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차 편집숍의 헌 집 구할 결심
'서울의 집'으로 돌아온 에이랜드의 두 번째 독립
필자에게 ‘독립’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집’입니다. 고향이나 가족의 품을 떠나 물리적으로 ‘나 혼자 산다’는 해방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간을 채우고 있는 작은 물건 하나까지 모두 내 손을 거쳐 제 위치를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방일지라도 나만의 규칙과 저마다의 이야기가 깃든 집은, ‘나’ 다음으로 나를 가장 잘 아는 짙은 취향의 공간이 됩니다. 즉, 집을 갖는다는 것은 온전한 나로서 자립했음을 뜻합니다.
최근 연희동 구옥에 ‘서울의 집’을 짓고 두 번째 독립을 선언한 브랜드가 있습니다. 20대 초반, 홍대 거리를 서성이다 한 번쯤 들어가 본 적 있을 추억 속 편집샵, ‘에이랜드’가 그 주인공입니다.
더 많은 브랜드를 빽빽하게 밀어 넣고 유행을 전시하는 매장이 아닌, 브랜드가 지닌 고유한 서사가 온전히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공간. 빠르게 소비됐다 잊히는 제품이 아니라, 고객의 일상에 천천히 스며드는 경험을 만드는 것. 이것이 화려한 불빛을 뒤로하고, 에이랜드가 연희동 구옥에 ‘서울의 집’을 지은 이유입니다.
에이랜드 두 번째 페이지, 연희동 구옥이 ‘서울의 집’이 되기까지

에이랜드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필자는 사실 2000년대 초반 명동 에이랜드가 가졌던 상징성이나 그 시절 1세대 편집숍의 분위기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에이랜드의 출발점 역시 제대로 몰랐기에 지인으로부터 처음 연희동 구옥에 ‘에이랜드 두 번째 페이지’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물음표가 먼저 떠올랐죠.

하지만 에이랜드 세컨페이지, ‘서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넓은 마당을 보고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앞으로는 정겨운 녹색 마을버스가 다니고,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기웃거리다가 마당 안으로 자연스럽게 향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특별한 소수만 환영받을 것 같아 괜히 어렵게 느껴지는 편집숍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정겹고 따스한 공간이라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 이 감각을 선물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이 쌓인 연희동 구옥을 택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들었다는 걸 에이랜드의 기록을 보며 알게 됐습니다.
“jeje는 빠른 사람이 아니에요. 뉴욕에서도 트렌드의 중심보다는 브루클린 골목의 작은 갤러리와 오래된 동네 카페를 좋아했죠. 새것보다 시간이 쌓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그녀에게 할머니의 구옥은 완벽한 선물이었습니다.
낡은 마루가 삐걱거리고 오래된 가구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 처음 그 집 문을 열었을 때 jeje는 뜯어고치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 시간의 흔적을 어떻게 지키면서 자신의 취향을 더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한참을 서 있었을 겁니다. 그것이 에이랜드 세컨페이지 연희의 출발점입니다. 할머니의 집이 가진 시간과 친숙함, 그리고 jeje가 가져온 감도와 낯선 브랜드들이 만나는 공간을 우리는 만들고 있습니다.”
-에이랜드 세컨페이지 기록 중-

만난 적 없지만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jeje’를 떠올리면 공간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서울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분 좋은 삐그덕 소리가 날 것 같은 계단과 바닥, 그리고 빈티지한 우드톤의 가구들이 묘한 포근함을 줍니다.


에이랜드 세컨페이지 '시간의 방', 이미지 출처 : 황예지 에디터
매달 한 명의 작가를 소개하며 그의 작품으로 가득 채운 ‘작가의 방’을 시작으로, ‘더북소사이어티’와 함께 운영하는 ‘서재’가 1층에 자리 잡고 있고, 설레는 마음으로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면 매달 하나의 브랜드를 소개하는 ‘브랜드의 방’과 빈티지 액세서리, 오브제를 큐레이션한 ‘시간의 방’이 손님을 맞이합니다. 그리 넓지 않지만 이야기로 가득 찬 각각의 공간으로 들어갈 때마다 ‘이 방에는 또 뭐가 들어 있을까?’ 은근히 기대하게 되죠.
‘서울의 집’ 공간 구석구석을 채우는 국내 독립 브랜드
이곳에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으로 자립한 독립 브랜드들이 저마다의 공간을 담담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중 유독 제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기분 좋은 발견 같았던 브랜드 세 곳을 소개합니다.
- ‘서울의 집’에 어울리는 향기
공간의 공기를 디자인하는 브랜드, <수토메 아포테케리>


이미지 출처 : 황예지 에디터
어느 집이든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향기’입니다. 이 향기 하나 때문에 그 집을 평생 좋은 기억으로 남겨두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떠올리게 되기도 하죠.
에이랜드 세컨페이지의 첫인사는 자연의 향기를 담은 ‘수토메 아포테케리’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1층 공간 정중앙 매대에 자리 잡은 수토메의 향수들이 공간의 공기와 기억을 디자인해 주는데요. 덕분에 이곳이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늑한 주거 공간처럼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 ‘서재’가 있는 옷 집
독립출판물을 위한 프로젝트 공간, <더북소사이어티>


이미지 출처 : 황예지 에디터
브랜드 편집숍을 떠올리면, 공간 한 편에 고요히 자리 잡은 ‘서재’의 존재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떠올려 보면 책, 그리고 나만의 서재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시각 문화와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더북소사이어티’의 서적들은 에이랜드 연희점이 지향하는 '깊이 있는 기록'이 무엇인지를 텍스트로서 증명해 줍니다. 정성껏 큐레이션한 책들은 물론, 다양한 세컨핸드 예술 서적도 함께 꽂혀 있어서 마치 ‘jeje의 서재’를 몰래 구경하는 듯한 재미가 쏠쏠합니다.
- 어디서나 볼 수 없는 브랜드로 채운 방
글자를 예술로 다루는 브랜드, <POT>

타이포그래피와 글자가 가진 시각적 힘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브랜드 POT입니다. 구옥의 방 하나에서 다른 브랜드들과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특유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재미난 브랜드들이 모여 있는 이 방에 들어오면 마치 비밀스러운 작업실에 초대받은 듯한 몰입감이 생깁니다.
사실 저는 지난 겨울, POT의 독특한 타이포와 넉넉한 사이즈에 반해 가방 하나를 구매했었는데요. 한 계절 내내 정말 잘 메고 다녔던 기억이 있어, 개인적인 사심을 듬뿍 담아 꼭 추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두꺼운 책부터 맥북까지, 무거운 짐들을 잔뜩 넣어도 거뜬히 버텨내는 튼튼함이 매력적인 가방이랍니다.
유행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고, 오늘 새로웠던 공간은 내일이면 지루해집니다. 이 속도전 속에서 20년을 버텨온 1세대 편집숍이 선택한 자립의 방식이 '속도를 늦추고 골목 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줍니다.
연희동 구옥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한 에이랜드의 두 번째 페이지는, 자립이란 결국 타인의 시선이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궤적을 깊게 파 내려가는 일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빠르게 소비되는 세상이 피로하다면, 나만의 속도로 단단하게 서 있고 싶은 날이 있다면 연희동 골목 끝 ‘서울의 집’의 초인종을 눌러보는 건 어떨까요. 그곳에는 여전히 청춘의 취향을 가장 먼저 지켜주고 싶어 하는 오래된 친구가, 조금 더 깊어진 모습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