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들

박예림, 임재균, 하지민

땅거미들
<땅거미들>, 박예림, 임재균, 하지민, PCO, 2026.04.11 - 05.08 이미지_양승규
박예림, 임재균, 하지민, 이 터널, 2026, mdf, 각목, 페인트, 퍼티, 목공 풀, 타카심, 225 x 172 x 841cm 이미지_양승규

폐허를 등진 채(오직 그럼으로써) 번식하는 생각은 자신 이외의 것들에 여념이 없다. 분주한 생활세계가 어렵사리 숙였던 고개를 쳐들 때 등 떠밀었던 여유는 누군가의 의중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대뜸 입에 올린 최악. 하루 중 천천히 눈 감고 그렇게 뜰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한다면 낮게 깔린 적막도 다소 정직하게 여길 터다. 그것이 우스운 얘기를 해도 이야기에 거짓은 어느 정도 있을 뿐. 일부가 전체로서 기능하는 경우는 결코 없으리라.

부서진 감동과 예전에 이미 동한 처우. 잡동사니에 얽힌 추억 및 본보기의 흉한 추인. 산들바람이 부는 통에 뒤떨어진 녀석에 대한 생각을 일부 접을 수 있었다.
내가 속한 구역의 헛된 인식을 어떻게든 인정으로 받아들이며 다음과 결부된 상징을 일방적으로 거두려 하는데, 이를 기다렸다는 듯 차이가 범람한다. 그것은 전보다 상향된 가치인가, 미적지근한 운수인가. 기행을 일삼는 것으로 이룩한 이국은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섬으로 기록되었다. 처음 그곳에 당도한 개인은 멀쩡한 시간을 앞세워 걸었을 테지.

바싹 말라 있는 구덩이를 바라본다. 다락에서 깊을 숨을 가져온다. 이윽고 혀끝에 솟구치는 언어는 보편성을 거부한 채 주위에 흩날린다. 이를 목격한 게 자랑이라면 자랑이라 순식간에 들끓는 말수를 애써 잦아들게 한다. 줄곧 말이 없던 나는 어느 구석에 자리한 채 스스로를 꽁꽁 싸매고 있나.
황폐한 잔해에 맞선 이는 달아나려면 충분히 달아날 수 있었지만, 그가 택한 건 도망 대신 일면이었으니, 삽시에 모르쇠는 녹아내린다. 분분한 잔여는 어김없이 회전한다.

박예림, 임재균, 하지민, 이 터널, 2026, mdf, 각목, 페인트, 퍼티, 목공 풀, 타카심, 225 x 172 x 841cm 이미지_양승규

잦은 기침 아래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이 비유로서 자리한다. 그것 앞에서 가능성을 동여맨 둥지가 매몰차게 몸을 비치적거린다. 미처 짓지 못한 매듭이 없음을 기술하고, 반복을 끌어와 생각의 초입에 댄다. 뭉툭한 외형의 되풀이는 자연스레 바깥을 활보한다. 여백이 채워지는 듯한 식으로, 솜씨 좋게 빈 곳을 꿰매며.

검은 객체로 가득한 개울이 벌어진 상처를 어떻게 다루는지. 긴 구덩이 역할을 마친 후 무언가의 통로가 되기 전 무료한 시기를 보낼 따름이었다. 바닥은 삐걱거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듯하다. 규칙과 계획은 대립하는 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정신 사나워 닫은 뚜껑을 열고 정돈하지 않은 주변과 하나가 된 까닭은 자칫하면 고꾸라질 표정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닥에 닿을 때 먼지의 온갖 양상을 볼 수 있었지만, 이는 극도로 소모적인 응시였기에 피로는 걷잡을 수 없이 긴 팔을 휘두르며 내재적인 소음을 일게 했다. 사리를 분별할 수 없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산란하게(동시에 신랄하게) 대상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예의 표정은 장대 끝에 붙어 있다.

입구인지 출구인지 알지 못하는 곳에 주저앉았다. 벽에 기댄 모양새가 더 이상 파도가 치지 않는 물가를 연상시킨다. 무언가 불쑥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놀랄 수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한때 영광이었던 지표를 단적으로 외면하는 일인 듯도 해 정방향의 탈출을 꿈꾼다.
공간을 시간으로 갈음하고, 혹은 그 반대라도, 얼마간 무방비로 있다가 온몸에 치우침을 덧쓴다. 우려가 견고한 이들이 남긴 흔적은 벽의 일부를 장식한다. 그것을 읽어 내리는 것보다 정면으로 마주한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게 더 바람직한 일처럼 여겨진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다. 이와 동시에 생겨난 변방에 구를 이름 둘을 떠나보내며 구축과 자립의 중간항을 붙든다. 무언의 악화는 급히 진행되어 수평은 기울 수밖에 없었고, 메타포는 미끄러지며 하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