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쳐서 닿은 곳
모든 소음이 멈춘 뒤에야 선명해지는 것
2026년, 코엑스 전시장 한복판은 기묘한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장삼 자락을 휘날리며 EDM 비트에 맞춰 "고통을 이겨내면 극락왕생"이라 외치는 뉴진스님의 해학에 수만 명의 젊은이가 합장한 채 무아지경으로 뛰어놀았죠. 불교박람회가 클럽보다 힙하다는 찬사 속에 펼쳐진 이 풍경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습니다. 경쟁 사회의 피로감에 절은 세대가 던지는, 본질을 향한 몸부림에 가까웠습니다.
이 '회귀'의 징후는 일상 곳곳에서도 포착됩니다. 쑥뜸방이나 사우나에서 자신의 숨소리와 몸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2030 세대가 그러하죠.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멈춤의 시작은 대개 지독한 허무였습니다. 필자 또한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이상적인 나만을 좇으며 현재를 갉아먹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정보의 바다에서 타인과 나를 비교할수록, 지금의 나는 한없이 초라해졌습니다. 허무는 그렇게 짙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떤 예술은 그 허무의 끝에서 예기치 못한 미덕을 건네주기도 합니다. 뮤직비디오 한 편에서, 영화 속 고요한 한 장면에서 우리가 닿은 곳. 그곳에는 오래 잊고 있던 나의 무게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게 할 세 가지 장면을 소개합니다.
(※ 본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ZEN], 제니(JENNIE)

제니가 사랑 노래 대신 선(禪)을 주제로 들고 나왔을 때, 그 선택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건드렸습니다. 선(禪)은, 고요히 앉아 잡념을 내려놓고 본래의 자신을 마주하는 수행입니다. 일렉트로닉팝 멜로디와 강렬한 비주얼을 입구 삼아, 조기석 감독의 초현실주의적 미감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저건 대체 뭘까?' 그녀가 불꽃을 다스리며 마치 관세음보살을 보는 듯한 모습,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 이 압도적인 비주얼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이면의 의미를 사유하게 만드는 입구가 됩니다. 제니는 이 곡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real self)를 대변한다고 말합니다. 메시지는 섬세하고 우아하지만, 표현 방식은 강렬하고 치열하게. 화려한 비주얼 안에 왜 이토록 고요한 철학이 담겨 있는 걸까. 그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화면이 아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조기석 감독은 땅, 물, 불, 바람의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원초적 요소를 통해 장엄한 비주얼을 만들어냅니다. 제니가 착용한 금제 장식은 신라 금관총의 관식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화랑도의 여성 지도자 원화를 연상시킵니다. 팝스타가 아닌 세상을 이끄는 수행자, 지혜보살의 형상으로 제니가 읽히는 순간입니다.

영상 초반, 검은색의 수많은 인물들이 제니를 에워쌉니다. 이들은 타인이 아닙니다. 제니 자신의 번뇌이자 욕망이죠. 반복되는 "Drop it down"은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방하착(放下着)의 선언이나 다름없습니다. 말 그대로 지금 당신이 붙들고 있는 짐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흰 상의와 검은 하의를 입은 그 대비 속에서, 비를 내리는 장면은 내면의 혼란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윽고 그녀는 어두운 '음'과 밝은 '양'을 동시에 품은 채, 어둠 속에서 기어코 빛과 꽃을 피워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검은색 인물들은 올빼미 가면을 쓴 백색의 형상으로 변합니다. 다소 정화되었지만 여전히 몸부림치며 그녀를 시험에 들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영상의 시작부터 제니 곁에는 올빼미가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지혜의 상징이자, 불교에서는 무명의 어둠을 뚫고 광명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 올빼미가 제니에게 날아오는 장면은, 결국 그녀가 참된 자기 이해에 닿았음을 조용히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직후, 오직 제니 자신만이 복제되어 등장합니다. 수없이 많은 나들이 화면을 채우고, 보는 사람은 자연스레 묻게 됩니다. 누가 진짜 그녀일까. 그 물음표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 줄의 가사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는 둘이 될 수 없으니, can't be two of one
이건 단순히 타인의 시선을 거부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두가 각자의 원형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선(禪)에 가닿을수록 모두는 결국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죠. 가장 주체적인 고백이자, 겸손한 깨달음. 이 감각적 탐닉의 끝에서 본질을 향한 수행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즐거운 일입니다.
JENNIE, [ZEN] (official video)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버드맨> (2014)

영화의 원제는 조금 길고 장황합니다. '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이라는 부제가 이미 이 영화의 전부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리건 톰슨은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았던 배우입니다. 지금은 한물 간 왕년의 스타에 불과하지만요. 그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다시 한번 인정받기 위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직접 각색하고 주연까지 맡습니다. 하지만 영화 내내 우리가 목격하는 건 그의 예술을 향한 열망이 아닙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을 예술이라 믿고 싶은 자기기만뿐입니다.
Antonio Sanchez [The Anxious Battle for Sanity], 영화 '버드맨' OST
감독 이냐리투는 영화 전체를 하나의 롱테이크처럼 연출합니다. 카메라는 리건을 쉬게 두지 않고, 관객은 그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무너지는 자아를 실시간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안토니오 산체스의 드럼 사운드트랙은 리건의 심박수처럼 요동치며,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 긴박함은, 쉬지 못하는 우리 삶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극장 분장실 거울에 붙어 있는 메모 하나.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사물은 사물일 뿐, 그것에 대해 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리건은 버드맨이라는 타이틀을 벗어나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역설적으로 비평가의 찬사와 SNS 조회수 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딸 샘이 아버지에게 던지는 말이 참 뼈아픕니다.
아빠는 이 연극을 예술이 아니라 자기 건재함을 알리려고 하는 거잖아. 그리고 트위터도 없는 아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야.
리건이 본질적으로 두려워한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소멸이었습니다.

