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큐레이터는 자립할 수 있는가
제도 바깥에서 함께 실천하기
특정 회사나 기관에 속하지 않고 혼자 일하는 사람을 '프리랜서'라고 합니다. 출퇴근 시간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프리랜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실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감을 직접 구해야 하고, 계약도 혼자만의 몫이며, 다음 달 수입을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자유로워 보이는 것과 실제로 자유로운 것은 다릅니다.
독립 큐레이터도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속하지 않은 채 전시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종의 프리랜서입니다. 독립 큐레이터로 일하게 되면 스스로 의제를 정하고, 하고 싶은 전시를 만들고, 기관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즉 제도로부터 자유롭게 큐레이토리얼적 실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독립 큐레이터들은 지원금 심사를 걱정하고, 하고 싶은 기획과 할 수 있는 기획 사이에서 끊임없이 타협합니다. 추구하는 가치를 미술로서, 전시로서 보여주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고, 국가의 지원 없이는 거의 대부분 생계를 부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원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제도권에서 허용되는 언어로 제안서를 쓰고 국가에서 용인할 수 있는 선에서 기획해야 합니다.
이것을 '자립'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무엇이 큐레이터를 독립하게 했는가
독립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1969년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스위스의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 Harald Szeemann은 그가 일하던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When Attitudes Become Form》라는 실험적인 전시를 기획합니다. 개념과 과정을 중시하던 작가 69명이 모여 전시 현장에서 작품을 설치하며 시각적으로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그저 아이디어라도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 전시였습니다. 기획이 너무 진보적인 나머지 이사회와 미술계는 이를 문제 삼았고, 제만은 결국 사임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스스로를 '독립 큐레이터'로 선언하고 활동을 이어갑니다. 즉 독립 큐레이터의 시작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기관이 수용할 수 없는 실천이 제도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결과라고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석사급 이상의 정학예사 자격 취득자 수에 비해 일자리는 늘지 않았습니다. 국공립 기관의 학예연구사의 경우도 최소 인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관련 전공 석사 이상의 학위, 심지어는 해외 유학도 너무나 흔한 스펙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국립현대미술관조차 학예 인력을 기간제로 채용하고, 사립미술관의 큐레이터 채용은 1년 단위 계약직인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큐레이터 예비인력을 최대 18개월짜리 '서울형 매력일자리' 사업으로 순환 채용하고 있죠. 이 좁고 불안정한 세계에서 지친 이들이 결국 독립을 택하거나, 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기관 안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세희·심보선(「큐레이터십을 연구하기」, 박물관학보, 2024)은 큐레이터의 경력을 "끊임없는 긴장과 모순에 대응하는 불확정적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예산 삭감, 기관장 교체, 전시의 정치적 민감성 등 큐레이터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은 큐레이터의 역할인 비판적 실천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좁힙니다. 기관 안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온전히 할 수 없고, 고용 상태가 늘 불안할 수 밖에 없다면, 독립이 온전한 '자발적 선택'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도권이라는 벽
기관을 떠난 큐레이터 앞에 놓인 첫 번째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권이라는 벽 입니다. 전시를 기획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지원금을 받으려면 제도권 내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또 용인할 수 있는 언어로 기획을 번역해야 합니다. 실험적이고 첨단 기술을 적절히 활용하되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는 안되고, 다른 기관, 큐레이터와 차별화되는 기획이어야 합니다. 기관과 협업을 하더라도 의뢰한 기관의 방향성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건 고용된 큐레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도권에 대한 저항의 논리로 기관을 떠났지만, 다시금 동일한 구조에 복무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독립 큐레이터 앙헬스 미랄다Àngels Miralda는 프리즈Frieze와의 인터뷰에서 주요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직이 소수의 기관 디렉터들에게 반복적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지적합니다. 독립 큐레이터가 아무리 좋은 기획으로 두드려도 그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독립은 자립이 아니라 주류(제도권 내 기관)로부터의 배제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기관이 주도하는 제도권의 바깥에서 또다시 벽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사회학자 파스칼 기엘렌 Pascal Gielen은 '자기 불안정화(self-precariz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자율성을 욕망하는 바로 그 의지가,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독립 큐레이터는 프로젝트가 없는 기간에도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하고, 기획서를 쓰는 시간도, 미팅을 위해 이동하는 시간도 모두 보상받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자립했지만 노동에 걸맞는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지원금이나 지원 사업을 따내는 데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돌아오죠. 이러한 실태가 반복되고 수많은 독립 큐레이터들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문화예술의 제도적 구조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속 가능한 자립을 위한 시도
그렇다면 독립 큐레이터에게 지속가능한 자립이란 무엇일까요. 문화예술 제도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개인의 역량만으로 구조적 불안정을 버텨내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아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조건을 바꾸려 한 시도들이 있습니다.

