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를 넘어선 올해의 음악 리스트
반복되는 객관성의 함정을 벗어나
새해가 다가오면 우리는 습관처럼 ‘올해의 OO’을 검색합니다. 매년 연말, 연초에는 각종 시상식부터 플랫폼, 매거진, 개인에 이르는 리스트가 공개되는데요. 일 년간의 작품과 인물, 상품 등을 정리하고 순위매긴 리스트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담고 있죠. 특히 음악 애호가들에게 ‘결산 리스트’는 지난 한 해의 청취 경험을 돌아보고, 새로운 작품과 인물을 발견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됩니다. 그러나 모든 리스트가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법인데요. 대다수의 시상식은 매번 ‘받을만 하다’라고 일찍이 인정 받은 작품과 인물을 조명합니다. 통계 자료와 전문가의 의견을 그러모은 리스트는 특색 없는 보편적 선택으로 가득하고요. 수많은 매체가 언급하는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악인’은 객관적으로 좋을 지언정, 나의 취향을 뾰족하게 건드리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리스트에 ‘객관성’과 ‘보편성’을 요구합니다. 과연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선택만이 좋은 판단을 만드는 걸까요? 또는 모두를 만족시킬 작품만이 ‘올해의 음악’ 리스트에 오를 수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객관과 보편의 방식이 아닌, 편견과 취향으로 독자 여러분의 취향을 충족할 음악 리스트를 소개합니다.
관점과 전략이 뒤섞인 매거진의 리스트

‘리스트’라는 형식은 문자를 기반으로 한 매체에서 그 매력을 크게 발산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영상과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매체가 늘어나며, 텍스트로 그 이유를 설명하는 매체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요. 지금까지도 작은 규모의 독립 매거진들이 다수 존재하지만, 그들의 콘텐츠는 과거보다 큰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니아들이 매거진의 리스트를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죠. 오히려 매체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각 매체마다 고유한 관점과 개성을 드러내는 시도가 늘고 있기 때문인데요. 오늘날 다양한 매거진이 선보이는 리스트는 거대 규모의 시상식이나 언론의 ‘객관성’, ‘보편성’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전략적인 선택과 판단’으로 제시하곤 합니다.

롤링스톤(Rolling Stone), NME 등 거대한 자본을 등에 업은 매거진에 비해, 독립적인 매거진으로 출발한 피치포크(Pitchfork)의 사례가 대표적이죠. 피치포크는 각종 리뷰와 칼럼, 리스트에서 독특한 관점을 선보여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힙스터의 매거진’으로 불리던 피치포크가 2015년 거대 미디어 그룹 콘데 나스트에 인수된 뒤 많은 잡음에 둘러싸이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여전히 피치포크는 매년 전략적인 판단으로 독자들을 놀래키는 리스트를 선보입니다. 올해 9월 게재한 ‘역사상 최고의 랩 앨범 100선’에서 그 예시를 살필 수 있는데요. 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한 쥬베닐(Juvenile)의 <400 Degreez>는 다른 매거진의 리스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선택이었죠. 이는 오늘날 힙합 씬에 커다란 변화를 촉발한 남부 힙합의 분기점으로서 음반을 사후적으로 주목한 이유로 갈무리됩니다. 특히 담당 필자가 작성한 첫 문장인 “<400 Degreez> 이전의 힙합과 이후의 힙합은 다르다”는 단호한 말투는 그 전략적 선택을 고스란히 드러내죠.

전략적 판단을 바탕으로 작성한 매거진의 리스트는 일종의 쾌감을 제시하죠. 우리가 뻔히 보는 ‘명작선’이 아닌, 시대 흐름과 역사적 사건을 새로운 맥락에서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동반하기 때문인데요. 최근 매거진 중에는 독창적인 선택뿐 아니라, ‘리스트’라는 형식을 너른 범위로 펼쳐내는 사례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힙합 씬의 독보적인 매거진 XXL에서는 매년 돋보이는 신예를 모아 ‘XXL Freshmen’ 리스트를 제공합니다. 나아가 리스트에 선정된 랩퍼들의 싸이퍼 프리스타일 영상을 선보여 시장에 새바람을 불어넣죠. 일렉트로닉 음악 씬에 큰 영향을 끼치는 RA(Residntal Advisor)는 ‘올해의 음반’, ‘올해의 노래’에 더해 ‘올해의 믹스’와 같이 장르 씬에 최적화된 리스트를 선보이기도 하고요. 이처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선정들, 또는 ‘우리에게 적합한’ 주제를 고르는 일은 거대 시상식이 아닌 매거진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선정에 대한 명료하고 적절한 설명을 덧붙인 리스트를 발견한다면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켄드릭 라마, 맥 밀러 등이 선정된 2011년 XXL Freshmen 싸이퍼 영상
피치포크 | '역사상 최고의 랩 앨범' 리스트 바로가기
RA | '2025년 최고의 앨범, 레코드, 믹스' 리스트 바로가기
마니아들의 성지, 플랫폼과 커뮤니티