리건의 내면에 자리한 버드맨의 목소리는 과거의 영광을 향한 갈망이자, 지금의 자신을 끊임없이 옭아매는 족쇄입니다. 그에게 예술은 수단이었고, 목적은 처음부터 인정이었습니다. 사랑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감탄을 받고 싶었던 것이죠.

마침내 무대 위에서 장난감 총 대신 진짜 총을 든 그 순간, 대성공이 찾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대중은 환호합니다. 하지만 병실에서 코에 붕대를 감은 리건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버드맨의 가면을 쓴 모습과 기묘하게 겹칩니다. 그는 가면을 벗은 게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이미지로 다시 봉인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리건이 마지막에 병원 창문 밖으로 사라질 때, 그것이 추락인지 비상인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창밖 아래를 확인한 딸 샘이 천천히 하늘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미소 짓는 그 장면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끝내 닿지 못한 것은, 누군가의 시선 없이도 스스로 충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마저도 타인의 박수를 '자기 본질의 증거'로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니엘 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멈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멈춘 자리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남습니다. 이 영화는 그 질문 하나를 끝까지 붙들고 갑니다. 그것도 가장 시끄럽고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요.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정작 무엇을 보고 있는가. 영화는 그 질문을 멀티버스라는 형식으로 던집니다. 감독 다니엘 콴의 말처럼, "멀티버스 세계관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느낌을 표현하기에 완벽한 은유" 였으니까요.

홍콩 무술 영화에 대한 오마주, <화양연화> 속 슬로우 모션, <라따뚜이>를 너구리로 비튼 라따구리까지. 손가락이 핫도그가 되고, 장난감 눈알로 가득 찬 세계. 이 모든 레퍼런스를 망설임 없이 뒤섞으며 멀티버스를 화면 위에 그대로 구현합니다. 이 압도적인 과잉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답입니다. 넘쳐나는 것들 속에서 정작 보이지 않는 것, 영화는 그것을 묻습니다.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요.

에블린은 이민자 중년 여성입니다. 세탁소, 세금 문제, 능력 없는 남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딸. 그녀의 일상은 이미 충분히 버겁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멀티버스가 열리고, 더 성공한 나, 다른 선택을 한 나, 사랑받는 나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 모든 가능성을 경험한 끝에, 그녀의 딸인 조이, 즉 악마의 형상인 조부 투파키가 먼저 닿은 결론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무한한 가능성이 오히려 허무주의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죠.

반면 남편 웨이먼드의 장난감 눈알은 하찮지만 어디에나 붙여 의미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에블린 곁에서 매번 손을 내밀었지만, 에블린은 삶에 치여 오랫동안 그 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는다면, 내가 친절하게 구는 것도 괜찮지 않아?
이 영화가 허무주의에 맞서 꺼내든 무기는 거창한 철학이 아닙니다. 다정함입니다.

에블린과 딸 조이가 돌멩이로 변해 절벽 위에 나란히 놓이는 순간. 음악도 대사도 없이 오직 자막으로만 이어지는 그 장면에서 조이는 말합니다. "이 우주에서는 그냥 돌이 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야."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누군가의 딸이어야 한다는 무게에서 벗어난 자리. 조이의 돌은 막무가내로 절벽 아래로 굴러갑니다. 하지만 에블린은 거기서도 딸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죠. 무수한 우주를 관통하는 중력처럼, 기어코.

모든 가능성을 손에 쥔 그녀가 마지막에 선택한 건 더 나은 자신도, 화려한 삶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 이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하찮은 우주의 에블린이 딸에게 건네는 말이 영화의 결론입니다.
다른 우주 어디에 있든,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하고 싶어.
허무주의는 모든 걸 알아서 오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를 외면할 때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에블린이 선택한 무기는 다정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모든 걸 이깁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그리고 깊이 지쳐 있습니다. 제니의 [ZEN]이 보여주는 시각적 깨달음, <버드맨>이 드러내는 인정 욕구의 비극, 그리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건네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다정함.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멈춤과 수용을 말합니다. 소음이 멈춘 뒤에야 보이는 것은, 거창한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나, 그리고 내 곁의 사람이었습니다.
악뮤의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은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 같은 노래입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야.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아주 예쁜 돌이 된단다." 세 작품을 지나온 끝에, 필자도 비로소 존재의 무게를 다시 느꼈습니다. 감정과 마음을 쫓아내지 않고 품어낸 자리에 남는 그 단단한 감각.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실존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