W.A.G.E.(Working Artists and the Greater Economy)는 2008년 뉴욕에서 시각·공연예술인과 독립 큐레이터들이 함께 만든 단체입니다. 이들이 처음 한 일은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부터 2010년 사이 뉴욕 비영리 전시 공간에서 활동한 예술인들의 경제적 경험을 직접 조사하고 공개했죠. 이를 바탕으로 2014년 W.A.G.E. 인증 프로그램이 출범했고, 최소 보수 기준을 충족한 비영리 기관에 인증을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까지 총 146개 기관이 인증을 받았고, 아주 조금씩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죠. 눈에 보이지 않고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예술인에게 그들의 노동에도 정당한 금전적 가치를 보장해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상에 측정 가능하고 요구 가능한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러한 목소리들이 꾸준히 모인다면 큐레이터도 진정한 자립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국내에서는 2025년 8월 창간한 '엑시빗xhibits'이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전시가 SNS 피드와 아트위크 숫자 경신 속에서 소비되는 동안, 정작 전시 자체를 들여다보는 일은 유보된다는 구조적 진단에서 시작합니다. 창간사에서 엑시빗은 얀 페어보어트Jan Verwoert를 인용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우리 스스로 연대하여 그 규칙을 변화시키고 그 압박에서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을 전시를 향해 던지겠다고 선언합니다. "삐딱하고 냉정하게, 진중하고 가열차게." W.A.G.E.처럼 제도를 향해 직접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미술계가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관행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질문하는 자리를 스스로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습니다. 비평 플랫폼으로서 미술계 전반의 구조뿐 아니라 당연하게 여겨지는 기준과 잣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나아가 스스로 수정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실질적인 변화를 목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큐레이터들도 더 이상 타의적으로 자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립 큐레이터의 불안정이 구조에서 온 것이라면, 그 구조에 응답하고 도전하는 것도 혼자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큐레이터이자 연구자인 폴 오닐은 2005년 '독립(independent)'을 '공동의존(co-dependent)'으로 바꿔 읽자고 제안합니다. 한쪽이 다른 쪽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도 그 관계를 끊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죠. 독립 큐레이터는 기관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지원금을 위해 기관의 언어를 써야 하고, 전시를 위해 기관의 공간을 빌려야 하고, 커리어를 위해 기관의 인정을 필요로 합니다. 기관 역시 독립 큐레이터의 유연성과 비판적 시각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들의 노동에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지 않고 안정성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둘 다 서로에게 기대고 있지만, 그 관계가 대등하지 않다면, '독립'이라는 말이 그 불균형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립 큐레이터는 자립하는가라는 질문에, 지금의 구조에서 혼자 자립하기는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답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구조에서 온 것이고, 보이지 않던 구조를 함께 가시화한다면, 그 땐 좀 더 직접적인 요구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들이 모여 문제점을 파악하고 조율과 협상의 장을 만드는 겁니다. 이 또한 큐레이터의 비판적 실천일 수 있겠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독립을 택하거나 택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지원금이 끊기면 기획력 부족, 기관으로 돌아가면 타협, 버티지 못하면 의지 문제. 구조의 실패가 반복적으로 개인의 실패로 번역되어왔지만, 그 질문을 다시 구조의 문제로 되돌려놓는 것 자체가 지금 독립 큐레이터를 둘러싼 담론이 해야 할 일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