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왜 책가도에 집착했을까?

살아남은 자의 정치전략

정조는 왜 책가도에 집착했을까?

‘옷소매 붉은 끝동’이 정조를 상징한 방법

종영 후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헤어 나오지 못한 사극이 있다. 2021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다.

작품은 실존했던 두 인물 정조 이산과 궁녀 성덕임의 이야기를 궁녀의 입장에서 그려내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드라마 전반에 걸쳐 정조는 덕임을 사랑하는 남자로서의 마음과 백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임금으로서의 천명 앞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사랑을 중점으로 다루었으나, 정조의 정치적 사명과 소신 또한 가벼이 다루지 않았다. 그러한 임금 정조의 정치적 여정은 스토리뿐 아니라 화면 속 공간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그려졌다. 특히 세자 시절의 장면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한 '책가도(冊架圖)' 콘셉트의 세트는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실제 정조의 책가도에 대한 유별난 애정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한 이유로 제작진은 책가도의 그림 속 책가를 실제 세트로 구현했다. 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수단 중 하나로 해석하여 공간에 이입시킨 것이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MBC
책가도(=책거리) : 책을 비롯한 도자기·문방구·향로·청동기 등이 책가 안에 놓인 모습을 그린 그림. 18세기 책을 통해 문치를 하려는 정조의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에 처음 그려지기 시작해 양반층에게 인기를 얻었으며 19세기 이후로는 서민층까지 크게 유행했다. 책거리 그림이 유행하게 된 데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영향이 컸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책가도를 향한 집착과 애정 사이

정조는 어좌(御座) 뒤에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대신 책가도 병풍을 설치할 정도였다. 일월오봉도는 대대로 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어좌 뒤를 지켜왔지만, 그에겐 다른 뜻이 있었다. 책가도에 대해 신하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일화는 이뿐이 아니다. 1783년, 정조는 도화서(圖畵署)의 화원 중에서도 그림 실력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하여 규장각 소속으로 정식 지정한 후 ‘자비대령화원(溠備待令畵員)’이라는 이름 하에 직접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녹취재(祿取才)’라는 일종의 시험을 치르게도 했다. 시험을 통해 실력을 검증한 후 전보다 향상되었다면 승진을 시키거나 포상을 내렸고, 그렇지 못하다면 심한 벌에 처하기도 했다.

당시 녹취재의 주제는 자유화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던 사건이 있다. 신윤복의 아버지이자 김홍도와 함께 정조의 어진까지 그린 신한평과 아들 이윤만, 손자 이형록까지 3대에 걸쳐 책가도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이종현 두 사람이 눈치 없이(?) 진짜 자유화를 그린 것이다. 그렇게 두 화원은 책가도를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조에게 크게 꾸짖음을 받았고 급기야 귀양까지 보내졌다. 이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지 당황스러울 정도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정조는 그런 임금이 아니었으니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일월오봉도 : 한자어 그대로 달과 해 앞의 다섯 산을 그린 그림. 주로 병풍으로 그려져 조선 시대 어좌의 뒷편에 놓였다.
도화서 : 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던 관청

애서가(愛書家)가 문치를 한 이유

그런데 정조는 왜 이토록 책가도에 애정을 쏟았을까? 우선 서책을 향한 지대한 관심과 취향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또 다른 목적이 존재했다 평가된다.

하나는 신하들에게 학문과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 사상을 강조하고자 책가도를 정치적 메시지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궁궐 밖 백성들까지 학문을 가까이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청나라에서 유입된 패관소설 문화가 유행이었다. 정조는 이러한 세속적 문화들이 조선의 전통과 풍속을 해친다고 생각했다. 즉 조선 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지키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탄탄히 하기 위해 책가도를 활용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역사적 근거는 확실치 않지만 정조의 출생과 관련된 의도적 목적 또한 존재한다고 짐작 가능하다. 정조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다. 즉, 그는 죄인의 아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살아가는 내내 반대 세력의 수많은 위협에 시달렸고, 왕권의 위협과 싸워야 했다. 이러한 정조에게 자신만의 강력한 정치적 권위와 존재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에게 책가도는 일월오봉도를 대신할 최적의 왕권 상징이었다.

