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을 연습하는 북스테이 3곳

모티프원, 완벽한 날들, 모악산의 아침

자립을 연습하는 북스테이 3곳


자립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숲이 떠올랐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풀어지는 듯한, 그 쨍한 연두빛 색감이요. 자립을 흔히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언제나 온전히 쉰 이후에 왔던 것 같습니다.

혼자 설 수 있다는 건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었던가요. 퇴근 후 소파에 누워도 핸드폰을 들고, 주말에도 약속으로 채우고. 배경 소음 없이 온전히 나로 있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단순히 잠을 자러 가는 숙소가 아닌, 책이 있는 공간에서 머물며 혼자만의 시간을 사는 북스테이를 선택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세 공간은, 운영자의 세계관이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곳들입니다. 머무는 동안 자연스럽게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곳들이죠. 그리고 거기서 조용히 시작되는 무언가가, 어쩌면 자립의 첫 챕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소개드릴 세 공간은 예약이 빠르게 마감되는 편이며, 방문 전 미리 확인해두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질문이 밤새 가슴을 두드리는 곳

'모티프원 (motif1)'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38-26

이미지 출처: 모티프원 공식 홈페이지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의 평온한 자락에 자리한 모티프원은 '글로벌 인생학교'라는 별칭을 지닌 유서 깊은 북스테이입니다. 자연 친화적 현대 건축의 공간인 이곳은 건축가 조민석이 설계했습니다. 이웃한 산등성이의 완만한 능선과 동일한 리듬으로 기울어진 옥상 라인은 건물이 마치 땅 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형태를 취합니다. 숲의 생명력이 안으로 이어지도록, 외벽에는 연두색 노출 콘크리트를 채택했습니다. 반 층씩 어긋나게 올라가는 스킵 플로어 구조는 2층 건물 안에서도 이리저리 부딪치며 길을 잃는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이 길 잃음의 행위는 내면의 미로를 탐색하는 감각과 닮아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모티프원 공식 홈페이지


1층 서재 Library 0에는 약 2만 권의 장서가 서가에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이 책들은 단순한 소장품을 넘어 지난 20년간 전 세계 90여 개국, 4만여 명의 예술가와 여행자들이 다녀가며 남겨둔 영감의 기록입니다. 설립자인 이안수씨는 30여 년간 잡지 편집장으로 일하다 중년의 나이에 세계 유랑 길에 올랐고, 길 위에서 평등하게 소통하던 철학을 이곳에 고스란히 심어두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모티프원 공식 홈페이지


보통 잠만 자기 위해 숙소를 찾는 이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을까" 우려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티프원의 진정한 묘미는 그 외로움을 건너게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있습니다. 투숙객들은 이안수 작가가 건네는 묵직한 질문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단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와 같은 질문들이죠. 이 물음 앞에 수 많은 CEO와 창작자들이 사회적 가면을 내려놓고 날것의 자신과 직면하게 됩니다. 낯선 곳에서 만난 타인과 솔직한 대화를 나눈 후 방으로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내면의 깊은 자아와 새로운 연결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이미지 출처: 모티프원 공식 홈페이지


최근에는 설립자의 딸이자 연극 배우인 이나리 호스트가 공간에 젊은 예술적 결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배우로서의 길을 걷는 것에 행복을 느끼며, 동시에 이 곳을 찾는 지친 영혼들을 세심하게 환대합니다. 낯선 공간에 들어가면 예민해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성향의 여행자라 할지라도, 그녀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말씨 앞에서는 이내 긴장이 풀립니다. 투숙객의 취향에 맞춰 근처 카페인 스틸모먼트나 주변 미술관을 조근조근 추천해 주는 목소리에는 편안함이 배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쉼이 간절하던 시기, 필자도 모티프원의 문을 두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몰아치던 일들을 떨쳐내지 못해 '여기서도 업무를 할 수밖에 없다'며 씁쓸함을 내비쳤던 밤이었죠.

