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원 커피 속에 숨은 40원의 얼굴

커피 리브레 서필훈, 그가 볶아온 20년

4000원 커피 속에 숨은 40원의 얼굴
커피 리브레 명동성당점에서, 이미지 출처 : 필자 본인

“이 커피 한 잔에 40원의 얼굴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습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지불하는 커피 한 잔은 대개 4,000원 안팎이니까요. 그런데 그 검은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찰나, 그 속에서 40원의 얼굴을 발견하는 이가 있습니다. 1년 동안 햇볕과 흙먼지 속에서 그 원두를 길러낸 농부의 얼굴을요. 그는 바로 커피 리브레의 서필훈 대표입니다. 

커피 리브레 서필훈 대표, 이미지 출처 : 리멤버

서필훈씨는 20년 넘게 커피를 볶고 있지만, 스스로를 단순히 ‘커피 파는 사람’이라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본질을 볶아 커피 한 잔에 오롯이 담아내는 이라 말할 뿐이죠. 그의 흥미로운 삶을 들여다보는 가장 빠른 길은 매장에 놓인 원두 이름들을 찬찬히 읽어보는 것입니다. 그가 볶아낸 원두를 음미하는 일은 그의 인생을 정독하는 경험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삶이라는 책장을 한 장씩 넘겨보려 합니다.

마포구 커피리브레 본사에 전시된 커피리브레 로고, 이미지 출처 : 리멤버

Bad Blood : 한 사람의 신념이 브랜드의 첫 블렌드가 되다

원두 bad blood , 이미지 출처 : 리브레 공식 홈페이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어릴 적 꿈은 고고학자였습니다. 무언가를 탐구하여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일에 매료되었던 그는 1995년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군 제대 후 마주한 현실은 달랐습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 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 자유로운 탐구의 꿈은 제도의 언어로 번역되어 버렸거든요. 답답한 현실의 돌파구로 선택한 일식의 세계 또한 정형화된 틀과 엄격한 위계를 강조했기에 자유로운 그에게는 또 다른 제약이 되었습니다. 결국 조리 실기 시험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가 발길을 옮긴 곳은 학교 앞 단골 카페, ‘보헤미안’이었습니다. 

구)보헤미안 커피 하우스 (현 라플루마앤보헤미안) , 이미지 출처 : 테이블링

"그날 마신 커피는 강배전 한 쿠바였는데 유난히 맛있고 신비로운 기운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커피 한 잔이 제 '인생 커피'가 됐습니다.” - 리멤버 인터뷰 (Pro:logue)에서 (2024.9.)

강배전은 원두를 강하게 볶아 묵직한 바디감을 끌어내는 대신, 섬세한 산미와 화사한 향은 열기 속에 녹아져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그날 마신 커피는 달랐습니다. 검은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뒤엉킨 상심과 불확실한 미래가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이가 처음으로 삶의 닻을 내린 순간이었습니다. 며칠 밤을 고민한 끝에 그는 카페 주인을 찾아가 간절히 말했습니다.

"여기서 커피를 배우고 싶습니다. 일하게 해주세요."

1세대 커피 명가 ‘보헤미안’에서 5년간 수련하며 그는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좋은 커피는 결국 좋은 생두에서 시작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원칙이었습니다. 당시는 저렴한 원두를 태우듯 강하게 볶아 납품해도 수익이 보장되는 시절이었기에, 그의 신념은 그저 철없는 고집 정도로 치부되었습니다. 하지만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았고, 2009년 마침내 ‘커피 리브레’의 문을 열었습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동진시장에 처음 문을 연 커피리브레, 이미지 출처: 리멤버 / 커피리브레 제공

그는 첫 시그니처 블렌드에 ‘배드 블러드(Bad Blood)’, 즉 ‘나쁜 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결점을 탄맛으로 가리는 로스팅과 생산자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유통 구조 등, 그가 수련하며 목격해온 업계의 관행들을 정면으로 겨냥한 이름입니다. 오랫동안 홀로 지켜온 신념이 마침내 브랜드의 언어를 얻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습니다.


Gold Mund : 11년 적자가 브랜드의 윤리 강령이 되다

골드문드 컬렉션 원두, 사진 출처 : 리브레 공식 홈페이지

2015년, 서필훈 대표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의 17만 평 규모 커피 농장을 직접 매입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모한 일’이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좋은 생두를 선별하는 안목만 있다면 충분할 뿐, 굳이 농장 경영이라는 번거로운 짐을 짊어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커피 나무는 수확까지 최소 4~5년의 기다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품질의 불확실성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왜 굳이 그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까요?

중남미 산지 위에서 만난 '파란 복면' 의 커피 리브레 , 이미지 출처 : 한경 / 커피 리브레 제공

“커피를 맛으로 즐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맛이 어디서 오는지 묻게 됐습니다. 추출이나 로스팅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생산자가 어떤 생각과 방식으로 커피를 길렀는지가 품질을 좌우하더군요” - 한경 인터뷰에서 (2026.2.)

