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 나를 영사하는 스크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바깥에서

예술 작품, 나를 영사하는 스크린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The Ten Largest》, No.5, Adulthood

영화관 좋아하시나요?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적어도 마지막 엔딩 신을 보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게 되는데요. 영화에 대한 설명이나 의도보다, 우선 눈앞에 들이닥치는 이미지들을 소화해야 하죠.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작품을 관람할 때는 어떤가요? 저는 미술관에서 작품 설명판 앞에 한참을 서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작품을 보기 전에 텍스트를 먼저 읽고, 이게 왜 중요한 작업인지 이해한 다음에야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제가 본 것이 예술가의 고뇌와 장인정신이 담긴 작품이었는지, 하얀 벽 위의 설명이었는지 말이죠.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시시각각 영사되는 스크린처럼 나를 비추는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작품 감상에 대한 오해를 짚어보고, 관람을 넘어 향유로 나아가는 작품과의 소통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미술관 입구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작품을 제대로 보려면 무엇인가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죠. 하지만 그 준비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대개 네 가지 오해와 마주하게 됩니다. 작가의 의도를 정답처럼 맞혀야 한다는 압박, 배경지식이 없으면 감상할 수 없다는 장벽, 위대한 작품 앞에서는 반드시 숭고한 감동을 느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느끼는 감각은 오독일지 모른다는 자기 검열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작품 앞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이와 전혀 다른 방향에 있습니다. 작품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생각은 오래된 습관일 뿐입니다. 사실 작품은 무언가를 말하는 입이라기보다, 우리를 비추는 거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작품을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에 투영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우리 안에 의식보다 훨씬 넓은 무의식의 층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림 앞에서 이유 없이 울컥하는 감정,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같은 것이 그 흔적이죠. 평소에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이 무의식은 어떤 계기를 만날 때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예술 작품은 바로 그 촉매제가 됩니다. 그림 앞에서 이유 없이 울컥하거나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이 스치는 것은, 작품이라는 스크린 위에 내 안의 감각이 영사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그저 통과해 버렸을 감정과 기억의 결이 작품이라는 스크린 위에 영사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 안에서 흘러가던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무의식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순간

마크 로스코(Mark Rothko), 테이트 모던 《씨그램 벽화》 연작

마크 로스코(Mark Rothko), 테이트 모던 《씨그램 벽화》 연작. (c) Courtesy of Tate Modern

테이트 모던의 로스코 룸은 짙은 회색 빛의 벽을 어두운 적갈색과 검붉은 빛의 거대한 그림이 가득 채웁니다. 조명은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되어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마치 고요한 사원에 들어선 것처럼 발소리를 줄이고, 누군가는 벤치에 오래 앉아 그림을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말없이 한참 동안 한 작품 앞에 멈춰 섭니다.

로스코는 자신이 색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비극, 황홀, 운명과 같은 주제에서 오는 인간의 감정을 그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회화는 어떤 서사도, 형상도, 맥락도 건네지 않죠. 최소한으로 덜어내고 색면만을 남긴 그림에서 역설적으로 작품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이 가장 선명하게 비춰 보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면, 그것은 로스코가 그린 무엇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던 무엇일지도 모릅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테이트 모던 《씨그램 벽화》 연작. Black on Maroon, 1958 (c) Courtesy of Tate Modern

작품이 나를 비춘다는 말은, 작품이 나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화면이 비어 있을수록 그 자리에는 보는 사람의 시간이 들어찹니다. 누군가는 그 앞에서 오래된 슬픔을 마주하고, 누군가는 잊고 있던 어떤 평온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끝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채로 가만히 머물다 돌아섭니다. 같은 그림 앞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팽창된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나

빌 비올라(Bill Viola), 《The Raft》

빌 비올라(Bill Viola), 《The Raft》, 2004 (c) Courtesy of Bill Viola Studio

어두운 무대처럼 보이는 공간 안에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방을 뒤적이고, 어떤 이는 무표정하게 허공을 바라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언뜻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기도 합니다. 돌연, 양쪽에서 거센 물줄기가 쏟아집니다. 사람들은 물길에 휩쓸리고, 쓰러지고, 서로를 붙잡습니다. 물이 그쳤을 때 누군가는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기도 하고, 멍하니 자신의 젖은 몸을 내려다보기도 합니다.

