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지우면 사람이 보인다

이야기의 본질, 흑백 영화

색을 지우면 사람이 보인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저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관객이라면 누구나 영화로부터 위로와 기쁨, 긴장과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을 얻겠죠. 영화를 통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텐데요. 영화라는 매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기술적인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남는 뼈대는 결국 ‘사람’과 ‘이야기’일 겁니다.

영화사에서 최초의 영화로 꼽는 작품은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의 1895년작 <열차의 도착>입니다. 흑백으로 된 영상 속, 멀리서 열차가 들어오자 플랫폼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분주하게 승차 준비를 합니다.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영상이죠. 그로부터 130년이 흐르면서, 놀라운 속도로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정교한 사운드와 시각효과는 영화를 점점 풍요롭게 만들었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이는 건 영화의 서사일겁니다. 감정이 오롯이 느껴지는 배우의 진실한 눈빛과 인생의 경험을 관통하는 한 줄의 이야기 말이죠. 결국 극장을 나오며 곱씹게 되는 '좋은 영화'란 색채의 잔상보다 영화 속 이야기의 여운, 그리고 각 캐릭터의 온기가 더 길게 이어지는 작품 아닐까요.

이번 아티클에서는 사람이 가장 돋보이는 흑백 영화를 살펴봅니다. 색채와 기술보다 흑과 백의 명암 만으로 깊은 감동을 표현한 영화들이죠. 화려한 색을 걷어내고 인물의 서사와 감정에만 몰입한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영화의 본질을 느껴봅니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카사블랑카>

이미지 출처: 영화 <카사블랑카>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는 소재만으로도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카사블랑카>는 그 원조 격인 영화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모로코의 항구도시 카사블랑카. ‘릭’은 그곳에서 ‘카페 아메리카’를 운영 중입니다. 군인과 경찰, 정치인과 도망자 등 다양한 사람이 드나드는 그의 가게로 어느 날 옛 연인 '일자'가 찾아옵니다. 곁에는 남편 ‘라즐로’가 함께였죠. 과거 연인이었던 릭과 일자는 파리에서 사랑으로 가득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수배 중이던 릭은 일자와 함께 파리를 떠날 계획을 세웠지만, 약속 장소로 일자는 오지 않았고 가슴 아픈 이별을 했죠. 모질게 떠난줄만 알았던 일자가 불쑥 찾아와 추억이 담긴 노래를 청하지만 릭의 마음은 아프기만 합니다. 그리고 운명은 또 다시 그들에게 선택지를 쥐어주죠.

이미지 출처: 영화 <카사블랑카>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화 3위에 오른 <카사블랑카>는 개봉 8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작입니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관객의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드는 이 사랑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는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흑백의 화면에서 두 사람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일자 역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릭을 연기한 험프리 보가트의 얼굴은 그 어떤 색채보다도 화려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죠. 릭과 일자가 단둘이 대화를 하며 쌓인 오해를 풀고 지난 사랑을 이야기할 때, 화면 가득 들어찬 그들의 얼굴에선 묵직한 감정이 뿜어져 나옵니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깊은 눈빛과 미세한 떨림, 특히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일자의 눈을 볼 때면 그들의 애틋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만약 카사블랑카에 색채를 입힌다면 어떨까요. 필자라면 두 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당대의 패션이나 화려한 술집의 흥겨운 분위기 같은 여러 배경 요소에 눈길을 빼앗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흑백이라 더욱 빛나는 사랑 이야기 <카사블랑카>는 기술이 투박하던 시절에도 연인의 사랑과 희생이라는 깊은 감정이 어떻게 우리를 매료시키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입니다.

