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상처받을 필요가 있다

보는 이들에게도 상처를 남길 영화 3편

기꺼이 상처받을 필요가 있다
출처: IMDb

<세븐>, <파이트 클럽> 등의 작품들로 유명한 스릴러 장르의 거장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언젠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죠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죠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절대로 바다에서 수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
덧붙여 자신은 사람을 단순히 즐겁게 하는 영화보다 상처를 남기는 영화에 언제나 더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죠. 누군가에겐 가학적이고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상처를 영화의 미덕 중 하나로 삼는 이들에게는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말일 겁니다.

이때 상처를 낸다는 것은 비난이나 공격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이나 눈물에 섞여 휘발되는 일시적인 감정 유발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더 넓게,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스크린 너머로 유리되어 있던 영화 속 세계가 내가 발붙이고 선 세계의 두려움과 아픔을 낯설고도 집요하게 비출 때마다, 영화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풍경을 제3자의 생경한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됩니다.
세계를 구태여 아프게 감각해야 하는 것은, 익숙한 자극에서 벗어나 불편함과 아픔을 감수해야만 다가갈 수 있는 삶의 장면이 있고, 각자가 ‘인지하는’ 세계란 이러한 장면들로 입체성을 갖춰 나가기 때문입니다. 상처 뒤로 이어지는 아픔, 슬픔, 괴로움, 쓰라림 등은 그 어떤 감각보다 오래도록 강렬하게 남아 나의 세계를 타인의 세계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혀주는 힘으로 작용하죠.

영화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아직 자신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좋은 영화’의 본질은 관객에게 작은 상처라도 남기고자 하는 영화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지난날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며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쉽게 치유되지 않을 타인의 아픔을 목격하게 하여 마음을 할퀴고 갈 수도 있죠. 또 때로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 세 편은 이러한 각각의 방식으로 관객에게 끝내 흉터를 남기고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이 바꾸기 힘든 현실의 상황 앞에서 상처 입은 인물들은 저에게 삶의 무자비함과 야속함을 아프게 상기시켜 주었죠. 조금 짓궂은 말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 여러분이 저처럼 한껏 아프길 바라게 되네요


  1. 씨네21 '데이비드 핀처' 인물 ↩︎


한 번쯤 지나온 아픈 얼굴들, <고양이를 부탁해>

이미지 출처: '고양이를 부탁해' 네이버 포토

2001 │ 드라마 │ 110분 │ 감독 정재은

인천에서 상업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5명의 단짝 친구 혜주, 지영, 태희, 비류, 온조는 각자의 고민과 어려움을 안고 스무 살을 지나고 있습니다. 졸업 후 증권사에 취직한 혜주는 유능한 커리어우먼을 꿈꾸며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애쓰지만 ‘고졸’이라는 꼬리표에 발목이 잡히는 것 같아 심란한 사회 초년생이죠. 지영에게도 텍스타일 디자이너라는 꿈이 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가난의 무게와 노쇠한 조부모를 짊어지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숨이 찹니다. 삶에 치여 조금씩 멀어지는 친구들의 중심에서, 태희는 우정이 변하지 않길 바라며 부단히 애쓰지만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선 소녀들은 아직 친구의 마음까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함께 있으면 즐겁기만 했던 시기를 지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어른의 사회에 조금 일찍 진입한 그녀들은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서 서서히 관계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청춘의 초상 같은 영화인 것은, 청춘이라 불리는 20대를 살아내는 것이 곧 관계 변화의 중심에 있는 세 인물 혜주, 지영, 태희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과도 같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희와 지영이 눈에 밟히던 때를 지나 혜주의 불안함과 고단함까지 조금 더 선명히 보이는 지금, 셋의 모습이 모두 언젠가의 저와 닮아있다고 느끼죠. ‘저부가가치’ 인간이 될까 두려워 아등바등 사느라 주변을 세심히 돌아보지 못하는 ‘혜주’와 현실에서 기인한 좌절과 열등감을 가까운 이들에게 내보일 수밖에 없었던 ‘지영’이 부딪히는 장면은 쉽게 어느 쪽의 손만 잡아줄 수도 없어 특히나 아프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고 소중한 것들이 변해버릴까 두려워하던 태희 또한 관계의 변화 앞에서 자주 상처 입곤 했던 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녀들이 불안 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상처는 지금의 저에겐 다 아물어버린 흉터의 기억이지만, 대신 나로 인해 상처 입었던 이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과, 지난날의 나와 같은 세 인물에게 느끼는 안쓰러움이 다시금 제 안에 따끔한 상처를 만들어 냅니다. 서로의 고양이를 맡아주기엔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벅차고 어려웠던 그 시절, 혜주, 지영, 태희의 얼굴 위로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해피엔딩은 없고 그저 살아갈 뿐, <아노라>

이미지 출처: '아노라' 네이버 포토

2024 │ 드라마 │ 139분 │ 감독 션 베이커

뉴욕에서 ‘애니’라는 이름의 스트리퍼로 일하고 있는 ‘아노라’는 일이 끝나면 여느 직장인처럼 지친 얼굴로 퇴근길에 오릅니다. 화려한 클럽 안에서와 달리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지하철 구석에 몸을 구긴 채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리네 삶이란 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매일의 연속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체감하게 되죠. 이렇게 특별할 것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아노라는 어느 날 클럽에 찾아온 손님인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만나 신분 상승과 진실한 사랑을 꿈꾸며 충동적인 결혼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고, 꿈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곧 이들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된 이반의 부모님과 그들이 고용한 하수인들이 찾아와 강제로 이혼을 시키려 들고 결혼은 무효화 될 위기에 처합니다.