이미지 출처: 모티프원 공식 홈페이지


다음 날 아침, 이나리 호스트는 조용히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습니다. 거실로 나오니, 풍경을 보면서 잠시 쉬어가라며 방명록 앞의 의자를 가만히 빼두셨죠. 조용한 배려이자, 오늘만큼은 애써 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무언의 위로였습니다. 현실의 여러 압박감에 짓눌려 있던 터라, 방명록을 펼쳐 들고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이미지 출처: 모티프원 공식 홈페이지


아침에 눈을 뜨자 통창 너머로 펼쳐진 초록빛 풍경, 그 앞에 단정하게 놓인 나무 책상과 책들. 안쪽의 라이브러리가 자아내는 아늑함은 지친 정신을 고스란히 품어주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모티프원 공식 홈페이지


최근 모티프원 옆에는 지난 2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지은 아트스테이 프레농(Prénom)이 문을 열었습니다. 프랑스어로 ‘이름’을 뜻하는 프레농은 관계 속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고유한 나를 마주하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타인의 시선을 끄고 오롯이 내 이름 석 자로 존재하고 싶다면, 프레농의 문을 열어보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이미지 출처: 모티프원 공식 홈페이지


모티프원 역시 그런 질문을 건네는 공간이었죠. 그날 방문 후 남긴 기록입니다.

나를 찾은 곳. 내 미래가 될 곳. 편히 쉬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울컥함이 사장님의 배려를 알게됐을 때 왈칵 쏟아져 나왔습니다
제 인생을 찾은 곳이라고 하면 믿어지실지는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너무 잘 쉬다 갑니다. 풍경이 너무 예쁘고, 편안합니다 _에디터 해지, 방문 후기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더 많은 위로를 누릴 수 있는 곳, 모티프원은 그런 진심이 숨 쉬는 공간입니다.




여백이 빚어낸 나만의 단어를 찾는 곳

'완벽한 날들'

: 강원특별자치도 속초시 동명동 수복로259번길 7

이미지 출처: 완벽한 날들, 트리플 공식 사이트


퓰리처상을 수상한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에서 이름을 가져온 '완벽한 날들'은 강원도 속초시외버스터미널 뒤편, 나지막한 주택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층은 주인장이 공들여 고른 책들이 가득한 독립서점이며, 2층은 소수의 인원만이 오롯이 머무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됩니다. 서가에는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대신 페미니즘, 환경, 소수자 인권 등 동시대의 아픔을 마주하는 도서들이 큐레이션 되어 있습니다. 외면받아온 목소리들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먼저 꽂아두는 서가에서부터 이 공간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이미지 출처: 완벽한 날들, 에어비앤비(Airbnb)


운영자 최세연씨는 이 공간의 본질을 '결핍, 솔직, 여백'이라 정의합니다. 과도하게 세팅된 편리함을 제공하기보다, 비워둔 틈새를 통해 방문객 스스로 내면의 언어를 찾도록 이끕니다. 지역 연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운영자의 세계관은 공간에 곧게 흐르고 있습니다. 은은한 커피 향과 책장 넘기는 소리가 감도는 아늑한 스테이에서, 여행 가방을 풀고 창밖의 속초 골목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이내 말갛게 씻겨 내려갑니다.

이미지 출처: 완벽한 날들, 에어비앤비(Airbnb)


필자는 아직 이 공간을 직접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속초의 푸른 바닷바람이 창틀을 흔드는 고요한 밤, 2층 방의 나무 의자에 앉게 된다면 아주 특별한 다짐을 실행해보고도 싶습니다.

이미지 출처: 완벽한 날들, 에어비앤비(Airbnb)


스마트폰의 전원을 완전히 꺼둔 채, 1층 서가에서 고민하며 고른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차마 꺼내지 못했던 속마음들을 나만의 단어로 연필을 꾹꾹 눌러 일기장에 기록해 보는 일 말입니다. 자립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자신을 단어로 온전히 설명해내는 능력이라면, 이 공간은 그 힘을 연마시켜 주는 완벽한 연습장이 되어줄 것입니다.



