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취향으로 자리잡은 강릉의 독립서점 3곳
강릉살이 5년차 에디터가 만난 자립의 공간들
바다가 보고 싶어 훌쩍 떠난 강릉.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프랜차이즈 카페나, SNS에서 본 듯한 비슷한 풍경에 앉아 공허함을 느낀 적 없으신가요? 유행의 속도에 맞춰 빠르게 소비되는 공간들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진짜 나다운 휴식과 멀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합니다.
강릉에 5년 동안 거주하며 수많은 공간을 경험해 온 에디터로서, 결국 오래 곁에 두고 마음을 내어주게 되는 곳은 주인의 짙은 개성과 사적인 취향이 다정하게 스며든 공간들이었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빠르고 번듯한 길에서 살짝 벗어나 자기만의 굳건한 세계를 지어 올린 곳들 말이죠. 책에만 집중할 수 있게 사진 촬영을 엄격히 제한하거나, 정동진의 해 뜨는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커피와 위스키와 함께 책을 즐기는 곳들처럼요. 유행의 한가운데에서 조금 떨어져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만들어낸 강릉의 독립서점 3곳을 소개합니다.
<한낮의 바다>
효율성과 속도에서 분리된, 느리고 섬세한 자립

화려한 간판 대신 강릉 교동의 조용한 골목길에 자리한 '한낮의 바다'는 그 이름처럼 고요하고 온전한 휴식을 내어주는 공간입니다. 문을 열면 짙은 책 내음과 핸드드립 커피 향이 따스한 우드 톤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죠. 이곳은 책을 많이, 빠르게 파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보다는 독자와 책이 어떻게 관계 맺을지에 진심을 다합니다. 남들이 정해둔 베스트셀러 목록을 좇기 보다는 서점지기가 하나 하나 적어놓은 다정한 추천 메모를 읽다 보면 책에게 선택 받는 듯한 묘한 설렘을 느끼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한낮의 바다 인스타그램 (@midday_sea)
특히 표지와 제목을 꽁꽁 숨긴 '비밀 책'은 오직 나의 직감에 기대어 책과 연을 맺는 낭만을 선사합니다. 이 공간에서는 사진 촬영이 엄격히 제한됩니다. 덕분에 방문객들은 스마트폰 렌즈를 내려놓고, 안락한 분위기 속에서 활자와 내면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장님의 온기가 묻어난 소품들을 구경하고, 정성스레 도장이 찍힌 종이봉투를 받아 드는 일련의 과정들. 남들의 속도를 좇지 않고 자신만의 단단한 룰을 만들어가는 이 아담한 서점은, 빠른 소비에 지친 우리에게 느리고 다정한 치유의 감각을 건넵니다.
<이스트씨네>
해가 뜨면 시작되는 정동진 시네필의 아지트

새해 일출 장소로 유명한 정동진에서 '이스트씨네'는 일출에 맞춰 영업시간을 바꾼다는 낭만적인 선언을 합니다. 정동진독립영화제가 끝난 뒤 머물 곳이 없다는 작은 아쉬움에서 출발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영화'라는 확고한 취향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단단한 로컬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알록달록한 외관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실제 폐관한 극장에서 가져온 업사이클링 좌석과 커다란 스크린이 보입니다. 마치 영화관에 온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죠.

서가에는 영화 관련 도서부터 DVD, 카세트테이프까지 영화 매체 전반이 세심하게 큐레이션 되어 있습니다. 1층에서는 책을 고르며 팝콘이나 비건 치아바타를 맛볼 수 있고, 때로는 영화제의 파트너가 되어 단편영화 상영관으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2층은 여성 1인 전용 숙소인 '영화로운 스테이'로 운영됩니다. 책과 영화, 비건 지향의 먹거리, 그리고 지역 영화제와의 단단한 연대까지. 이스트씨네는 남들이 정해둔 규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만든 다정한 룰을 따르는 독립성의 결정체 같은 공간입니다.
<윤슬서림>
낮에는 차를, 밤에는 위스키를 곁들이는 책방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어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윤슬’이라는 이름처럼 반짝이는 고요가 찾아오게 되죠. 윤슬서림은 단순히 책을 사고 떠나는 곳이 아니라, 기꺼이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다정한 매력을 지녔습니다.
윤슬서림은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책을 사서 나가는 곳이 아닌 머무르는 공간을 제안합니다. 앉아서 마시고 읽으며 대화하는 여유로운 체류형 공간이 된 것이죠. 내부에는 빽빽한 책장 대신 방문객을 품어주는 널찍한 좌석들이 자리하며, 대형 서점에서 보기 힘든 에세이와 시집들이 사적인 무드를 더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공간의 리듬도 매력적입니다. 낮에는 예쁜 꽃잔에 담긴 따뜻한 차와 커피를 내어주는 카페였다가, 밤이 되면 맥주와 위스키를 음미할 수 있는 차분한 바(Bar)로 부드럽게 전환되죠. 누군가 벽면에 빼곡히 남겨둔 다정한 방명록을 읽으며 책과 술, 대화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동네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윤슬서림 인스타그램 (@yoonseul_bookstore)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누군가의 방명록을 읽다 보면 책과 술, 타인의 문장들이 부드럽게 섞이는 낭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경계를 허문 이 느긋한 밤의 서점은 그 존재만으로도 강릉 로컬 문화의 다양성을 한층 깊고 다채롭게 넓혀줍니다.
강릉에서 만난 세 곳의 서점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립의 의미를 공간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속도와 효율 대신 다정한 치유를 건네는 '한낮의 바다', 일출이라는 자연의 시간에 맞춰 기꺼이 자신만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한 '이스트씨네', 서점의 경계를 허물고 시와 위스키가 섞이는 밤을 내어주는 '윤슬서림'까지. 이들은 모두 세상이 정해둔 핫플 공식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내며 각자의 궤도와 속도를 잃지 않죠.
어쩌면 우리가 잊고 지낸 진정한 의미의 자립은 나다운 것을 지켜내는 다정하고도 단단한 취향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여행지에서 마주친 이 고유한 공간들의 이야기가 다시 복잡한 일상으로 돌아갈 우리에게도 나만의 생태계를 가꿔갈 용기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