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키는 여성들: 그레타 거윅이 건네는 용기

독립영화 배우에서 칸 심사위원장까지, 멈추지 않은 감독 그레타 거윅의 궤적

나를 일으키는 여성들: 그레타 거윅이 건네는 용기

그레타 거윅 감독 영화의 주인공들은 항상 필자에게 용기를 주는 여성이었습니다. 자신의 일과 인생을 가장 사랑하고, 환경에 순응하기보단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삶을 돌파하는 캐릭터들을 보며 덩달아 두 주먹을 불끈 쥐었죠. 그래서일까요. 그런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한 감독 그레타 거윅에게도 자연스레 닮고싶다는 동경과 함께 남다른 애정이 피어올랐습니다. 치열했던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에 조금씩 투영하며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만들어온 거윅은 대중의 사랑과 비평단의 인정을 동시에 받는 인물입니다.

거윅은 영화계에서 끊임없이 선명한 발자취를 남겨왔습니다. 2024년 미국 여성 감독 최초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한 그녀는 인디영화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를 거쳐 현재는 '믿고 보는 감독'의 반열에 올랐죠.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레타 거윅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할리우드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그리고 작품 속 여성들은 어떻게 자립의 서사를 써내려가는지 살펴봅니다. 스크린 안과 밖에서 그레타 거윅과 주인공들이 건네는 용기를 발견해 보세요.


실패가 남긴 수작, <프란시스 하> <매기스플랜>

그레타 거윅이 보여준 굵직한 작품들을 보면 시작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 같지만 사실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린 삶은 아니었습니다. 학생 시절 거윅은 뉴욕 버나드 컬리지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하며 극작가를 꿈꿨습니다. 자신감이 충만했던 거윅은 예일대, 줄리어드대 등 쟁쟁한 대학원의 극작과 석사과정을 지원했지만 보기좋게 모두 낙방하고 말았죠.

하지만 대학원 진학 실패는 거윅을 배우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영화라는 장르에 깊이 빠진 거윅은 저예산 독립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직접 연기를 하고 공동 각본과 연출을 맡으며 영화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이어갔죠. 감독은 훗날 이 치열했던 기간을 '나만의 DIY 영화학교' 라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영화 <프란시스 하>

 영화 <프란시스 하>와 <매기스플랜>은 그레타거윅 특유의 생생하고 친근한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당시 동료이자 현재는 남편이 된 노아 바움백 감독과 함께 극본을 쓴 <프란시스 하>에서 주인공 '프란시스' 역할을 맡으며 배우로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죠. 극 중 프란시스는 브루클린에 사는 27살 무명의 무용수입니다. 무용단에서 연습생으로 일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캐스팅 기회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그녀의 꿈이 이뤄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룸메이트와 사소한 갈등이 쌓이고, 연인과의 관계도 영 시원찮죠. 뉴욕에서 무용수로 성공하겠다는 거창한 꿈과 달리 하루하루 서툴게 살아내는 프란시스의 이야기는 일정 부분 그레타 거윅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작품입니다.

이미지 출처: 영화 <매기스 플랜>

이어 개봉한 영화 <매기스플랜>의 매기는 앞날을 철저히 계획하고 통제합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자꾸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죠. 매기는 결국 계획에 없던 일들이 계속 끼어드는 예측 불가능한 삶을 긍정하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이라는 진정한 자립을 위트있게 그려냈습니다. 이밖에도 그레타 거윅은 뉴욕에서 생활하는 대학생 새내기를 연기한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셰어하우스 이야기를 담은 <우리의 20세기> 등을 통해 엉뚱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날 것 그대로의 연기를 선보였죠.

