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결이 남아 있는 곳에서 맞이하는 특별한 시작

나만의 쉼표가 되어줄 공간 3곳

세월의 결이 남아 있는 곳에서 맞이하는 특별한 시작
온양관광호텔 전경, 이미지 출처: 온양관광호텔

지나간 시간들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눈을 떠보니 새해를 맞이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찜찜한 요즘입니다. 마치 한 쪽에 풀지 못한 숙제들이 이미 잔뜩 쌓여 있는데, 새로운 숙제를 받으러 또 한 걸음 내딛는 기분이 듭니다.

그럴수록 필자는 복잡한 세상의 대척점에 있는, 세월의 흔적이 남은 공간을 찾습니다. 완벽한 정리나 변화를 따르지 않아 오히려 빛나고 가치 있는 곳,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이어나감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곳에 머무는 것 만으로도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싱숭생숭하지만 설렘으로 가득한 연초,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다정해지기 좋은 세 곳을 소개하려 합니다. 직접 머물러야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가득한 이 공간들이 여러분의 겨울에 작은 쉼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맑고 향기로운 부처님의 온기, 성북동 길상사

이미지 출처: 길상사

'서울에서 겨울과 가장 잘 어울리는 동네'를 단 한 곳 고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성북동이 떠오릅니다. 그 이유에는 언젠가 성북동 언덕을 오르다 우연히 도착한 사찰, '길상사'가 있습니다. 길상사가 자리한 성북동 꼭대기 일대는 과거 시인 백석과 연인 자야가 살던 집터이자, 이후 법정 스님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머물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이 층층이 쌓여 지금의 고요함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이 사찰을 더욱 깊고 특별하게 느끼게 합니다.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맑고 향기롭게’, 길상사의 정신이 담긴 명패를 보는 순간, 한 해 동안 구겨지고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듯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서울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자리 덕분인지 경내를 걷다 보니 도심을 잠시 벗어난 듯한 여유가 생기고, 누군가를 미워했던 마음도,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던 순간들도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듭니다.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비워내고 싶은 날이라면 성북동 길상사에서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마음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경험이 조용히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서두르지 않는 저녁의 아름다움, 라칸티나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필자는 한동안 서울의 옛 정취를 찾아다니는 데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1967년 개업해 ‘한국 최초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소개되는 을지로의 '라칸티나'를 발견했고, 망설임 없이 예약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전화로 예약을 하는 아날로그 시스템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지하로 내려가면 펼쳐지는 벽돌 인테리어부터 백발의 서버분들이 양복을 입고 자부심 넘치게 일하는 모습, 반듯하게 코팅된 메뉴판, 무겁고 진지하게 생긴 식기들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온 모든 요소들이 완벽히 어우러져 왠지 모를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해장국처럼 편안한 양파수프와 기교 없이 기본에 충실한 파스타처럼, 이곳은 화려함보다 ‘제 역할을 다하는 것’에서 오는 특별함을 보여줍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따뜻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소중한 사람과 한 끼 식사를 하며, 시공간을 건너는 듯한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전성기 시절 삼성가 임원들이 즐겨 찾았다는 ‘삼성 세트’가 메뉴판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두세요.)


50년을 견딘 호텔의 단단한 밤, 온양관광호텔 

온양관광호텔전경, 이미지 출처: 온양관광호텔

어느 추운 겨울 떠나게 된 아산 여행. 추위에 떨며 떠돌다 보니 자연스레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온천과 침대를 찾게 되었고, 고민 없이 온양을 대표하면서도 필자의 취향에 완벽히 부합하는 호텔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온양관광호텔입구, 이미지 출처: 온양관광호텔

1966년 개관 이후 50년 넘게 충남 아산을 대표해온 ‘온양관광호텔’에 도착하면, 먼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예고하는 듯한 웅장한 기와문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한 때 결혼식과 신혼여행의 성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범상치 않은 문을 통과하며 누구보다 설레고 벅찼을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집니다.

온양관광호텔복도,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온양관광호텔객실,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이미지 출처: 에디터 황예지

고전 영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 레드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객실 문을 열면 정성스레 관리된 침구와 함께 연식이 느껴지지만 믿음직스러운 목재 가구가 투숙객을 맞이하고, 1,300년간 끊임없이 이어져 온 온천수가 여행의 피로를 풀어줍니다.

‘호텔’은 365일 24시간 내내 움직이며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든다는 점에서 언제나 특별합니다. 한때는 사치스럽고 낯선 공간이라 느껴 선뜻 찾지 않았지만, 온양관광호텔과 같이 지역의 오래된 호텔들에 머물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호텔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긴 시간 자리를 지켜온 직원들의 노련함과 단단한 가구들이 주는 안정감은 새로 지은 호텔에서 느끼기 어려운 편안함을 줍니다.

대전 유성호텔과 남산 힐튼처럼 한 시대를 상징했던 호텔들이 문을 닫으며 사라져 가는 지금,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몇 안 되는 호텔이라는 사실이 온양관광호텔을 더욱 소중하게 만듭니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지금, 미처 털어내지 못한 고민이나 걱정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온양 온천에 녹여 보내며 낯설지만 편안한 혼자만의 밤을 보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효율과 새로운 자극에 익숙한 시대지만, 때로는 어떤 지식도 기술도 필요 없이 내 속도로 머물 수 있는 공간 하나가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이야기를 쌓아온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지나온 과거를 응원해주는 존재가 되어주고,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정해지는 법을 배웁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그런 편안함 속에 작은 설렘을 안겨줄, 쉼표 같은 공간이 하나쯤 떠오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