감독의 유년시절을 응시하는 영화, <로마>

이미지 출처: 영화 <로마>

1970년대 멕시코시티 로마. 어느 중산층 집안의 가정부로 일하는 '클레오'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청소와 빨래, 음식을 하며 집주인인 ‘소피아’ 부부의 생활을 돕고 아이들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내죠. 성실하게 살던 클레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동시에 아이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임신한 여자친구를 떠난 무책임한 남성 때문에 클레오의 삶은 이전보다 조금 더 고단하고, 불안하며 외로워졌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아기를 버렸다고 해서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클레오는 씩씩하게 살아가지만 그 시대는 기댈 곳 없는 여성이 홀로 엄마가 되기엔 모든 시스템과 체계가 불안정하고 격동적이었죠. 클레오와 소피아, 이 여성들은 어떻게든 버텨야했고 가정을 지키며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영화 <로마>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자전적인 영화입니다. 실제 그의 가정부였던 ‘클레오’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그녀의 삶을 담담하게 담아냈습니다. 거창하고 역동적인 사건이 영화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클레오의 이야기는 그녀 자신의 세계에선 그 어떤 사건보다 치열하고 깊은 상처겠지요. 타인에겐 작은 일일지라도 나의 세상에선 커다란 사건이 되는 법이니까요.

흑백의 화면은 그저 관조의 방식으로 클레오의 삶을 바라볼 뿐입니다. 감독은 “1950년대 흑백을 재현하는 게 아닌, 매우 현대적이고 디지털스러운 흑백영화를 찍고 싶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당시 멕시코 사회 전체의 상처를 표현했다는 그의 의도는 흑백 화면과 함께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흑백의 힘이란, 한 명의 인물에게도 존재감과 집중도를 끌어올리고 무게감을 부여하는 것이니까요. <로마>는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이 그 자체로 얼마나 위대한 드라마가 될 수 있는지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진정한 역사의 빛깔, 영화 <자산어보>

이미지 출처: 영화 <자산어보>

영화 <자산어보>는 백성을 위해 물고기와 해양 생물에 관한 도감을 집필하는 ‘정약전’과 비상한 머리를 타고나 글 공부를 하고 싶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출세할 수 없는 청년 어부 ‘창대’가 서로의 스승과 제자가 되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흑산도입니다. 한양에서 멀고 먼 섬으로 유배를 온 실학자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입니다. 그는 흑산도에서 섬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목격하고 사서삼경이 아니라 어류 도감이야말로 백성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물고기를 잘 아는 청년 어부 창대는 꼭 필요한 존재였죠. 창대는 약전에게 어종별 특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보답으로, 그토록 원하던 글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두 남자는 어느새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의지하는 관계가 되어가죠.

이미지 출처: 영화 <자산어보>

<자산어보>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흑백으로 연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흑백은 뭐가 많으면 지저분하고 어지러워 보인다. (중략) 배경과 인물만 남으니 관객들은 인물한테만 집중할 수 있다. 감정들이 격동칠 때는 컬러보다 훨씬 더 가깝게 와닿는다."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에서는 신분과 가치관이 달랐던 두 남자 정약전과 창대가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는 감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또한 색감 대신 ‘질감’에 주목했다는 감독의 의도대로 섬 주민들의 거친 옷감, 물고기의 질감과 촉감이 생생하게 전해지죠. 흑산도 앞바다의 푸른색이나 섬을 뒤덮은 소나무의 초록빛 없이 흑과 백으로만 풍경을 보여주지만 생동감과 활력이 넘치는 섬의 모습은 그대로 관객에게 전해집니다. 흑백이 꼭 엄숙하고 정적이지만은 않고 청량함과 자유로움을 보여주기에도 알맞은 수단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영화죠. 물론 약전과 창대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는 아주 묵직한 감정의 무게를 밀도있게 전달하는 힘이 됩니다.


1초에도 수천수만 개의 색채가 쏟아지는 초고화질의 시대.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덕분에 영상은 더 풍부해지고, 더 섬세해지고 있죠. 이제 색채와 그래픽은 영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의 힘이 더 셀 때가 있습니다. 색채의 시대에서 흑백을 선택하는 감독들의 의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눈빛 하나, 선명한 촉감 하나에 집중했을 때 더 극대화되는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영화가 주는 본질, 이야기와 인물의 감정 자체에 닿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의 온기와 그들이 빚어내는 진솔한 감정이 시대를 넘어서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 안에 변하지 않는 진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