가장 맑은 아침은 덜어낸 자리에

'모악산의 아침'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삼천3동 중인2길 25-48

이미지 출처: 모악산의 아침 공식 페이스북


전주 89번 버스 종점에 내려 과수원 길을 여유롭게 산책하듯 걷다 보면, 대나무 숲을 등진 붉은 목조 주택이 얼굴을 내밉니다. 2003년에 완공되어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이곳은 지속 가능한 여행을 실현하는 제로웨이스트 숙소인 '모악산의 아침'입니다.

이미지 출처: 모악산의 아침 공식 페이스북


이곳에서는 당연하게 누리던 TV나 일회용 어메니티, 바비큐 파티는 없습니다.  대신 대나무 숲이 일렁이는 거대한 통창이 있고, 고체 비누와 대나무 화장지, 그리고 전국의 독립서점을 돌며 모아온 책들이 그 자리를 풍요롭게 채우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모악산의 아침 공식 페이스북


이곳은 요즘 트렌디한 창작자들 사이에서 가장 예약하기 어려운 숙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슬로우 리빙에 있습니다. 자극적인 도파민에 지친 서울의 크리에이터들은 이 고요한 집에 모여 자연의 흐름에 감각을 내맡깁니다. 특히 넓은 거실의 통창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평온함을 선사합니다.

이미지 출처: 모악산의 아침 공식 페이스북


호스트 모아는 22살에 어린 시절 살던 가족의 집을 리모델링해 이 숙소를 열었습니다. 숙소를 운영하며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녀는 공간의 규칙을 과감하게 바꿨습니다. TV를 없애고, 일회용 어메니티를 걷어냈습니다. 그 결심이 이 공간의 언어가 되었죠.

이미지 출처: 모악산의 아침 공식 페이스북

저는 환경을 위해, 지구를 위해라는 거창한 말을 쓰지 않아요. 다만 동료들과 함께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환경을 사랑하고, 제 삶이 내일도 모레도 건강하게 굴러가기를 바랄 뿐이에요 _경향신문, 제로웨이스트 숙소란 단어 3년 안에 없어져야 한다 (2022.05.11) '운영자 모아'

이미지 출처: 모악산의 아침 공식 페이스북


그 철학은 숙소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쓰레기 없는 장터 '불모지장(불편한 모험을 지향하는 장터)', 삶의 방식을 직접 실험하는 커뮤니티 '지향집'으로 이어지며, 모아의 이름은 이제 전주 라이프스타일의 한 아이콘이 되었죠. 실제로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후기는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습니다.

이미지 출처: 모악산의 아침 공식 페이스북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80년대 음악을 들으며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말없이 그림을 그리고, 거실 매트 위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요가 동작을 나누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몽글몽글한 기억이 되었다

고 고백합니다. 편리함이라는 지지대를 걷어낸 자리에서 비로소 고개를 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모악산의 아침이 건네는 이 기분 좋은 불편함 속에서, 그동안 무엇에 기대어 살았는지를 조용히 돌아보게 됩니다.




자립은 새로 얻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 앉은 타인과 나누는 밀도 높은 대화, 그것이 잦아든 뒤 들리기 시작하는 내 목소리를 복원해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비로소 혼자 설 수 있게 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익숙한 것들을 두고, 비움의 환경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단하는 것. 집에서의 쉼과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독을 스스로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삶의 주도권을 쥔 존재로 거듭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단은 신기하게도 머리를 싸매던 책상 위나, 익숙한 방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무위의 상태를 허락한 어느 초여름날 오전,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번져왔죠. 소란한 여름을 맞이하기 전, 이 고요한 성소 중 한 곳으로 비움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