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무엇을 허락하는가

사랑과 돌봄의 경계를 따라가는 영화 3선

사랑은 무엇을 허락하는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낯선 타인에게 기꺼이 의존하게 됩니다. 혼자일 때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불안과 결핍이,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는 조금씩 허물어지며 서로의 몫을 나누어 지는 공동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그 의존의 허락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낯선 타인의 상처를 받아들일 용기를 냅니다.

다만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의존의 구도는 늘 대칭적이지 않습니다. 연인을 돌보는 일이 ‘가끔’이 아니라 ‘매일’이 되고, 배려가 생활의 리듬이 되는 순간 관계는 서서히 기울어집니다. 이 글은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연인 관계에서 의존과 돌봄이 비대칭적으로 형성되는 장면들을 조명하며,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의존이 어디까지 수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언제 부담과 권력, 혹은 제도가 만든 배제의 형태로 변해가는지 그 경계를 질문해보고자 합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작은 방의 세계가 바깥을 만날 때

이미지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컷.

츠네오는 새벽길에서 굴러 내려오던 유모차를 붙잡는 우연으로 조제를 만납니다. 조제는 하반신 장애로 휠체어에 앉아 할머니와 집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창문 밖으로 한 번 나가려면 너무 많은 이유가 필요하고, 돌아오려면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조제는 책 속에서 세상을 배웁니다. 문장으로 하늘을, 여백으로 바다를, 아직 가보지 못한 거리의 냄새를 상상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지켜냅니다.

츠네오가 이름을 묻자 조제는 본명이 아니라 ‘조제’라고 답합니다. 자신이 사랑한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빌려 스스로를 소개하는 선택입니다. 바깥이 붙인 규정이 아니라, 안쪽에서 길어 올린 언어로 자신을 세우는 방식이지요. 그렇게 츠네오는 조제의 세계 안으로 들어서고, 조제는 츠네오를 통해 처음으로 ‘함께’ 바깥을 보게 됩니다. 닫힌 수족관 앞에서 멈춰 서던 날, 둘은 유리 너머의 물고기 대신 바다를 향해 방향을 틀고 같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지만 사랑이 생활이 되는 순간, 관계는 현실의 무게를 얻습니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저 애는 불구라서 댁 같은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영화는 그 무게를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생활의 차이로 먼저 보여줍니다. 조제는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밖에 나가 구할 수 없어 ‘누군가 버린 책’을 기다려야 합니다. 반면 츠네오는 헌책방에 들러 너무 쉽게 책을 구해 돌아옵니다. 다정한 마음이었겠지만, 그 장면은 두 사람의 시간이 얼마나 다른 속도로 흐르는지 드러냅니다. 한 사람에게 ‘잠깐의 이동’인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다림으로만 가능한’ 일이 되니까요. 카나에의 “장애를 이용한다”는 비난, 그리고 가족 행사에 조제를 데려가는 일을 끝내 회피하는 츠네오의 침묵은 그 차이를 더 노골적으로 만들며 관계의 리듬을 기울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집니다. 거창한 불화는 없고, 츠네오는 이별의 이유가 단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내가 도망쳤다”고요. 사랑이 식었을 수도, 현실이 무거웠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 도망침은 단순한 비겁함이라기보다, 감당의 한계가 드러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조제는 잠든 츠네오 곁에서 ‘바다’로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이 있을 뿐이지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사랑은 조제에게 외로움을 알게 했지만, 조제는 그 외로움을 핑계로 삶에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외로움을 알게 된 채로도 자기 자리를 살아내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은 사랑의 실패라기보다, 한때 사랑했기에 더 선명해진 세계와 그 세계를 끝까지 함께 살기 어려웠던 두 사람의 조건입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영화가 도주를 단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도망쳐야 했던 마음의 부박함과, 그럼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의 항해를 함께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패배의 감정이 아니라, 한 번 사랑해본 사람만이 알게 되는 세계의 감촉과 그 감촉을 안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입니다. 

