표되었습니다. 가죽 공방에서 시작된 로에베의 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상은 동시대 공예의 새로운 흐름과 가능성을 조명하는 세계적인 공예상인데요.

올해의 수상자는 바로 한국 작가 박종진입니다.

최근 SNS에서 폭발적으로 수상 소식이 업로드 된 만큼 한 번쯤은 작품 이미지를 보신 적이 있을겁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구조와 거친 표면은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던 도예 이미지와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이죠.
실제로 심사위원들 역시 박종진 작가의 작품을 보고 도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첫 비밀 투표에서 심사위원 14명 중 무려 12명의 지지를 얻어내기까지 했습니다.

독자적인 본인만의 조형언어를 구축하고 있는 박종진 도예가의 작업을 통해,
저번 아티클과 더불어 현대공예가 어떻게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립해나가고 분야를 넓혀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박종진: 재료의 마법사

박종진 작가의 작업에는 꽤 의외의 재료가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키친타올인데요.
그 위에 슬립(흙물)을 바르고 젖은 종이를 한 장씩 겹쳐 형태를 만듭니다. 가마 속에서 키친타올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층층이 적층된 흙물의 형태만 남아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한번 더 되돌아볼 지점은 작가가 흙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말랑말랑한 고체의 흙이 아닌 흙을 물에 풀어 액체처럼 변형하고 다시 종이에 결합해 새로운 질감과 구조를 표현하는데요. 말 그대로 흙의 성질 자체를 탈바꿈해야만 볼 수 있는 박종진 작가만의 작업입니다.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Artistic Stratum: 예술적 지층> 또한 같은 방법을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흙물을 칠하며 남는 붓질의 흔적은 그대로 작품의 두께이자 구조가 되는데요. 쌓여진 종이에 흙물이 불명확한 경계선을 만들어내며 번져간 모습이 회화 같기도, 건축 구조 같기도 한 독특한 물성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작가의 작업 표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마치 오래된 암석의 단면이나 지층을 연상하게 됩니다. 실제로 작가가 Stratum(지층)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작업 제목에 사용한 이유에는 얇은 층들이 반복적으로 쌓이며 만들어내는 구조 자체를 작업의 중요한 언어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온 번조 이후 그라인더로 표면을 다시 깎아내는 후가공 과정 역시 박종진 작업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작가는 표면을 정리함으로써 작업 공정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흐름을 층위로 나타내 내부 구조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합니다 . 덕분에 그의 작품은 외형과 내부 구조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건축적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평가되고 있죠.


우연으로 가득했던 <Strata of Illusion>

LOEWE FOUNDATION (홈페이지 링크 첨부)

이번 로에베 공예상 수상작인 <Strata of Illusion(착각의 층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은 얼핏 의자의 형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작가는 처음부터 이를 의도하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SNS에 올라온 비하인드 인터뷰에 따르면, 원래 박종진 작가는 직사각의 대형 기물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약 한 달 반 동안 거의 매일 슬립을 바르며 보다 더 거대한 작품을 만들고자 실험한 결과, 소성 과정 중 작품은 예상보다도 훨씬 크게 무너져내립니다. 작가는 당시 작업을 중단해야 할지 끝까지 가마를 밀어붙여야 할지 밤 늦게까지 고민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음 날 일찍부터 가마에서 꺼내 직접 작품을 마주하며 박종진 작가는 다시금 기쁨을 되찾게 되었는데요. 무너지고 뒤틀린 구조 속에서 오히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표면과 형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조혜영의 조잘조잘

이로써 작가는 열과 중력 작용에 따른 예측 불가능한 변화 모두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작품의 제목까지 기존의 <Artistic Stratum>에서 <Strata of Illusion>으로 변경해 작품을 출품하게 됩니다.

작업의 특징이 되는 얇은 층들이 만들어내는 불안정한 구조와 흘러내리고 뒤틀린 형태는 로에베 재단 심사위원에게도 현대적인 감각과 공예적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요. 수백 번의 적층을 통해 완성된 정교한 공정은 공예의 본질을 보여주고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형태와 독특한 색감은 동시대 조형 언어로 읽히기 때문이라 해석됩니다.

도자기는 단단하고 균일해야 한다는 익숙한 통념을 깨부수며 물질의 변형과 우연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박종진. 결국 연약함과 강인함이 공존하는 지점- 그 긴장감이 작업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확장되는 공예의 물성

(1)박종진, <예술적 지층Artistic Stratum_B4_1reR4>, 2024. (2)박종진, <예술적 지층_패치 Artistic Stratum_Patch>, 2024. (3)박종진, <붕괴된 형태 Collapsed Form_WGBRBY>, 2024. (4) 박종진, <예술적 지층_ 항아리 Artistic Stratum_Jar>, 2024. (왼쪽부터 순서대로 )


작가는 영국 유학 시절, 교수님으로부터 익숙한 작업 방식에서 잠시 벗어나라나는 조언을 들은 후 가장 값싸고 흔한 재료인 종이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반복적으로 사용한 종이를 쌓아두던 어느 날, 그 간의 고민과 작업의 시간이 이에 모두 축적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작업은 수백 번의 반복적인 붓질과 적층 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예술적 지층 시리즈 <Artistic Stratum>로 시작해서 지층(stratum), 예술적 항아리(Artistic Jar), 붕괴된 형태(Collapsed Form), 패치(Patch) 총 4개의 시리즈를 연달아 작업하고 있는데요. 완벽하게 통제된 형태보다는 균열과 붕괴, 덧댐과 연결 같은 과정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며 공예의 물성을 확장해 나가죠.

또, 작가는 오래전부터 세라믹이라는 재료가 가진 구조적 한계에 대해 질문해왔는데요. 그래서인지 가마를 거친 도자는 더 이상 변형될 수 없고 작은 균열이나 깨짐은 실패작으로 간주된다는 인식을 전면으로 반박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듯 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번 로에베 공예상 수상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인터뷰를 통해 이번 수상이 단순한 성과를 넘어 공예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고 공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를 남겼는데요. 그만큼 작가의 관심은 특정 장르 안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미술 안에서도 공예가 하나의 독립적인 언어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계속해서 질문하고 실험하는 데에 있어 보입니다.

@loewefoundation

공예는 결국 재료를 오래 바라보는 일

박종진 인스타그램

사실 공예를 한다는 건 결국 재료와 오래 함께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박종진 작가는 흙의 물성을 새롭게 하기 위해 도자와 종이를 결합하며 예상치 못한 우연도 작품의 과정임을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실험을 반복해왔죠.

공예는 기능, 재료, 장인정신이라는 고유한 특성으로 구분되는 예술 장르입니다.
그러나 공예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러한 요소들은 동시에 공예의 영역을 쉽게 넓히지 못하게 만드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생활공예에서의 쓰임과 목적을 중심으로 해석된 공예는 오랫동안 기능 안에서 설명되어 왔습니다.

반면 박종진과 같은 현대의 공예가들은 재료의 변화와 비기능적 조형성을 적극 수용하며 독립적인 언어를 만들어냅니다. 이번 박종진 작가의 수상은 현대 한국 공예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는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료에게 부여된 익숙하고도 당연한 통념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동시대 공예의 중요한 흐름이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지금의 공예는 재료가 가진 익숙한 통념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가장 공예다운 방식으로 스스로의 영역을 넓혀가는 중
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