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는 프랑켄슈타인
삶에 홀로 내던져진 이들에게
프랑켄슈타인은 19세기 초반 메리 셸리(Mary Shelley)에 의해 처음 탄생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로 시작하여 자연, 생명, 인간에 대한 주제의식을 담은 역작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대부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에 매우 익숙합니다. 이는 『프랑켄슈타인』이 다양한 작품, 다양한 장르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었기 때문일 텐데요. 이 글에서는 특별히 영화 가운데서 두 작품을 꼽아 원작 소설과 비교해 봅니다. 바로 제임스 웨일(James Whale) 감독의 1931년작과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의 2025년작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수많은 리메이크작과 파생 작품들을 낳은 만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 글에서 주목할 점은 ‘피조물과 창조자의 관계’입니다. 종종 괴물의 이름으로 오인되는 ‘프랑켄슈타인’은 사실 괴물을 만들어낸 박사의 이름입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에서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괴물의 것으로 오인되는 데에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작품이 영화화되며 남은 강렬한 이미지 때문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더불어 많은 독자나 관객들이 이 작품의 주인공을 박사가 아닌 괴물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따라서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에 주목하되, 조금은 더 이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괴물의 관점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독한 존재의 실존적 외로움을 말하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은 '무서운 이야기'를 목표로 한 고딕 소설(미스테리나 공포의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소설)의 대표작입니다. 셸리는 꿈에서 ‘으스스한 실루엣’을 마주하고 이를 소설 속에서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괴물의 형상으로 재현합니다. 이 괴물은 주인공 빅터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이 소설의 부제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점은 명백히 빅터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알려줍니다. 신의 것이었던 불을 훔쳐 영원한 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빅터는 신의 영역인 생명의 창조를 시도했다가 끝없이 고통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에는 자신의 창조자 빅터로부터 외면받은 괴물의 고독한 심리도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빅터는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끝에 시체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냈지만, 자신의 창조물을 외면하고 저주합니다. 괴물은 홀로 유럽의 이곳저곳을 떠돌다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언어를 배워갑니다. 끔찍한 생김새로 인해 어딜 가든 비참한 대접을 받은 괴물은 점차 인간을 증오하게 됩니다. 결국 빅터에게 찾아와 자신이 인간 세계를 떠나서도 외롭게 살지 않도록 자신의 짝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만, 빅터는 ‘괴물’이 늘어나 인간을 위협할 것을 두려워하며 부탁을 거절합니다.
소설 속 괴물은 서로 의지하는 따뜻한 인간들의 모습에 삶의 희망을 찾기도 하지만, 또 인간들에게 배척당하며 처절한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가 그토록 인간을 증오하게 된 배경도 이해가 갑니다. 그는 낯선 모습으로 홀로 세상에 내던져졌지만 자신의 창조자로부터도 외면받는 신세입니다. 소설은 꽤나 긴 분량을 할애하여 괴물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비록 빅터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메리 셸리가 창조한 괴물의 캐릭터는 자신만의 목소리와 개성을 지닌 채 많은 이들의 창작욕을 자극했습니다.

무지와 순수 사이,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
제임스 웨일 감독은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세상에 내놨습니다. 그 이전에도 프랑켄슈타인을 영화화한 작품이 있었음에도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지금 우리가 아는 ‘공포 캐릭터’로서 전형적인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커다란 얼굴, 목이나 이마에 박혀 있는 볼트는 이 영화에 담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모습이었습니다.

영화는 소설 원작의 줄거리를 반영하지만 새로운 창작 요소도 많이 드러냅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빅터’가 아닌 ‘헨리’라는 점(헨리는 원작에서 빅터의 친구 이름입니다), 전류를 이용해 괴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점, 조수의 실수로 범죄자의 두뇌를 실험에 사용한 점, 그리고 척추가 휘어있는 ‘곱추’ 조수 프리츠의 등장 등은 영화의 상상력입니다. 하지만 이후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그대로 사용된 요소도 많은 만큼, 후대의 리메이크에 원작만큼이나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때 괴물은 범죄자의 두뇌를 지녔다는 설정 때문에 무척 난폭하게 표현되지만, 또 영화를 자세히 뜯어보면 대체로 사회화되지 못한 순수와 무지가 더욱 지배적인 캐릭터입니다. 괴물이 처음 공격성을 드러낸 것은 조수 프리츠의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괴롭힌 프리츠를 해하고, 또 자신을 해부하려던 헨리의 스승 발트만 박사를 죽인 괴물은 실험실을 탈출합니다. 마을을 떠돌던 괴물은 한 소녀를 만나는데, 여기에서 괴물의 무지와 순수, 그리고 그로 인한 비극이 극대화됩니다. 소녀는 꽃잎을 강물에 띄우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괴물은 무척 즐거워하며 그 놀이를 함께 즐깁니다. 꽃잎이 다 떨어지자 괴물은 소녀도 꽃잎처럼 떠오를 것이라 생각하며 강물에 던지지만 소녀는 끝내 익사하고 맙니다.
