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구인지 설명하세요
본질을 정의하라는 요구에 대하여
이번 달 아젠다인 '본질'은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내릴 수도 없었죠. 철학의 시작이자 목표가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고, 아직도 전 세계의 철학자와 이론가들이 이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으니, 수천 년의 철학적 논쟁도 닿지 못한 곳에 제가 닿으려 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오만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몇 세기에 걸쳐 답을 찾으려 하는 걸까요. 스스로 답을 해보다 보니, 어쩌면 본질은 원래 없기 때문에 수많은 노력에도 닿을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존재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becoming)이라고 말합니다. 본질은 어딘가에 완성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계속해서 달라지는 과정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본질이 유동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라면, 본질에 대해 규명하고 정의하라는 요구는 불합리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요구는 자신 혹은 타인을 특정한 정체성 범주 안에 귀속시키고, 그 안에 머물도록 강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죠. 이번 아티클에서는 트랜스젠더 작가 우 창(Wu Tsang)의 작업을 통해, 스스로 정의하라는 본질에의 요구가 어떻게 폭력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나는 우리의 대표자가 아니다
사회의 '주류'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그저 한 개인의 경험과 생각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성 소수자, 트랜스젠더, 이민자 등, 주류 바깥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유독 개인의 목소리가 그 집단 전체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곤 합니다. 이렇게 재현의 부담(burden of representation), 즉 공동체 전체를 대표해야만 한다는 요구를 떠안은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늘 '대표자'로서의 부담을 안고, 종종 더 날카로운 잣대로 평가받습니다.

미국 LA에는 1960년대부터 라틴계, 퀴어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으로 존재해 온 바 'Silver Platter'가 있습니다. 우 창은 이곳에서 트랜스젠더와 이민자들이 모이는 이 공간을 담은 영화 ‘Wildness’를 제작합니다. 특이한 점은, 영화를 이끄는 내레이터가 사람이 아닌 공간 자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제거하고, 주류 사회가 이들에게 지운 재현의 부담을 거부하며 그 누구의 본질적인 경험도 대표하지 않기 위해서였죠.

각기 다른 배경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본질을 해명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주류의 시선이 부과하는 범주 바깥에서 스스로를 부를 새로운 이름을 함께 찾아나섭니다. 트랜스젠더, 이민자라는 범주는 단일한 목소리를 전제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 역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일 뿐이죠. 본질을 설명하고 드러내라는 요구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통해 우 창은 본질을 고정하려는 시도 자체를 무력화합니다.
경계가 없는 모비딕의 바다
우리가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에서, 실제 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몇이나 될까요? 특히 정체성의 측면에서 생각을 해본다면, 세상의 수많은 특정 정체성들은 여러 기준에 따라 우리가 임의로 이름 붙인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성 소수자'라는 명칭도, 성적 지향에서 주류를 특정하고 그 외의 것들을 일컫기 위한 표현인 것처럼요. 그래서 정체성이란, 그저 개개인이 외부의 기준을 자연스럽게 체화한 것이며 그 기준도 특정한 관점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이죠.

우 창은 이 인위적 경계를 해체하기 위해 바다를 택합니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를 긋지 않으며, 어떤 것도 고정된 자리에 붙들어 두지 않습니다. 허먼 멜빌의 1851년 작품 〈모비딕(Moby Dick)〉을 확장현실(XR)로 재구성한 작품 ‘Of Whales’에서, 관람객은 헤드셋을 쓰고 가상의 바닷속을 탐험합니다. 작중 선원이자 화자인 이스마엘과 식인종 부족 출신의 선원인 퀴퀘그는 작품에서 연인으로, 다른 선원들은 인종과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우 창이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수많은 경계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당신이 무엇인지 설명하라고 요구할 때, 그것은 사회가 미리 규정한 '적절한' 범주 안에서 스스로를 설명하라는, 암묵적인 요구이기도 하죠. 200년 된 텍스트 속 고정된 범주를 해체하면서, 우리를 그 경계 안에 귀속시키는 것은 누구이며,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습니다. 그 경계는 결국 사회적·정치적·문화적으로 구성된 허구가 아닐까요?
수행하는 본질
우 창은 혼자 작업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흑인 시인이자 이론가 프레드 모튼과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Miss Communication and Mr:Re’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한 일은 ‘한 명은 시인, 다른 한 명은 퍼포먼스 아티스트’라는 라벨을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명확히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두 작가가 2주 동안 서로 주고받은 음성 메시지가 갤러리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미술일 수도, 문학일 수도, 또는 퍼포먼스나 독백일 수도 있는 이들의 작업은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에게도 본질적인 정체성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 사람은 어떤 작가이고, 이 작품은 어떤 장르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품과 작가를 특정한 범주 안에 고정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는 정체성이란 행위 이전에 존재하는 본질이 아니라, 반복적인 수행(performativity)의 효과로서만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춤추는 사람이 먼저 있고 그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행위가 반복되면서 비로소 '춤추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행 이전에 정체성을 요구하는 것, 즉 당신은 어떤 작가입니까, 이것은 어떤 작품입니까라는 요구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 즉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요구일 수 있습니다. 우 창이 라벨을 지우는 것은 그 요구에 응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본질과 정체에 대해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나요? 어린 시절 장래희망이 뭔지 적어내야 할 때마다 난감했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알아가야 할 시기에 미리 정답을 적어야 할 것만 같았죠. 또 타인의 성격과 성향은 잘 설명할 수 있지만, 나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타인이 만들어 놓은 언어에 의존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라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완성된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본질을 설명하라는 요구는 종종 나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말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형태로 스스로를 재단하고, 그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도록 암묵적으로 요구받습니다.
우 창의 세 작품은 이러한 구조적 강압과 불합리를 가시화합니다. 'Wildness'는 집단의 본질적 목소리를 요구받는 것을, 'Of Whales'는 경계 안에 귀속되도록 강요받는 것을, 'Miss Communication and Mr:Re'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고정되도록 요구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세 작품 모두 스스로를 규명하지 않고, 대표하지 않으며, 귀속되지 않습니다. 불합리한 요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 바깥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실천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