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

시대마다 다르게 정의되는 일의 얼굴들

일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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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해서는 유난히 단정적인 문장이 많습니다. “일은 원래 힘든 거야.” “먹고살기 위해 하는 거지.” “나를 성장시키고 세상에 기여해야 진짜 일이지.” 이상한 점은 이 문장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데도, 꽤 자연스럽게 함께 쓰인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는 일을 버텨야 하는 생존의 문제로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아실현의 도구로 말합니다. 그러다가도 일은 사회와 공동체에 기여하는 윤리적 실천이어야 한다고 말하죠. 설명은 제각각인데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비슷합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진실인 것처럼요.

정말 일에는 하나의 본질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시대와 사회마다, 각자의 처지마다 전혀 다른 것을 ‘일의 본질’이라고 불러온 것은 아닐까요. 어떤 시대에 노동은 신이 내린 형벌이자 의무였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생계의 수단이었고, 성실한 시민의 자격을 증명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일은 종종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프로젝트처럼 여겨집니다.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을 넘어 좋은 사람이 되는 방식처럼요.

하지만 사회가 일의 본질을 설명할 때, 그 말은 정말 일을 설명하는 데서 멈췄을까요. 아니면 일의 본질을 말하는 척하면서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간상을 종용한 건 아닐까요. 성실한 인간, 견디는 인간, 성장하는 인간, 기여하는 인간, 열정을 가진 인간. 그렇게 일에 대한 정의는 종종 노동을 설명하기보다 노동하는 사람을 길들이는 언어에 가까워졌습니다.

이 글은 일의 진짜 본질을 새로 선언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불려온 서로 다른 문장들을 나란히 놓고 그 사이에서 생기는 어긋남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E. F. 슈마허의 『굿 워크』는 인간다운 노동이라는 이상을 말하고, 리처드 세넷의 『장인』은 일을 잘 해내고자 하는 태도와 숙련의 윤리를 비춥니다. 반면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은 오늘날의 많은 일이 이미 의미를 잃고 형식만 남았다고 폭로합니다. 세 권은 같은 질문을 향하지만 같은 대답에 도착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어긋남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일의 본질은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오래도록 하나인 척해온 사회적 필요의 여러 얼굴들일지 모릅니다.


1.인간다운 노동이라는 이상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슈마허의 책을 읽다 보면 일은 단지 소득을 만들어내는 기계적 행위가 다닙니다. 그는 사람이 일을 통해 먹고살 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배워간다고 말합니다. 손을 움직이고 시간을 들여 기술을 익히며, 타인과 연결되어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리를 확인하는 과정. 이런 관점에서 노동은 경제적 기능만 수행하는 활동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삶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육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하지만 사실 많은 경우 사람을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은 교육보다 노동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반복하는 일의 방식이 결국 한 사람의 성격과 감각, 세계를 대하는 태도까지 바꾸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슈마허가 말하는 ‘좋은 일’은 단순히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죽이지 않는 일입니다. 적당한 긴장과 숙련, 책임과 참여를 요구하면서도 내가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는 감각을 남기는 일. 다시 말해 끝난 뒤 피곤할 수는 있어도, 텅 비지는 않는 감각을 남기는 일이 좋은 일에 가깝습니다. 이 관점은 오늘날 유난히 낯설게 들립니다. 우리는 일을 너무 오랫동안 월급과 커리어, 성과와 효율의 언어로만 이해해왔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일이 나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지는 종종 배부른 질문처럼 밀려납니다.

하지만 슈마허의 관점은 동시에 위험을 품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라는 말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누구나 인간다운 노동과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 일터를 원하고, 일을 통해 자기 삶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은 너무 쉽게 또 하나의 규범이 되기도 합니다. 일은 원래 의미 있어야 하고 나를 성장시켜야 하며,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새로운 명령처럼요. 사실 오늘날 누군가는 그저 버티며 일합니다. 선택지가 거의 없는 자리에서 노동하고, 자신의 일에 거창한 의미를 붙일 여유조차 갖지 못합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좋은 일”이라는 이상은 때때로 위로가 아니라 압박이 됩니다. 슈마허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비전이지만, 그것 역시 결국 하나의 이상형이라는 점은 놓치기 어렵습니다. 일의 본질을 설명하는 동시에, 도달하기 어려운 희망을 조용히 떠미는 말이기도 한 셈입니다.


