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조명하는 대학로 연극
무대 위에서 생의 본질을 구도하는 세 작품
혹시 나를 설명하는 단어, 직업, 관계, 역할 같은 수식어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섰을 때, 그곳에 남은 ‘나’는 어떤 모양일지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사실 우리는 일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너무 많은 역할을 한 번에 소화하느라 정작 생의 바닥에 놓인 진짜 얼굴을 잊고 살곤 합니다. 어쩌면 마주할 용기가 없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하우스 등이 꺼지고 캄캄한 무대 위 조명이 켜지면, 잊고 살았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극적인 상황과 촘촘한 대사들이 주변을 둘러싼 화려한 수사를 걷어내고 삶의 진실을 돌아볼 시간임을 알려주기 때문이죠. 이번 아티클에서는 삶의 뼈대를 드러낸 연극 세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 잊었던 ‘나’라는 존재가 질문을 던지는 무대, 그 먹먹한 사유의 시간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나에게로 이르는 길 <헤르츠클란>
2026.04.07~2026.07.21 │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3관 │ 100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목소리에 흔들립니다. 사회의 규율, 타인의 시선, 그리고 쏟아지는 기대, 수군거리는 비난 같은 것들이요. 그런 목소리들은 때론 좋은 일을 하게도 만들어주지만, 자주 나를 검열하게 하고 두려움의 원천이 되곤 합니다.
연극 헤르츠클란 대사 하이라이트 영상
연극 <헤르츠클란>은 그 모든 껍데기를 깨고 나와 진짜 ‘나’를 마주하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각색한 이 작품은 규율이 엄격한 신학교 헤일리히를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수습교사 데미안의 특별활동반에 들어가며 비로소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의 균열을 경험하게 되죠. 무대 위에서 싱클레어가 겪는 혼란과 상처는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진짜 목소리를 듣기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안온한 세계에 머물기 위해 나침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지만, 이 극은 다정하고 또 단호하게 말해줍니다. 내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내 삶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고통 없이 진정한 나를 만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혼자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혼자인 우리 존재에 대한 단단한 위로를 던지는 이 작품은 7월 12일까지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3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세계에 던지는 생에 관한 질문 <렁스>
2026.05.23~2026.08.02 │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 90분
생명의 본질이란 무엇일까요? 이 거대하고도 막막한 질문을 단 두 명의 배우가 쉼 없이 이어가는 대화만으로 풀어내는 작품이 있습니다. 던컨 맥밀란 작가의 연극 <렁스>입니다.
2021년 연극 렁스 스팟 영상
이 작품은 무대부터 굉장히 독특한 인상을 남기는데요. 흔한 소품 하나 없이 오직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핑퐁처럼 오가는 말들이 공간을 꽉 채웁니다. 기후 위기와 인구 과잉으로 병들어가는 지구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과연 ‘좋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올바른 선택일까요? 그들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다투고, 상처받으면서도 결국 서로를 껴안고 삶을 지속해 나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깨닫게 됩니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불완전한 두 존재가 만나 서로의 숨소리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가진 생의 본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오는 5월 23일부터 초연과 재연이 올라왔던 극장을 떠나 새로운 극장에서 관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아울러 배우진도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꾸려졌습니다.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렁스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고독의 끝에서 마주한 타인이라는 우주 <사운드 인사이드>
공연 예정 없음 │ 100분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지독한 고독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갈망하죠.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 속 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17년째 신작을 쓰지 못한 교수 벨라와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 크리스토퍼는 작품을 매개로 대화하며 가까워집니다. 이때 위암 판정을 받고 생의 끝자락에 선 벨라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려 하고, 선택의 과정에서 크리스토퍼에게 감당하기 힘든 부탁을 건넵니다.
2024년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 스팟 영상
극은 소설과 현실,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듭니다. 두 사람은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가장 어둡고 내밀한 욕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요. 누군가에게 나의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고, 상대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행위. 그것이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고독 앞에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는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구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캄캄한 무대 위에서 오직 서로의 목소리에 의지하는 두 사람을 보며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내 안의 소리를 온전히 들어줄 단 한 사람, 당신에게는 있느냐고요.
이 작품은 2020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토니어워즈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2024년 국내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습니다. 지금은 공연 예정이 없지만 곧 다시 좋은 무대에서 좋은 배우들과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단번에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늘 불완전하고 자주 길을 잃으니까요. 하지만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 삶을 멈출 이유가 되지는 않죠. 연극은 그 막막한 질문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우리가 혼자만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위로합니다.
산다는 것이 막막하고 녹록지 않을 때, 극장의 어둠 속에서 타인의 생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요? 조명이 꺼지고 객석을 나설 때, 텅 비어버린 듯한 그 마음의 공간에 당신만의 새로운 질문이 피어나길 바랍니다. 껍데기를 벗고 마주한 당신의 본질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아름다울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