과거의 매거진은 오늘날 온라인 플랫폼과 커뮤니티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제는 빌보드 차트만큼 스포티파이가 제공하는 차트와 플레이리스트가 큰 영향력을 지니죠. 롤링 스톤에서 좋은 평점을 받는 것보다는 RYM(Rate Your Music) 등 유력 커뮤니티 유저들의 선택을 받는 작품이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만나기도 하고요. 하지만 대다수의 플랫폼은 큰 규모와 데이터라는 함정에 빠져 지극히 보편적인 리스트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24년 공개된 애플뮤직의 ‘역사상 최고의 음반 100선’인데요. 훌륭한 큐레이션, 적극적인 음악가들과의 협업 등 음악에 ‘진심’인 애플뮤직의 리스트가 공개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주목했죠. 그러나 정작 공개된 리스트는 우리가 지금까지 수백 번은 더 봤을 만한 평범한 ‘명작선’에 가까웠습니다. 또, 매년 연말 각각의 플랫폼이 공개하는 ‘통계 기반’의 리스트는 한 해의 흐름을 데이터로 정리하는 데 그치곤 하고요.

그러나, 플랫폼과 커뮤니티에서도 독특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애플뮤직, 스포티파이 등 거대 플랫폼의 반대급부로서, 인디 음악 씬을 품고 음악가를 지원하는 밴드캠프(Bandcamp)가 대표적이죠. 무료 스트리밍과 유료 음원 소장, 아티스트 우선적 수수료 등 기존 음원 서비스와 다른 기조의 플랫폼으로, 인디펜던트 아티스트와 리스너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는데요. 라디오헤드(Radiohead), 시가렛 애프터 섹스(Cigarettes After Sex) 등 대중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들 역시 이 같은 기조에 동참해 밴드캠프에 작업물을 올리고 있죠. 이처럼 수많은 인디 아티스트를 품은 밴드캠프는 플랫폼에 올라온 작품을 기반으로 자체적인 리스트를 공개합니다. 이 리스트들이 놀라운 점은, 매년 수십 건의 리스트가 게재된다는 점인데요. 보편적인 ‘올해의 음반’, ‘올해의 노래’부터 ‘재즈’, ‘힙합’, ‘컨트리’, ‘라틴 음악’ 등 기본적인 장르는 당연하고, ‘필드 레코딩’, ‘앰비언트’, ‘클럽 음악’ 등 세부적인 장르를 주목하는 리스트까지 그 개수가 늘어납니다.

특히 밴드캠프의 리스트는 그들이 같은 주제로 매달 공개하는 ‘월별 리스트’에서 이어지는데요. 다양한 인디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플랫폼답게, 쏟아지듯 공개하는 리스트로 사용자들이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견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 그 의의가 있죠. 그리고 인터넷에서 인디 아티스트와 그들의 훌륭한 음악을 찾는 데에는 단연 ‘커뮤니티’가 제격입니다. 앞서 언급한 RYM이나 All Music 같은 커뮤니티에서는 수많은 유저가 자신만의 별점과 코멘트를 남기곤 하는데요. 수백, 수천 개의 점수가 쌓여 하나의 거대한 리스트를 만들기도 하고, 개별 유저가 남긴 훌륭한 리스트와 리뷰를 메인 페이지에 전시하기도 하죠. 음악 애호가와 힙스터들의 통계로 구성된 올해의 음반은 분명 대중적인 기준과는 간극이 크지만,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인 리스트로 탄생합니다. 그렇게 형성된 리스트를 감상하며 올 한 해 마니아들이 지닌 관점을 톺아볼 수도 있고요. 여전히 온라인 세상에서는 거대한 자본과 규모를 지닌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독립 플랫폼과 애호가들의 놀이터는 분명 색다른 감각과 관점을 보여줄 겁니다.
애플뮤직 | '역사상 최고의 앨범 100선' 리스트 바로가기
밴드캠프 | '2025년 최고의 앨범' 리스트 바로가기
취향과 편견으로 가득한 개인의 매력