담쟁이(2020)

가족의 경계에 선 돌봄

이미지 출처: ‘담쟁이’ 스틸컷.

처음 담쟁이는 예원과 은수가 함께 목욕탕에 가고, 씻고, 길거리를 나란히 걷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자매이거나 나이 차 나는 친구처럼 보일 만큼 자연스럽고 평범한 동행이지요. 그런데 길을 걷던 예원이 무심하게 은수의 손을 잡는 순간, 은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며 주변을 살핍니다. 그 짧은 반사 동작 하나로 관객은 깨닫게 됩니다. 아, 이들은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구나. 예원에게 손잡기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습관이지만, 은수에게는 ‘누가 볼까’ 먼저 계산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손을 꼭 잡은 노부부의 장면이 교차되며, 같은 다정함이 누구에게는 권리처럼 허락되고 누구에게는 숨겨야 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예고합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일상은 곧바로 ‘어느 연인처럼’ 부드러운 생활로 이어집니다. 잠을 깨우고, 아침을 함께 먹고, 서로의 컨디션을 살피고, 별일 없는 하루를 같이 견디는 것. 그러나 은수가 언니와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일상의 바닥에서 갑자기 제도의 문 앞에 세워집니다. 언니는 세상을 떠나고, 은수는 당장 2~3년은 휠체어를 타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예원은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동거인’은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연인의 면회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장 절실해지는 순간, 사랑은 가장 먼저 문밖으로 밀려나는 경험을 합니다. 동시에 언니에게는 딸, 조카 수민이 남아 있고, 수민은 하루아침에 보호자를 잃은 아이가 됩니다.

이미지 출처: ‘담쟁이’ 스틸컷.

평범했던 두 사람의 일상에는 담이 세워지게 됩니다. 혼자서는 화장실에 가는 일조차 어려워진 은수, 그리고 그 은수를 하루아침에 돌보게 된 예원. 예원은 은수의 재활을 돕는 동시에 수민을 챙기며, 셋의 생활을 꾸려봅니다. 수민을 찾느라 애타게 헤맨 끝에 함께 공원을 걷는 장면은, 조금은 특별하고 조금은 다른 풍경이지만, 분명 함께이기에 가능한 ‘가족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가족은 제도 안에서 쉽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은수는 법적 부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민을 입양하는 데 제약을 겪고, 이 현실은 결국 두 사람의 마음을 다른 방향으로 몰아갑니다. 은수는 예원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예원은 “우리는 가족 아니냐, 가족이면 이런 상황에서 누가 버리냐”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은수는 씁쓸하게 반문합니다. “누가 우리를 가족으로 인정하느냐”고요. 결국 영화는 이 모든 상황을 미화하거나,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결말로 매듭짓지 않습니다. 수민은 보육원으로 가게 되고, 은수는 예원에게 편지를 남겨둔 채 혼자 재활시설로 향합니다. 다만, 이별이 모든 것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함께 살았던 시간은 서로의 몸과 기억에 남아 ‘여전히 가족인 방식’으로 잔존합니다.

누군가에게 돌봄은 사랑의 표현이지만, 또 누군가에게 돌봄은 법의 문장 안에서만 허락되는 권리입니다. 이 영화는 그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이와 가족이 될 수 없기에, 보호하고 돌보고 싶어도 그 역할에서 밀려나는 사람들. “정상가족”이라는 기준 바깥에 놓인 이들에게 의존의 균형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조용히 묻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이며, 누가 그 이름을 부여하는가. 그리고 그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는지.

메모리(2023)

기억의 상처와 기억의 공백이 서로를 붙들 때

이미지 출처: ‘Memory’ 스틸컷.

