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사라진 제국의 풍경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감이 된, 영화의 배경이 된 동독의 3곳

웨스 앤더슨 감독은 독특한 미장센 스타일로 현대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 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앤더슨 특유의 스타일이 절정에 달한 완성도 높은 영화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팬이라면 이 작품이 이전 영화들과 어떻게 다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로 개인과 가족, 인간관계를 다뤘던 앤더슨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다층적인 서사를 한층 확장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의 작품과 삶에서 영감을 받아, 사라져가는 ‘옛 유럽’에 대한 깊은 향수를 담아냈습니다. 왕조 시대에서 공산주의 시대로 넘어가며 몰락해 가는 유럽의 황금시대를 영화에 고스란히 담아낸 셈입니다. 이런 배경과 정서를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 앤더슨 감독은 유럽 여러 도시에서 영감을 얻고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독일 동쪽에 위치한 괴를리츠(Görlitz), 드레스덴(Dresden), 작센 스위스 국립공원(Nationalpark Sächsische Schweiz)은 영화의 중요한 촬영 배경이 되었는데요. 이 글에서는 영화의 정서를 체감할 수 있는 동독의 이 세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괴를리츠,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

괴를리츠는 독일 최동단, 폴란드 국경과 맞닿은 도시입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 덕분에 중세부터 유럽 동서 무역로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상업이 크게 번성하며 부유한 상인들이 웅장한 석조 건물을 도시 곳곳에 세웠습니다. 특히 19세기 후반 산업화 초기에는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주택, 상점, 공공건물이 대거 지어졌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근 도시들이 폭격으로 초토화된 반면, 괴를리츠는 군사시설이 없어 폭격을 피해 원형 그대로의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건축물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괴를리츠는 유럽 최고의 촬영지 중 하나로 손꼽히며, ‘Görliwood’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수많은 영화인들이 사랑하는 도시입니다.
웨스 앤더슨 감독 또한 이 도시를 촬영지로 선택했는데요. 괴를리츠의 건축물 중 특히 Görlitzer Warenhaus 백화점은 고풍스러운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실내 장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영화 속 가장 중요한 공간인 호텔 내부 세트로 활용되었습니다.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특징인 유선형 곡선과 섬세한 패턴이 이 백화점 곳곳에 살아 있으며, 여기에 아르데코의 기하학적이고 세련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현재 이 공간은 전시 공간으로 일부 활용되고 있지만, 대부분 비어 있어 일반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건물입니다.

백화점 실내 외에도 괴를리츠 시내 거리와 건물들이 영화의 주변 배경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 거리들은 1930~40년대 유럽 도시의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요. 언뜻 보면 죽은 도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동독 시절 개발과 현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구도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상업이 활발했던 중세와 근대를 지나 전쟁으로 도시가 무너지고, 정치적 상황으로 개발이 제한되면서 괴를리츠는 영화 속 역사적 배경과 닮은 운명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옛 유럽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아르누보 등 여러 시대의 건축물이 공존하며, 고요하고 서정적인 도시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드레스덴, 역사와 예술의 도시


드레스덴은 독일 동쪽 작센주에 위치한 도시로, ‘엘베강의 피렌체’라 불리며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역사·예술 유산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럽 여행지로 특히 화려한 역사적 건축물과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곳이죠. 13세기 작센 공국의 수도로 성장한 드레스덴은 중세부터 정치적·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곳에는 권력과 부가 집중되며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이 다수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수많은 건축물과 문화재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독일 통일 이후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현재는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건되어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변호사 코바치가 위협받는 음침한 배경으로 드레스덴이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바로크 건축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화려한 츠빙거 궁전이 중심 무대로 사용됩니다. 현재 츠빙거 궁전은 박물관으로 운영되며 풍부한 예술 작품과 문화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입니다. 곡선과 풍부한 장식이 돋보이는 파사드는 인상적이며, 본래 왕실의 연회와 축제가 열리던 장소였습니다. 궁전뿐 아니라 정원과 분수 또한 이곳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우며, 드레스덴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한편, 영화에는 ‘멘들스(Mendl’s)’라는 가상의 제과점이 등장합니다. 핑크색의 아기자기한 케이크 상자에 담긴 마카롱 케이크는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시각적 요소이자, 이야기 속 중요한 상징이자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멘들스의 영감이 된 곳은 바로 드레스덴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유 가게’라 불리는 'Dresdner Molkerei Gebrüder Pfund'입니다. 1880년대에 설립된 이 유제품 가게는 내부 인테리어가 마이센 지역에서 제작된 자기 타일로 벽 전체가 장식되어 있어 독특하고 마치 박물관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화려한 꽃무늬와 자연을 주제로 한 섬세한 디자인의 타일은 19세기 말 독일 공예와 장식미술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센 스위스 국립공원, 자연이 만들어낸 낭만적인 풍경


작센 스위스 국립공원은 독일 작센주에 위치한 자연보호구역으로, 엘베 강을 따라 이어진 아찔한 절벽과 모래사암 바위가 만들어내는 독특하고 웅장한 풍경이 특징입니다. 독일 내 하이킹과 암벽 등반 애호가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으며, 수많은 명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바스타이브뤼케(Basteibrücke)’입니다. ‘브뤼케’는 독일어로 ‘다리’를 뜻하는데, 원래 목재로 만들어졌던 이 다리는 1851년에 석조 다리로 재건축되었습니다. 바스타이브뤼케는 작센 스위스의 상징적인 구조물이자 역사적인 명소로, 이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광활한 산악과 계곡 풍경은 수많은 문화·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당시 독일 낭만주의 문학은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여겼습니다. 유명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아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작센 스위스에서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한 장면도 촬영되었습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바위와 다리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주인공 제로와 아가사의 결혼식 장면으로, 건축물이 아닌 자연이 영화 속 역사적 배경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곳 절벽과 바위들은 영화의 동화 같은 분위기와 신비로우면서도 낭만적인 ‘옛 유럽’의 정서를 아름답게 전달합니다.
저는 뮌헨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 동쪽에 위치한 튀링겐 주로 이사해 그곳에 거주했습니다. 남쪽의 역사와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에서 살다가 동쪽으로 가니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흔적이 교차하는 곳이었죠. 자연 풍경 역시 비슷하면서도 달랐습니다. 남쪽은 알프스 산맥과 가까워 호수가 많고 따뜻하며 휴양지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반면 동쪽은 모래사암 바위와 절벽이 많고 상대적으로 덜 개발되어 자연경관이 더욱 원초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느낌이지만 각 지역만의 고유한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고 보존되어 독특한 매력을 선사했습니다. 영화 촬영지인 작센 주는 제가 살던 튀링겐 주 바로 옆에 있어 가끔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처럼 황금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동독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들은 고풍스러우면서도 공산주의 시대의 흔적이 묻어나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동유럽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독일만의 특별한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겁니다. 한 나라에 두 체제가 존재했고 전쟁을 겪은 독일이라는 나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감정이 있습니다. 앤더슨 감독 역시 이 동독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황금기를 지나 역사와 정치적 변화 속에서 도시와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오늘날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고민했다고 생각합니다. 옛 유럽의 풍경과 향수를 느끼고 싶다면, 독일 동쪽 작센 주를 여행해보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