이 영화는 끝내 괴물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불타 죽는 것처럼 연출되며 원작의 전반부 내용을 차용합니다. 하지만 후속작 <프랑켄슈타인의 신부>(1935)가 개봉하며 그 뒷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괴물은 불 속에서 살아남았고, 소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접촉한 뒤 상처받고 자신의 짝을 요구합니다. 소설과 달리 헨리가 괴물의 짝을 만들어주지만 그 ‘짝’은 괴물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그를 거부합니다. 그는 결국 헨리와 그의 약혼녀 엘리자베스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자멸하는 길을 택합니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무시무시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그의 안타까운 처지와 모두에게 거부당하는 고독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소설과 달리 스스로 헨리의 삶에서 사라짐으로써 주인공에게 해피엔딩을 안겨주는 역할을 기꺼이 떠맡습니다. 누군가는 이 결말에 안도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그를 안쓰러이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창조한 이를 용서하기,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프랑켄슈타인>(2025)은 이 글에서 소개하는 작품 중 가장 최신작입니다. 2시간 30분의 긴 러닝타임에는 셸리의 소설과 웨일의 영화에서 차용한 설정이 바탕을 이루지만 델 토로가 개작한 부분도 많습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주인공 빅터와 아버지의 관계입니다. 원작 소설의 온화하고 인자한 아버지와 달리 델 토로가 그리는 빅터의 아버지는 무척 엄하고 권위적인 의사입니다. 빅터는 그러한 아버지가 출산 중 사망한 어머니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며 아버지를 뛰어넘고자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는 이 작품의 주요한 주제입니다. 빅터는 아버지를 뛰어넘어 죽음을 정복하고자 괴물을 만들어냈지만, 괴물에게 혐오감과 동질감, 때로는 경쟁자로서의 위협을 느끼며 그를 억압합니다. 델 토로의 괴물은 웨일의 괴물과 달리 연약하고 창백한 피부를 드러낸 벌거벗은 모습입니다. 델 토로는 흉악한 괴물의 겉모습을 걷어내어 그의 내면을 더욱 드러내려 했다고 말합니다(<프랑켄슈타인> 비하인드). 그래서인지 긴 분량의 러닝타임 중 절반 정도는 괴물에게 할당됩니다. 메리 셸리가 괴물 스스로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듯, 델 토로는 빅터와 괴물 모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할 기회를 부여합니다.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고독하고 폭력적이었던 두 사람의 삶을 번갈아 조명합니다. 셸리의 소설도 웨일의 영화도 조금씩 닮은 이 이야기는 가장 독창적인 결말로 향합니다.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빅터는 죽음을 정복하겠다며 생명을 창조했지만, 그 생명체는 자신이 죽지 못한다는 사실을 한탄합니다. 정작 자신은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빅터는 그의 피조물이자 ‘아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괴물 역시 빅터를 용서합니다. 이로써 빅터는 마침내 안식에 듭니다. 죽음, 폭력, 사랑, 용서 등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부자관계라는 하나의 코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기예르모 델 토로 인터뷰).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선택한 적 없이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옵니다. 하지만 특정 시기가 오면 누구든 부모의 품을 벗어나 홀로 세상을 살아나가야 하죠. 그런 점에서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괴물의 이야기는 인간의 보편적인 무언가를 담고 있습니다.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 죽음에 대한 정복, 그런 거창한 이야기를 걷어낸 빅터와 괴물의 이야기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사랑, 용서,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변모합니다.
이 글은 메리 셸리, 제임스 웨일, 기예르모 델 토로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놓은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조명해 보았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 이야기는 많은 관점에서 은유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가와 작품은 서로 얼마나 독립된 존재인 걸까요? 작가의 의도와 달리 작품이 스스로 퍼져나가며 문제가 된다면 작가는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요?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보았을 주제입니다. 이 글을 쓰는 에디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우리는 모두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존재들이란 점에서, 종교적 관점에 따라서는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괴물의 입장에도 충분히 이입할 수 있습니다. 부모, 신, 혹은 나 자신 등 나를 만들어낸 이들이 나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에 홀로 설 수 있을까요?
이젠 진부한 소재임에도 끊임없이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가 소환되는 데에는 이렇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코드들이 숨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가 이토록 끝없이 재생산되는 현상 역시도 원작자를 벗어나 창작물이 홀로 활동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해석하는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이야기는 어떠한가요? 세상의 다양한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들에 다시 한 번 관심을 기울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