인정받는 감독으로 서다, <레이디 버드> <작은 아씨들>

이미지 출처: 영화 <레이디 버드>

그레타 거윅이 감독으로 입지를 단단히 다지게 된 건 단연 <레이디 버드>와 <작은 아씨들>덕분입니다. 특히 <레이디 버드>는 거윅의 첫 단독 연출작으로,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부문 작품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영화는 10대 소녀의 서툰 삶을 그렸습니다. 지긋지긋한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소녀 '크리스틴'은 부모가 지어준 자신의 이름조차 거부하며 "나를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라"며 고집을 부리죠. 가족, 친구, 연인 뭐 하나 내 맘같지 않은 관계 속에서 크리스틴은 모진 방황과 성장통 끝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포용하기 시작합니다.

<레이디 버드>에서 까칠하고 반항적인 크리스틴을 완벽하게 소화했던 배우는 시얼샤로넌. 이후 그녀는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를 맡아 다시 한 번 그레타 거윅 감독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고전 소설이자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이 명작은, 두 여성 예술가의 손을 거쳐 소설을 그대로 옮긴듯한 생생한 영상으로 재탄생했죠. 씩씩하고 활기차며 밤 새워 글을 쓸 만큼 열정이 넘치는 작가 지망생 '조 마치'. 하지만 당찬 그녀에게도 섬세하고 여린 감성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독은 그 지점을 완벽하게 관객에게 전달했습니다.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이 신물이 나요. 지긋지긋해요...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

이미지 출처: imdb

거윅은 어린시절부터 '조 마치'와 자신을 동일시해왔다고 밝힌 적 있습니다. 그만큼 상당한 애정을 담아 <작은 아씨들>을 제작했다는 것이겠죠. 메그, 조, 베스, 에이미. 이 네 자매는 독립된 인물들이라기보다, 한 여성의 내면에 공존하는 다채로운 페르소나처럼 다가옵니다. 때로는 철없이 명랑한 에이미였다가, 감성적인 베스이기도 한 일련의 과정 처럼요. 원작의 뼈대를 살려내면서도 현 시대의 사람들까지 공감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거윅의 섬세한 연출력 끝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6개부문 후보에 오르며 다시 한 번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증명해냈습니다.

인형 상자를 박차고 나온 <바비>

이미지 출처: imdb

대중에게 입지를 공고히 다진 그레타 거윅 감독의 다음 행보에 궁금증이 쏠렸고, 그에 대한 답은 놀랍게도 <바비>였습니다. 영화 <바비>는 핑크빛 유토피아 ‘바비랜드’에 살던 바비인형이 포털의 균열로 인해 현실 세계에 들어오며 펼쳐집니다. 바비가 만난 현실은 꿈 같던 바비랜드와 달리 낯설고 잔인했죠. 인공적으로 셋팅된 인형 상자를 나와 인간 세계로 발을 내딛는 바비의 여정은 여성으로서,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 ‘완벽함’이라는 강박을 벗고 온전히 나의 의지대로 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상의 잣대는 각박할지언정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그냥 나 자신’ 자체로도 충분히 빛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성 감독이 단독으로 연출한 작품 최초로 글로벌 흥행 수익 10억 달러를 돌파한 이 작품을 통해 그레타 거윅은 감독으로서 또 한 번 커리어의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제 대중에게 ‘그레타 거윅’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 명의 감독을 넘어 하나의 취향이자 태도를 대변하는 아이콘이 됐습니다. 그녀는 실패에 머무는 대신 스스로 펜을 들어 영화를 쓰고, 연기하고, 만들었습니다. 그 작품 속 인물들 또한 실수하고 넘어지면서도 끝끝내 일어서는 의지를 지녔죠. <프란시스 하>의 서툰 발걸음부터 <작은 아씨들>의 야망과 사랑, 그리고 <바비>가 전하는 주체성까지. 그레타 거윅의 세계는 과감하면서도 섬세함을 놓치지 않습니다. 덕분에 거윅의 영화는 모두의 이야기이면서도 나만 아는 내밀한 상처를 들킨 것처럼 공감하는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만약 나만의 길을 걷다 불안해서 멈춰버렸다면, 그레타 거윅이 건네는 용기를 통해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져보는 건 어떨까요. 나와 닮은 누군가가 스크린 속에서 꿋꿋이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용기를 얻는다면, 비로소 영화의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