기억 속에 갇혀 살아가는 여자와 기억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만납니다. 실비아는 싱글맘이자 사회복지사로 일합니다. 타인을 돌보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상태는 늘 단단히 잠가둔 채 살아갑니다. 마지못해 참석한 동창회에서 사울을 마주한 뒤, 말없이 오래 머무는 시선과 귀가길까지 이어지는 ‘따라옴’은 실비아에게 곧장 위협으로 읽힙니다. 다음 날 아침, 사울이 실비아의 집 앞에서 비를 맞은 채 밤을 새운 모습으로 발견되면서 실비아는 그를 스토커로 의심합니다.

오해는 더 깊어집니다. 실비아는 공원에서 사울을 붙잡고 추궁하다가,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성폭력의 기억을 끌어올리며 사울을 가해자로까지 몰아세웁니다. ‘지금’보다 ‘그때’의 사건이 현재를 덮치는 순간입니다. 반면 사울은 자신의 기억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르겠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오래된 앨범을 뒤적이며 자신이 누구였는지 확인하려 합니다. 실비아는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현재를 위협으로 분류해야만 버티고, 사울은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기록에 기대야 합니다. 초반의 오해와 추궁은 두 사람의 결핍이 가장 날카롭게 맞부딪히는 지점으로 남습니다.

이후 두 사람의 오해가 풀린 뒤사울의 가족이 실비아에게 낮 동안 사울을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실비아는 망설이다 받아들입니다. 그때부터 둘은 만남을 약속하는 대신 귀가 시간을 맞추고, 길을 확인하고, 헷갈리는 순간을 함께 건너는 법을 배웁니다. 동시에 실비아의 상처가 가족에게 오랫동안 방관되고 덮여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실비아는 가족의 부정과 외면 앞에서 다시 무너집니다. 사울에게도 가족이라는 장벽이 있습니다. ‘보호’라는 명분을 쥔 형 아이작은 관계를 불편해하고, 사울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실비아를 더 노골적으로 떼어놓으려 합니다. 기억의 비대칭은 곧 관계의 비대칭으로 이어지고, 친밀함은 감정만이 아니라 안전과 동의, 책임의 언어로 다시 구성됩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돌봄과 치유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실비아는 사울을 돌보며 오히려 자신의 트라우마를 다른 방식으로 통과합니다. 과거의 장면만 반복되던 기억 사이에, 사울과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장면들’이 끼어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잊어버리지만 실비아는 기억합니다. 대신 그 기억은 실비아를 가두던 과거만이 아니라, 하루의 리듬과 무사히 돌아온 저녁, 서로를 확인하는 말과 침묵으로 채워집니다. 반대로 사울에게 실비아는 공백을 완벽히 메우는 기적이 아니라, 무너지는 순간마다 다시 ‘지금 여기’를 붙들게 해주는 표식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영화 후반, 보호라는 이름으로 관계가 차단되는 순간에도 둘의 관계는 끝이라기보다 ‘다시 선택해야 하는 자리’로 남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었던 의존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관계는 종종 ‘일방적’이라는 말로 정리됩니다. 누가 더 많이 돌보는지, 누가 더 많이 기대는지로 사랑을 계산하려 들지요. 하지만 연인 관계에서의 의존은 돌봄의 양으로만 재단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비대칭이 관계의 전부를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 편의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의존이 어떻게 두 사람의 ‘공동의 것’으로 다시 빚어지는지, 그리고 사랑이 어느 순간부터 감정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함께 통과하는 일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글이 닿고 싶은 결론은 거창한 해답이 아니라, 비대칭 너머에 남아 있는 사랑의 다른 균형입니다. 완벽한 대칭이 아니라 불완전한 오늘을 함께 건너기 위해 서로에게 허락하는 작고 구체적인 것들—그 한 끗의 배려, 시간, 책임, 그리고 마음의 자리 말입니다. 독자에게도 그런 허락이 있었나요, 혹은 누군가에게 그런 허락이 되어본 적이 있나요. 결국 이 영화들이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랑은 무엇을 허락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어디까지 허락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