2.장인성이라는 오래된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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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넷의 『장인』은 일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 번 더 비틉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 그 일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가 더 중요해집니다. 장인성이란 단순히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의 재능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그 자체로 잘 해내고자 하는 끈질긴 태도에 가깝습니다. 결과만 빠르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과정 안에서 기술과 감각, 책임과 판단을 함께 연마해가는 자세 말이죠. 이때 일의 본질은 직업의 이름보다 진지함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해내려 하느냐가 더 본질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이 흥미로운 이유는 일을 자아실현의 낭만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장인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일하지 않습니다. 그는 재료의 성질을 배우고 도구의 한계를 온몸으로 익힙니다. 반복 속에서 생겨나는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고 좋은 결과가 우연히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감합니다. 그러니까 장인성은 화려한 성공담보다 훨씬 느리고 고독하고 구체적인 태도입니다. 이때 일의 본질은 ‘나를 얼마나 빛나게 해주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책임 있게 세계와 마주하는가’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장인성 역시 오늘날 너무 쉽게 미화됩니다. 우리는 숙련과 디테일, 오래 축적된 기술을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노동 환경은 점점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효율성이 최우선 기준이 되고 성과는 수치화되며, 일의 흔적은 데이터로 저장됩니다. 일은 무수히 잘게 쪼개지고 사람은 더 쉽게 대체됩니다. 반복을 통해 익숙해질 틈도 없이 다른 업무가 덮치고, 잘 해내는 기쁨을 느끼기 전에 이미 다음 산출물을 요구받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장인성은 멋진 가치이면서 동시에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이 됩니다. 그래서 세넷의 책은 일의 본질을 말하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노동의 조건을 함께 보여줍니다. 장인성은 여전히 설득력 있지만 그것이 가능하던 시간과 구조는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일은 원래 잘 해내는 기쁨이 있는 것”이라는 말 역시 너무 쉽게 일반화된 문장처럼 들립니다. 누군가에겐 진실이지만 누군가에겐 이미 사라진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3.왜 이렇게 많은 일은 텅 비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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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의 『불쉿 잡』은 앞선 두 책이 세워놓은 믿음을 거의 정면으로 흔듭니다. 인간다운 노동, 숙련의 윤리, 일의 의미와 책임. 그런 말들이 아름답고 필요한 것은 맞지만 정작 오늘의 많은 노동은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일에 쓰면서도 자기 일이 왜 존재하는지 설명하기 어려워합니다. 누군가에게 실제로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보다, 이메일을 보내고 회의에 참석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고치는 일을 반복합니다. 바쁘지만 공허하고 피곤하지만 하루가 끝나면 손에 남는 것은 없습니다. 이때 노동자는 단지 일이 많아서 지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시간이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바꾸고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더 깊이 소진됩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건 쓸모없는 일이 개인의 실패가 아닌 구조의 산물이라는 지점입니다. 현대의 많은 조직에서는 필요해서 일이 생기기보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일이 만들어집니다. 위계를 증명하기 위해 관리가 늘어나고 책임을 피하기 위해 문서가 늘어납니다. 무엇보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확인 절차가 늘어납니다. 누군가를 실제로 돕고 만질 수 있는 물건을 생산하거나, 공동체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노동이 점점 늘어나는 셈입니다. 이 상황에서도 사회는 여전히 “일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점점 공허하게 울립니다. 가치 있는 노동을 한다는 감각 없이도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척해야 하고, 의미가 빈약한 노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척해야 합니다. 일의 본질이 사라진 자리를 연기와 형식이 메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 권은 가장 강하게 충돌합니다. 슈마허는 일을 통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생각하고, 세넷은 일을 잘 해내고자 하는 태도 속에서 윤리를 봅니다. 하지만 그레이버는 묻습니다. 애초에 지금 우리의 많은 일이 그런 의미와 숙련을 경험할 수 있는 구조인가. 이 질문 앞에서 앞선 두 책은 단지 낭만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의 고발처럼 읽히죠. 우리가 왜 그렇게 쉽게 “일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지 보여주는 고발 말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어떤 정의가 맞는지 고르는 일이 아니라, 왜 현실과 정의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커졌는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일의 본질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일은 삶을 지탱하는 생계이면서 기술과 태도를 연마하는 수련이고, 공동체를 떠받치는 기여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일은 자신의 시간을 갉아먹는 무의미한 반복일 뿐입니다. 이 설명들은 서로 충돌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적나라게 비춥니다. 그래서 일의 본질을 말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맞느냐보다, 무엇을 너무 쉽게 “원래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지입니다. 본질이라는 말은 진실을 붙잡는 말처럼 보이지만, 종종 하나의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장치로도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일의 본질을 묻는 일은 단순히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를 묻는 데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누가 지금의 일을 진실인 듯 단언하는지, 더 효율적으로 노동을 동원하기 위한 언어인지 재차 물어야 합니다. 본질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진실이라기보다, 종종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앞세운 문장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둘러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은 원래 이런 것”이라는 문장을 시간을 들여 의심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의심에서부터, 지금 내 노동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정확한 언어가 시작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