아노라는 하수인들을 만난 순간부터 강제로 이혼 절차를 마치는 순간까지 인격적 모독의 대상이 됩니다. 결혼은 두 명이 합의한 의사결정이지만, 비난의 화살은 더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계급을 가진 아노라에게만 돌아가죠. 아노라는 가졌던 모든 것을 다시 빼앗기고, 마지막까지 비참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녀는 곁에서 묵묵한 위로를 보내던 ‘이고르’의 앞에서 끝내 눈물과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끝.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암시 같은 건 없습니다. 관객의 눈앞에 남은 것은 차창 밖의 와이퍼 소리와 검은 화면의 엔딩 크레딧 뿐입니다.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앞에서, 결국은 무너져 상처투성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앞에서 영화는 아노라를 그저 지켜볼 뿐이고 영화 밖의 관객 또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아노라가 마음에 남은 상처를 수습하며 잘 살아 나가길 바랄 뿐이죠. 영화가 인물의 상처에 연고조차 발라주지 않고 페이지를 닫을 때, 단지 한 사람이 가진 상처와 수치의 목격자로만 남아야 하는 무력감과 먹먹함은 깊이 베인 상처처럼 오래도록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영화에는 반드시 엔딩이 있지만, 실제의 삶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어떤 순간을 엔딩이라고 집어 말할 수 없습니다. <아노라>는 이러한 삶의 속성을 반영하듯 관객에게 영화적인 해피 엔딩을 주는 대신, 아프더라도 이 삶은 이대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진실된 미완의 감각을 남기죠. 관객으로서 영화가 참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처로 가득한 삶이래도 그저 그렇게 계속 살아 나갈 수밖에 없다는, 담담하고 씁쓸한 위로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의 따뜻한 안이함, <소리도 없이>

이미지 출처: '소리도 없이' 네이버 포토

2020 │ 범죄 │ 99분 │ 감독 홍의정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시체 수습을 업으로 삼으며 생활하는 ‘태인’과 ‘창복’은 우리가 으레 미디어에서 접하는 범죄자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시체를 묻을 땐 죽은 자를 위해 정성껏 기도하고, 망자를 위해 머리를 북향으로 눕혀 주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죠. 입버릇처럼 양심 있게, 남의 것을 탐내지 말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들은 분명 범죄에 가담하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무섭거나 밉지만은 않게 보입니다. 어느 날 태인은 유괴된 11살 여자아이 ‘초희’를 억지로 떠맡게 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의사소통 장애인 태인이 초희와 함께 지내며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느새 이 납치범과 유괴된 아이가 함께 희망적인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길 바라게 됩니다.

관객은 처음부터 주인공이자 성인인 태인의 시점에서 태인의 감정선에 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태인은 납치에 가담한 범죄자이지만, 점점 초희에게 마음을 열고 정을 주는 과정을 따라가며 지켜보는 이들은 가랑비에 옷 젖듯, 어느새 ‘소리도 없이’ 어리숙하고 ‘밉지만은 않은’ 유괴범의 마음에 이입하게 되죠. 어린 초희는 길어지는 몸값 협상의 시간 속에서 단지 유괴범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태인의 눈치를 보고, 태인에게 일부러 살갑게 대한다는 것을 알지만, 태인의 경계선이 흐려질수록 어쩌면 초희도 태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안이한 낭만화일 뿐이라고 영화는 단호한 답을 내놓습니다. 태인의 심리적 변화가 어떠한들, 초희를 집에 돌려보내지 않은 태인은 유괴범이며 그 미래는 아름다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소리도 없이>는 우리의 위험한 미화에 경종을 울리듯, 학교라는 공간 안에 들어서 안전을 확보한 뒤 태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는 초희를 보여줍니다. 초희의 선택은 사실 당연하지만,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을 착각하게 만든 유대감이 태인의 일방적인 감정임을 새삼 깨닫고 저는 저 자신이 부끄러워졌었죠.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응원하고 무엇을 바란 것인가. <소리도 없이>는 의도적으로 관객을 감정적 함정에 빠뜨리고 이를 강하게 비트는 방식을 통해 관객에게 잊을 수 없는 스크래치를 남깁니다.

내심 바랐던 희망적인 미래와는 달리, 초희와 태인에게는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깊은 외로움이 후유증처럼 남은 듯합니다. 이들의 마음 안에서 굳게 닫힌 문은 어떻게 다시 열릴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저에게 남은 부끄러운 상처가 저릿하게 아파질 것 같습니다.


이미지 출처: '고양이를 부탁해' 네이버 포토

서문에서 영화를 통해 얻은 상처가 우리 자신의 세계를 넓혀줄 수 있다고 말했었죠.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어졌습니다. 상처를 남기는 영화는 나의 세계를 넓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돌아보면 현실에 비해 조금 더 안전하게 상처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 저는 그동안 상처받는 연습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통해 받는 상처는 영화 속 인물이라는 타인을 경유하는 간접 체험의 흔적이죠. 물론 실제의 삶에서 얻게 되는 상처의 쓰라림이란 보고 들은 것과는 달리 더 아프게 다가올 때가 숱하지만, 연습한 덕분에 적어도 타인의 상처를 조금 더 예민하게 감각하고 습관적 안이함을 경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만큼은 우리를 조금 더 아프게 해도 좋지 않을까요? 영화가 입힌 상처가 우리의 세계를 더 넓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도록, 그래서 삶을 더 다채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기꺼이 용기 내서 마음을 영화에게 맡겨보는 거죠. 영화가 끝나고 마음 한편에 남은 상처의 욱신거림은 우리의 세계가 한 뼘 더 자라는 성장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