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도 자동화가 되나요?
공감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
요즘 인스타그램에 '콘텐츠 자동화'라는 키워드가 꽤 자주 보입니다. 솔깃합니다. 누군가 보고 듣는 것을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죠. 자동화가 암시하는 가치는 유한한 우리 삶에서 가장 귀중한 자원, '시간'이니까요. 정확히는 '고민하고, 신경 쓰고, 괴로워했던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이죠.
하물며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개인부터 기업까지 SNS 채널 하나쯤은 갖고 있고, 알려져야 살아남는 시대에 콘텐츠 발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알고리즘은 여전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콘텐츠 제작 도구는 더욱 친절해졌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 흐름에 올라탈 수 있어요. 이처럼 콘텐츠 제작에 대한 수요가 넘쳐나는 시대에 '자동화'라는 구원자의 등장이라니. 환영받을 타이밍을 제대로 노렸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콘텐츠 자동화'라는 구원자가 묘하게 불편하게 느껴지신 적은 없나요? 분명 우리의 시간을 줄여주는 고마운 존재인데, 마냥 반갑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문득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오릅니다. 콘텐츠를 만들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콘텐츠에 시간을 쓰는 고객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요.
콘텐츠 소비자가 처한 상황을 회전 초밥집에 비유해 본다면 어떨까요. 부지런히 돌아가는 레일 위로 수많은 접시가 빈틈없이 올라옵니다. 이것저것 먹어보는데 이상하게 다시 먹고 싶은 접시가 별로 없어요. 심지어 '이것도 초밥인가…'싶어 손도 안 댄 요리도 있고, 그럴듯해 보였는데 먹고 보니 상한 요리도 있습니다. 시간을 썼는데 여운이 좋지 않아요. 이제는 접시가 돌아가는 걸 보면 기대감보다는 피로감이 올라옵니다.
이쯤에서 질문해 봅니다. 콘텐츠 제작이 쉬워진 시대, 우리는 ‘어떤’ 콘텐츠를 ‘왜’ 만들고 있을까요. 그리고 '좋은' 콘텐츠의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무엇을, 왜 담는가?'
콘텐츠의 사전적 정의는 ‘매체에 담긴 결과물’입니다. 어원은 라틴어 ‘담겨있는 것(콘텐툼, Contentum)'에서 왔어요. ‘그릇(컨테이너, Container)’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콘텐츠의 본질은 안에 담긴 내용물입니다.

우리가 굳이 그릇에 무언가를 담는 이유는 뭘까요?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군가 보고 느끼게 하려고 콘텐츠를 만듭니다. 결국 봐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이 수많은 콘텐츠도 의미 없어지겠죠.
그래서 필자는 콘텐츠를 이렇게 재정의해보고 싶습니다.
‘의도를 담아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만든 창작물’
이 관점은 두 가지 상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1) 구현될 결과물에 대한 상상
* 의도(意 뜻 + 圖 그림), 마음속의 그림을 완성하고자 하는 뜻
2) 이 창작물을 만나게 될 누군가에 대한 상상
문제는 인공지능 이후 이런 ‘헤아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만드는 콘텐츠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콘텐츠의 양적 성장과 다양성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소비자들은 무분별한 저품질 콘텐츠에 노출되는 일이 많아졌죠.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저품질 콘텐츠를 꼬집는 ‘AI 슬롭(Slop, 오물이라는 의미)’이라는 밈도 등장했습니다.
콘텐츠 제작을 위한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에게는 인간다운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평평한 디지털 화면 속에서 납작하게 수치화된 데이터만 보다 보면,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게 되거든요. 바로 이 화면 너머에 한 명의 구체적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요.
좋은 콘텐츠란 뭘까?

소통의 관점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콘텐츠는 만든 사람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까지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콘텐츠와 좋은 콘텐츠는 엇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달라요.
성공적인 콘텐츠는 어디까지나 만드는 사람의 관점입니다. 조회수, 전환, 매출 같은 성과 지표들이 기준이에요. 만약 품질이 별로여도 일단 시선을 끌고, 발행량을 늘려서 얻고자 하는 목적과 결과를 달성했다면? 그 콘텐츠는 나름대로 성공한 콘텐츠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좋은 콘텐츠는 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가치가 기준입니다. 문제해결, 감정적 연결, 신뢰와 같은 수치화되지 않는 주관적 요소들이 중요하죠. 이 두 관점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하며 공존합니다.
요지는 성공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관점에만 매몰되면, 사람을 ‘고객’이 아니라 ‘타겟’으로만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더 나은 소통을 하려면 보는 이들을 콘텐츠의 ‘고객’으로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콘텐츠와 고객이라는 단어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조합인데요. 고객(顧客)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돌아볼 고(顧)'와 '손님 객(客)' 자를 써서 ‘내가 살피는 손님이자, 나를 돌아봐 주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타겟’이 목적 달성을 위한 일방적인 시선이었다면, ‘고객’은 양방향으로 마음을 쓰고 있는 관계입니다. 인간의 소통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소통과 상상의 관계

