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은 변한다

한 곡을 두 번 녹음한 연주자들의 시간에 관하여

해석은 변한다
이미지 출처: Isaac Ibbott/Unsplash

어떤 연주자는 젊은 시절 연주했던 작품을 나이 들어서 다시 연주합니다. 어떤 연주자는 나이가 들어 다시 연주하려고 일부러 긴 시간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작품을 연주했으니 비슷할 것만 같은데, 이상합니다. 두 연주가 사뭇 다릅니다.
연주가 달라졌다면, 그 차이는 결국 연주자에게서 나온 거겠죠. 그 사이에 무엇을 겪었는지가 연주 안에 그대로 남으니까요. 그래서 같은 사람이 같은 곡을 다시 연주할 때, 우리는 음악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을 듣게 됩니다.


글렌 굴드

다른 구조로 바라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이미지 출처: Fred Plaut/Sony Music Entertainment

고백부터 하자면, 필자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의 연주를 애청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의 연주는 때때로 너무나 개성적이어서 종종 필자의 해석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1955년과 1982년(1981년 녹음)에 발매된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만큼은 종종 찾아 듣습니다. 선호도를 떠나, 새로운 질문을 하게 만들거든요.

글렌 굴드의 연주,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中 아리아(1955, 1982)

두 음반의 차이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첫 번째 트랙, ‘아리아’만 들어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1955년 음반의 연주는 빠릅니다. 반짝이고, 날카롭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20대의 굴드는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손가락만으로 음표들을 또렷하게 만들어냅니다.

반면 1982년 음반의 연주는 1955년에 비해 훨씬 느립니다. 굴드에게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1955년 음반을 돌아보며 각각의 변주가 개별적으로 부각된다는 점을 아쉽다고 언급했고, 새로운 녹음에서는 서른 개의 변주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고자 했습니다. 각각의 변주가 앞선 변주에서 다음 변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그 흐름을 염두에 둔 템포로 ‘아리아’를 시작한 것이죠.

이 음반은 굴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발매된 음반입니다. 그가 왜 하필 이 곡을 다시 녹음하려 했을까요. 어쩌면 바흐에 대해 그가 평생 품어온 물음과 그 대답이 달라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음반 정보

글렌 굴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1955)

글렌 굴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1982)


요요 마

인생이 담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첼리스트 요요 마, 이미지 출처: Opus3 Artists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첼리스트에게 각별한 작품입니다. 악보에 지시가 많지 않아, 연주자의 해석이 크게 드러나는 곡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같은 연주자가 같은 곡을 다른 시점에 연주하면,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죠.

첼리스트 요요 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1-6번) 음반을 1983년, 1997년, 2018년, 총 세 번 발매했습니다.

요요 마 연주,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BWV 1007 中 프렐류드(1983)

요요 마 연주,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BWV 1007 中 프렐류드(1997)

요요 마 연주,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BWV 1007 中 프렐류드(2018)

1983년 스물여덟의 요요 마는 정석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줍니다. 첫 음부터 유려하게 흐르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합니다. 한편 1997년의 연주에서는 한층 더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이 음반은 안무가·영화감독·정원 디자이너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협업 영상 프로젝트로 발매되어 더욱 특별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탐험가(Venture culturalist)’라고 부르는 연주자이고, 그래서인지 1997년의 연주도 장르와 감각을 가로지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2018년의 연주에는 서두르지 않는 한 연주자의 호흡이 느껴집니다. 증명하려는 것도, 실험하려는 것도 없습니다. 비평가들은 이 연주를 요요 마 음악 인생에서 가장 성숙하고 뛰어난 성취로 평가합니다. 요요 마는 이 음반 해설에 “60대가 되면서 삶과 음악 모두에서 시간 감각이 달라졌다. 한편으로는 확장되고, 한편으로는 압축된 것 같다”라고 썼고, 그 변화는 연주 안에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요요 마는 2018년 음반을 발매한 이후에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꾸준히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연주는 앞으로 또 어떻게 달라질까요.


음반 정보

요요 마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1983)

요요 마 [바흐에게서 받은 영감(Inspired by Bach): 무반주 첼로 모음곡](1997)

요요 마 [여섯 개의 진화(Six Evolutions)-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2018)


정경화

41년을 기다린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파르티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이미지 출처: Sheldon Artists

1975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바흐 파르티타 2번과 소나타 3번을 녹음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습니다. 평론가들은 그의 연주에 관해 선율이 매끄럽게 이어지면서도, 힘 있는 연주라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무반주 파르티타에서는 뚜렷한 개성이 돋보인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경화는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지 못했고, 바흐에 도전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경화 연주,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BWV 1004 中 샤콘(1970년대)

정경화 연주,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BWV 1004 中 샤콘(2016)

2016년, 예순여덟의 정경화는 마침내 바흐 무반주 전곡을 녹음합니다. 1975년 음반을 발매한 이후 41년 만이었습니다. 1975년 음반도 훌륭하지만, 2016년의 음반과 비교하면 어쩐지 가늘고 날카롭게 들립니다. 젊은 연주자의 집중력과 긴장감이 그대로 실려 있는 듯합니다. 2016년의 연주는 더 단단하고 견고해졌고, 동시에 은은한 윤기가 감돕니다. 절절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41년이 흐르는 사이, 정경화의 삶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웠죠. 2005년에는 손가락 부상으로 몇 년간 바이올린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정경화는 그 기간에 눈을 감고 선율을 머릿속으로 따라가며, 악기 없는 연습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다시 무대에 올랐을 때, 정경화는 그때의 그 시간들이 오히려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들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샤콘에서 느꼈던 그 윤기와 절절함은 그렇게 쌓인 시간에서 나온 소리일 것입니다.


음반 정보
정경화 [바흐: 파르티타 2번 & 소나타 3번](1975)

정경화 [바흐: 소나타 & 파르티타](2016)


악보는 변하지 않지만, 연주는 변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연주자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음표를 마주하더라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는 삶과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들의 음반을 다시 꺼내 들어보세요. 처음과는 다르게 들릴 겁니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갔던 부분이 오래 남기도 하고, 그때는 이해되지 않던 순간이 지금은 또렷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독자분들도 그동안 조금은 달라졌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