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로 읽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면 어딘가에 완성된 채 숨어 있는 ‘진짜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격이나 역할, 관계가 여과된 자리에 남는 핵심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이 관념을 뒤집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정해진 본질을 품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먼저 세계에 있고 그 이후의 선택과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간다고요. 서로 상대되는 관념을 두고 더 기대게 되는 방향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아티클에서는 실존주의 렌즈를 통해 인간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그가 어떤 시간과 관계를 지나며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살피는 과정이 될텐데요. 그 과정에 진입하는 매개로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이야기해봅니다.
존재 이후 명명된다

아델은 아직 자신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학교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데이트를 해보지만,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어색함이 따라다닙니다. 그러다 길에서 파란색 머리의 엠마를 우연히 스쳐 지나가고, 영화는 어떤 선언보다 먼저 감각의 균열을 포착합니다. 아델은 여전히 자기 욕망을 언어로 붙잡지는 못하지만 기존의 문법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 찰나의 순간은 아델이 어떤 정체성을 ‘깨닫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확신이 아니라 동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 그는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라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알 수 없는 끌림 앞에서 멈칫하고 압도됩니다. 욕망이 먼저 오고, 명명은 나중에 따릅니다. 여기서 아델은 사르트르적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존주의자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될 수 없다면, 우선은 그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로지 그다음에야 그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중략)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제1원칙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이 주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_장 폴 사르트르,『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원래 이런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을 통과하며 자신을 형성해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델은 숨겨진 진실을 간직한 인물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중인 인물인 셈이죠. 영화는 자기 형성 이전의 미세한 진동을 초반부터 놓치지 않습니다.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과정

엠마를 만난 뒤 아델의 삶은 달라집니다. 확인할 수 있는 내면의 진실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동합니다.
엠마는 아델에게 단순한 연인이 아닙니다. 예술과 취향, 지적 대화, 자신이 경험할 수 없었던 세대의 언어와 생활 감각을 대표하는 인물로 다가옵니다. 아델은 엠마의 집 식탁에서,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전시와 그림 등 엠마를 둘러싼 세계 안에서 미묘한 거리감을 느낍니다. 동경과 소외 그 사이 어디쯤에 놓인 아델. 관계가 단지 사랑의 문제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에게는 욕망만이 아니라 계급과 문화의 결이 낳는 차이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엠마와의 사랑은 아델 안에 숨어 있던 무언가를 비춰주는 거울이 아닙니다. 아델은 엠마를 통해 욕망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를 흔들고 바꾸고 재배치하는 사건들과 끊임없이 맞서게 되죠. 다시 말해 사랑은 낭만적인 자기 발견의 드라마가 아닙니다. 타인을 만나면서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과정입니다. 본질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본질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겠네요.

영화의 연출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카메라는 아델과 엠마의 관계를 멀리서 해석하지 않습니다. 얼굴이나 신체를 오래 붙들고, 숨소리나 먹는 방식, 시선과 침묵을 집요하게 포착합니다. 결정적인 장면들은 늘 몸을 경유하고, 몸은 이미 마음보다 먼저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생각 속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행동하고 선택하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기에, 아델의 사랑은 하나의 실천입니다.
계속 나아가야만 하는 이야기

그리고 영화는 관계의 파국을 다루면서 더 나아갑니다. 아델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고, 엠마와의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갈 때 영화는 그것을 단순한 배신의 장면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결과가 삶을 지배합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다는 말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한 선택의 의미를 그대로 떠안아야 한다는 뜻임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정말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책임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인간은 자신의 엄격한 개별성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_장 폴 사르트르,『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아델은 사랑을 원했지만 그 사랑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삶을 정렬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관계의 붕괴로 돌아오고, 붕괴는 곧 아델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가를 드러냅니다. 실존은 낭만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사실이 이로써 가장 차갑게 드러납니다.

결국 영화의 진짜 힘은 사랑이 지나간 뒤를 끝까지 응시하는 데서 나옵니다. 교사가 된 아델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먹고, 걷고, 살아갑니다. 마지막 전시회 장면에서 아델은 엠마와 재회하지만 더 이상 그 세계의 일부가 되지는 못합니다.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랑을 통과한 뒤 아델은 이미 예전의 아델이 아니죠. 잔인하지만 사랑을 선택했던 흔적은 태도, 표정, 걷는 방식, 견디는 방식으로 퇴적되고 아델을 만들어갈 겁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이후 아델의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그는 여전히 흔들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상실을 겪고, 또 사랑하며 조금씩 자기 자신이 되어 가지 않을까요. ‘딱 살아낸 만큼의 본질을 뒤늦게 갖게 되는 존재’임을 온몸으로 말할 겁니다. 완결될 듯 완결되지 않는 형태에 대한 가장 육체적이고 아픈(아름다운) 증언이 이어지겠네요.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닌, 흔들리면서도 자기 삶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일지 모릅니다.
현실의 모든 아델을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