문치 : 학문과 법령으로 세상을 다스림. 또는 그런 정치.
패관소설 :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

책가도가 각자의 바람을 담는 방법

책가도 병풍에는 서책 외에도 벼루와 붓 같은 문방구, 청동기, 화병, 차 도구, 향 도구 등 다채로운 귀중품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 용과 기린, 꽃과 과일, 물고기처럼 예부터 상서롭게 여겨진 생물들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그림 속 요소들에는 각각의 의미가 담겨있어 장식적인 가구 이상의 상징성을 지녔다. 그러니 주인의 취향과 바람이 잘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다. 정조가 책가도를 통해 임금으로서의 정치적 메시지를 표현한 것도 일맥상통한다.

화원 신한평과 이종현이 비운 자리를 대신한 화원들 중 한 명인 장한종의 책가도는 8폭의 병풍으로, 현존하는 최고의 책가도로 꼽힌다.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점은 단연 휘장을 걷어내자 나타난 책가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설정이다. 마치 누군가의 인생을 한눈에 펼쳐 바라보는 듯하다. 아래 그림의 왼편 하단에 보면 도장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 개의 도장 인면에 장한종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재치도 발휘했다. 그림을 그린 자신의 바람도 함께 넣은 것이다. 한편 그의 책가도는 서양의 원근법(선투시 도법)과 음영법을 도입하고, 그로서 평면적인 그림에 입체감을 더한 점 또한 미술사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생긴다. 18세기, 서양의 화법은 과연 어떠한 연유로 장한종의 책가도에 적용된 것일까?

책거리 병풍 冊架圖 屛風, 장한종, 조선18세기말~19세기초, 회화 <출처: 경기도박물관>
책가도 6폭 병풍(冊架圖六幅屛風), 작자미상, 사직/견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책가도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회화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책거리8폭병풍, 작자미상, 19세기 후반, 회화 <출처 : Horim Museum>

시공간을 잇는 그림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진귀한 예술품 수집이 유행했던 14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귀족의 작은 서재였던 ‘스튜디올로(Studiolo)’로 시공간 여행을 해보자. 18세기 조선과 14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이 그림으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당시 '스튜디올로'는 독일, 영국, 프랑스 등으로 전파돼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sities)'으로 불리며 수집 공간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수백 년 후인 17세기에는 서방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해져 ‘다보각경(多寶各景)*’이라는 그림으로 장식장 문화를 형성했다. 바로 그 문화가 조선으로 전파되어 왕실은 물론 양반가, 중인 계급 등 민가에까지 퍼졌고 사람들이 풍요와 무병장수의 바람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출세욕과 지적허세의 본능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요즘의 소셜 네트워크처럼 자기 과시의 심리를 그림에 담은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메디치가의 프란체스코 1세 개인 서재 '스튜디올로' <출처 : Wikimedia Commons>

그런데 그 수세기에 걸친 문화의 확장이 지금도 지속되는 듯하다. 드라마 같은 콘텐츠를 통해 간접적으로 상징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책가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유명한 명화들에 비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조선 민화가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 관련된 전시나 교육 프로그램 등도 인기다. 사람 사는 이야기와 지금도 공감 가능한 의미가 담긴 그림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현재 미술계에서는 민화에 대한 높아진 관심과 그 중심에 자리한 책가도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활동으로 여겨진다. 정조가 책가도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했듯, 현대를 사는 우리도 각자의 의미를 담아 즐길 수 있는 시공간 불문의 예술이니 말이다.

다보각경 : 서가에 도자기, 골동품 등 수집 품이 진열된 것이 그려진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