스페셜티 커피 업게는 흔히 '시드 투 컵(Seed to Cup)'을 강조합니다. 씨앗이 한 잔의 커피로 완성되기까지의 여정을 뜻하지만, 그는 원두 샘플을 커핑하고 구매하는 것만으로 과연 ‘원두'를 논할 자격이 있는지 자문했습니다. 생산자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악수하는 것만으로 그 땅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요. 고뇌 끝에 그는 직접 흙을 밟기로 했습니다. 바리스타가 아닌 농장주의 시선으로, 커피나무 한 그루가 결실을 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판단과 노동, 그리고 날씨와의 협상이 필요한지 몸소 깨닫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티칸 농장주에게 커피 작황을 설명 듣는 서필훈 대표 , 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현장에서 발을 딛고 선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생산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면 품질의 지속성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공정무역이 보장하는 최저가는 농부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일 뿐, 고품질 커피에 대한 정직한 가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정무역가보다 50% 높은 금액을 농부들에게 지불했습니다. 이는 자선이 아니라, 그 커피가 실제 가치에 근거한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니카라과 커피 농장에서의 서필훈 대표, 이미지 출처 : 네이트 뉴스

그곳에서 탄생한 원두가 '골드문트(Goldmund)' 컬렉션입니다. '황금입술'을 뜻하는 독일어로, 리브레가 생두 본연의 개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원두에만 붙이는 이름입니다. 11년 연속 적자라는 가혹한 현실도 그 방향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적자는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40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수업료였으니까요.


Vertigo: 어지러움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 생존 방식

원두 vertigo , 이미지 출처 : 리브레 공식 홈페이지

성공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일본 커피 업계의 거장인 유토 이코이 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광활한 커피 산지의 세계에 발을 들였고, 이후 '커피계의 오스카'라고 불리는 컵 오브 엑설런스(CoE)의 국제 심판관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월드 로스터스 컵 2연패라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우며 성공의 정점에 서자, 그 높이만큼이나 아찔한 유혹들이 뒤따랐습니다. 수많은 투자 제안이 쏟아졌고, 세간은 리브레가 수백 개의 매장을 거느린 거대 프랜차이즈로 도약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사업 확장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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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 오브 엑설런스 (Cup of Excellence, COE) : 1999 년 시작된 세계 최고 권위의 커피 품질 평가 대회로, 커피계의 '오스카상' 또는 '월드컵'으로 불린다. 100 점 만점 중 85 점 이상을 받은 최상위 0.1% 커피만이 COE 타이틀을 획득하며, 인터넷 경매를 통해 고가에 유통된다. 주최는 비영리 기관 ACE(Alliance for Coffee Excellence).

하지만 서필훈 대표는 그 지점에서 멈췄습니다. 현재 리브레는 국내에서 단 4개(의 매장만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커피 리브레 영등포 타임스퀘어점, 이미지 출처 : 리브레 커피 공식 홈페이지
커피 리브레 파란점, 이미지 출처 : 리브레 커피 공식 홈페이지
아직도 저는 좋은 품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게 스페셜티 커피 사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데, 요즘 세상의 기준으로는 참 안일하고 뒤떨어진 생각이죠. 사실 회사 규모를 그다지 키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스페셜티 커피 비즈니스를 하면서 만나는 밸류체인 위의 모두가 우리와 함께 행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리멤버 인터뷰 (Pro:logue)에서 (2024.9.)

그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창업 당시부터 이미 다른 전제를 깔고 시작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리브레의 창업 모토는 ‘우린 아마 잘 안될 거야’였습니다. 자조가 아닙니다. 실패를 기본값으로 설정한 사람은 성공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오히려 본질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자유가 생깁니다. 확장 앞에서 멈출 수 있었던 것도, 투자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자유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커핑하는 서필훈 대표, 이미지 출처 : 톱클래스 조선

외형적 성공보다 내면의 숙련을 향해 걷는 사람은 눈앞의 현기증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서필훈이 20년 동안 매번 불편한 쪽을 고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 걸음의 방향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흔들렸지만 꺾이지 않았던 그 방향은, 이제 네 종류의 원두가 되어 당신의 테이블 위에 놓였습니다.


No Surprise : 한 사람의 고집이 브랜드의 상수가 될 때

원두 no surprise , 이미지 출처 : 리브레 공식 홈페이지

서필훈 대표의 20년은 곧 커피 리브레의 18년이 되었습니다. 한 개인의 본질이 브랜드로 거듭나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신념을 믿고 그 믿음을 묵묵히 증명해온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에게 커피는 단순히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습니다. 불투명한 업계의 관행을 정화하겠다는 선택(Bad Blood)이었고, 숫자의 가치보다 사람의 자리를 우선시하겠다는 약속(Gold Mund)이었으며, 성공의 유혹 앞에서도 끝내 인간의 얼굴을 마주하겠다는 선택(Vertigo)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선택은 없었지만, 그는 매번 같은 방향을 향했습니다. 수익보다는 신뢰를, 확장보다 관계를, 지표보다는 사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리브레의 얼굴 있는 원두들, 이미지 출처 : 한경 / 커피 리브레 제공

이러한 일관성은 결국 ‘No Surprise’라는 이름에 닿습니다. ‘놀라울 것 없다’는 이 담백한 이름은 화려한 반전을 거부하고,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는 품질을 지키겠다는 생산자로서의 고집스러운 약속입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성공의 기준은 요동치지만, 그는 결코 변하지 않는 가치인 ‘순수성’이라는 상수를 지켜냈습니다. 그 뚝심이 브랜드가 되었고, 그 브랜드는 하나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본질이란 수많은 변수 속에서도 나만의 상수를 끝내 지켜내는 일일 것입니다. 당신에게 본질은 무엇입니까.  타협하지 않고 지켜온 무언가, 수익이 아니라 신념으로 내린 선택, 흔들릴지언정 끝내 꺾이지 않았던 당신만의 그 한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지금 손에 쥔 커피 한 잔을 음미하며 한 번쯤 자문해볼 일입니다.

서필훈에게 본질은 No Surprise, 즉 변치 않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낸 그 귀한 상수를 한 잔의 커피로 마십니다.

이미지 출처 : 필자 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