사실 이 양방향 소통이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체와 정신 안에 갇힌 존재거든요. 인간이 알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생각과 느낌 뿐입니다. 공감이라는 것도 결국은 내 상상 속에서 그려본 타인의 감정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할지 상상해보며 서로의 마음을 맞춰왔던 것이죠.
반면 인공지능과 대화할 때는 굳이 상대방을 헤아리고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것만 말하면 돼요. 고민상담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귀찮아하거나 지루해 할까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죠.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일방적인 관점에 익숙해진다는 점입니다.
인공지능은 어떻게든 결과물을 생성합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신경쓰지 않으면 맥락이 결여된 채 형식만 갖춘 콘텐츠가 만들어집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아니라 ‘발행’ 그 자체를 위한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거죠.
인공지능은 죄가 없다
그런데 이런 저품질의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게, 정말 인공지능 때문일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인공지능 시대의 콘텐츠 피로감은 창작자의 태도와 역량 문제입니다.
비슷한 논의는 1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 영국에서는 기계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시대가 열리면서 미술공예운동이 일어났어요. 새로 등장한 기계가 결과물의 품질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한 축이었죠. 그 한가운데서 독일공작연맹의 초대 회장 테오도어 피셔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도구와 기계 사이에는 결정적 경계선이 없다. 기계를 다루고 도구화하면 높은 수준의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도구나 기계나 같다. 제품이 조악해지는 것은 기계 때문이 아니라 기계를 정확하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 김정운, 『창조적 시선』 p.207 재인용
기계는 수단일 뿐입니다. 결과물의 수준은 그 수단을 다루는 사람의 몫이에요. 100년이 지나, 기계의 자리에는 인공지능이 들어왔습니다. 인공지능 그 자체는 목적과 의도가 없습니다. ‘AI 슬롭’으로 불리는 콘텐츠들도 그 시작과 발행 뒤에는 인간이 있었을 거예요. ‘딸깍’으로 희화화된 인간의 클릭. 그 안에는 여전히 ‘가치, 책임, 신뢰’라는 인간이 짊어져야 할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크리에이터 인 더 루프(CITL)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 있어서 인공지능의 사용 유무는 더 이상 변수가 아닙니다. 변수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자의 목적과 역량(지식·기술·태도)이 되겠죠.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창작에 대한 각자의 고민과 기준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번 기회에 필자의 콘텐츠 제작 과정을 한번 돌아봤습니다. AI의 학습에 적용되는 휴먼 인 더 루프(Human-in-the-Loop)라는 개념을 창작 과정에 대입해서 크리에이터 인 더 루프(Creator-in-the-Loop)라는 도식으로 만들어봤어요.

먼저 이 도식은 규칙이 아니라 기준입니다.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기준은 판단을 돕기 위한 주관적 가이드라인이에요.
필자는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크게 기획과 제작 단계로 나눴습니다. 먼저 도식에서 짚어볼 부분은 각 다이아몬드의 시작과 끝에 있는 하늘색 띠인데요. 이 지점은 모두 사람의 판단이 중요한 자리입니다. 의도와 방향, 디렉팅과 편집은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분홍색으로 표시된 영역에서 인공지능은 학습과 생성(Generating)을 통해 창작자에게 구체적인 시안들을 보여줄 거예요. 카드 게임의 패가 늘어나듯이 창작자를 위한 선택지를 만들어 줄 겁니다.
만약 같은 인공지능 모델과 툴을 쓴다면, 차이는 각 다이아몬드가 시작하고 수렴하는 하늘색 지점에서 일어날 겁니다. 인공지능의 성능이 올라갈수록 어떤 사람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에 따라 각도의 차이는 더욱 커질 거고요. 디렉터로서 사람의 역량은 앞으로 더욱더 중요해질 거예요.
다이아몬드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더 넓게 바라보면 맥락과 발행이라는 차원이 있습니다. 창작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맥락과 타인과 연결되는 발행, 그 사이에 서 있어요.
소통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
잘 만들기 위해서는 잘 소통해야합니다. 이제는 인간 뿐만 아니라 AI와도 잘 소통해야하는 시대가 됐어요. 생성형AI를 써보고, 바이브코딩을 해보며 필자가 느끼는 건 일종의 작가다움, 감독다움이 필요하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작가들의 상상력, 관찰력, 표현력. 그리고 감독들의 명확함, 집요함, 판단력이 도움이 되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올해 들어서는 서사예술의 창작과 연출에 관련된 책에도 관심이 생겨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 로버트 맥키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같은 책들이요. 인공지능과의 창작에도 배우고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거든요.
얼마 전에는 주디스 웨스턴의 『감독을 위한 영화 연기 연출법』을 재밌게 읽었는데요. 모호한 연기 디렉팅 장면에서 클로드코드에게 막연한 요구를 던져놓는 제 모습이 겹쳐 보여 뜨끔하기도 했어요.
동시에 인공지능과의 소통이 인간의 소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기계에 프롬프트를 쓴다고 생각할 때보다, 유능한 동료와 협업한다고 생각할 때 제 의도를 더 명확하게 전달하게 됐거든요.
앞으로 인공지능은 점점 더 똑똑해질 겁니다. 더 많은 것들을 쉽고 간편하게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도 결과를 미리 그려보고, 받는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의 시간과 마음을 헤아리는 일만큼은 끝까지 만드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더 나은 소통을 위해 상상하는 일은 자동화시키고 싶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