빌 비올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고속 촬영하여 극단적인 슬로모션으로 10분가량 재생합니다. 실제로는 몇 초에 불과했을 순간이 영원처럼 펼쳐지고, 평소라면 포착하지 못했을 엉킴과 뒤섞임이 드러납니다. 제목 《The Raft》는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메두사호의 뗏목》(1818–19)을 참조하고 있지만, 제리코가 그린 인간의 절망과 달리 비올라의 뗏목에서는 결국 모두가 살아남습니다.

빌 비올라(Bill Viola), 《The Raft》, 2004 (c) Courtesy of Bill Viola Studio

늘어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화면 속 인물들 가운데 자신을 발견합니다. 갑작스러운 물길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옵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어떤 소식, 무너져 내리던 어떤 관계, 이유를 알 수 없이 휩쓸리던 어떤 시기. 그때 내게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주었고, 나 역시 누군가를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순간에는 그저 멍하니 젖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기도 했겠죠. 비올라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지나쳤던 시간들을 다시 한 번 통과하게 됩니다.

생의 네 단계를 걸어보기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The Ten Largest》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The Ten Largest》 Museum of Modern Art Stockholm, 2013, Photograph: Åsa Lundén

스웨덴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는 1907년 겨울, 40일에 걸쳐 열 점의 거대한 그림을 그립니다. 이 연작은 인간 생애의 네 단계인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담고 있습니다. 총 열 점의 그림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통과하는 단계를 그만의 고유한 추상적인 형상으로 펼쳐놓습니다. 각 작품은 높이 약 3.2미터, 너비 2.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로, 하나의 그림만 보더라도 압도적이죠. 열 점이 동시에 늘어서 있는 모습은 꼭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의 그림은 추상미술 역사에서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보다 앞서 그려진 것으로 평가받지만, 아프 클린트는 생전에 거의 전시하지 않았고 사후 20년 동안 작품을 공개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세상이 아직 이 그림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은 무엇을 말하려 하기보다, 보는 사람의 생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떠오르도록 합니다. 열 점의 대형 회화는 삶의 장면들을 포착한 열 개의 스크린이고, 그 앞에 선 우리는 각자의 삶을 돌아봅니다.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The Ten Largest》, No.1, Childhood

유년기의 화폭 앞에서 누군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어린 시절의 어떤 오후를 떠올리고, 노년기의 화폭 앞에서 누군가는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미리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같은 그림 앞에 서 있어도 떠오르는 생애는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통과해 온 길을 다시 걷고, 어떤 이는 가까운 사람의 생을 떠올리며, 어떤 이는 오래전에 잊었다고 믿었던 한 시기로 잠시 되돌아갑니다. 아프 클린트가 100여 년 전 겨울에 펼쳐 놓은 열 개의 화폭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새로운 관람객의 생애를 그 위에 영사하며 매번 다른 작품으로 재탄생합니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기억이 서랍 속에 차곡차곡 쌓인 데이터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기억의 원리를 '원뿔 도식'으로 설명하며, 거대한 과거의 기억(원뿔의 바닥)이 현재라는 한 점(원뿔의 꼭짓점)과 맞닿아 송곳처럼 우리를 찌를 때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고 말했습니다. 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찰나의 전율은 바로 그 송곳 끝에서 길어 올린 기억의 마주침입니다.

향유한다는 것은 결국 작품 뒤에 숨은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작품 앞에 선 나의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스크린은 미술관뿐만 아니라 일상의 풍경이나 사건 등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시간과 공간의 결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볼 수 있죠. 그 위에 영사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당신입니다.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면서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작품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일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