매거진이 전문가의 전략적인 판단을 담지하고, 플랫폼이 방대한 데이터와 넓은 카테고리를 바탕으로 다양성을 띠는 것과 달리, 커뮤니티는 개개인의 사용자들의 선택이 모인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총합이 모여 만들어진 리스트가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리스트는 또 어떨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전문가 의견이나 통계, 데이터를 통해 구축된 리스트가 아닌, 한 사람이 만든 리스트는 아주 편파적이고 주관적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무엇보다 매력적인 리스트로 다가오죠. 유명한 비평가와 리뷰어부터 블로그, 소셜 미디어에 게재하는 개인의 리스트는 작성자의 독특한 취향과 선택으로 가득합니다.
앤서니 판타노 '2024 최고의 음반 50선' | 동영상 출처: 유튜브 theneedledrop 채널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음악 덕후’라는 문구로 자신을 소개하는 앤서니 판타노(Anthony Fantano), 활동명 ‘니들드롭(theneedledrop)’이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텐데요. 그는 비평계에서 보기 드문 ‘유튜브 영상’을 기반으로 한 비평 활동으로 주목받았죠. 하지만 그에 앞서, 판타노는 소개 문구가 적절하게 느껴질 만큼 아주 짧은 간격으로 영상을 게재합니다. 또, 모든 영상은 그의 심층적인 분석과 독창적인 의견이 더해진 리뷰로 가득하죠. 앤서니 판타노 역시 매년 ‘최고의 음반/노래’ 리스트를 영상으로 공개하는데요. 그의 리스트에는 당연하게도 그의 취향과 주관적 판단이 깊이 개입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은 오히려 그의 리스트를 단지 ‘뻔한 리스트’도, 혹은 그저 ‘힙스터들의 관점을 대표하는 리스트’도 아닌,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자신만의 리스트’로 만들어내죠. 특히 '최고의 작품'에 더해 '최악의 작품'을 선정하고 이를 침튀기며 설명하는 판타노의 모습은 큰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영국의 유명 음악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의 아들 키어런-프레스 레이놀즈(Kieran-Press Reynolds)입니다. 이들 부자는 가업을 잇는 양 나란히 음악 비평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아버지 레이놀즈가 독특한 시각으로 1990년대 영국과 미국의 음악을 진단했듯, 아들 레이놀즈 역시 오늘날 음악 시장의 경향을 아주 신선한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가 공개한 ‘2024년 최고의 노래’ 리스트를 보고 저는 경탄을 금치 못했는데요. 여느 매거진과 커뮤니티에서도 마주한 적 없는 아티스트와 작품의 존재는 둘째치고, 그의 리스트를 가득 채운 1분짜리 사운드 클라우드 음악들의 존재 때문이죠. 이는 키어런이 주요하게 포착하는 현재의 음악 경향, 곧 ‘인터넷’을 기반으로 상호작용하는 음악가와 작품의 중요성을 반증하는데요. 리스트와 함께 음악을 감상한 뒤, 저는 이들이 한 해를 대표할만큼 ‘가장 훌륭한 음악’이라고 말은 못 할지언정, 키어런의 관점을 고려했을 때 이들이 한 해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키어런-프레스 레이놀즈 | '2024년 최고의 노래 15선' 리스트 바로가기

연말이 찾아오며, 수많은 사람이 ‘스포티파이 랩’이나 ‘애플 뮤직 리와인드’와 같이 일 년간 나의 플랫폼 사용 경향을 분석한 콘텐츠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내가 지나보낸 한 해’를 정리하기 위해서만 리스트를 소비하지 않죠. 분명 우리에게는 ‘보편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설명하는 리스트도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내가 모르던 작품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과 취향을 ‘공유’하며, 다 함께 음악에 대한 ‘의견과 감상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는데요. 수많은 언론과 시상식이 반복해서 언급하는 ‘올해의 노래’도 물론 좋지만, 누군가의 집요한 취향이 묻어나는 리스트에 담긴 낯선 트랙이 내 마음을 더 깊이 꿰뚫을 때가 있죠. 편향적이고 주관적일지언정, 우리는 리스트를 통해 타인의 세계를 엿보고, 그 안에서 내 취향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연말에는 남들이 다 아는 정답지가 아닌, 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큼 평범한 선택을 벗어나 보는 건 어떨까요? 오히려, 누군가 정성스레 빚어낸 ‘오답 노트’와 ‘일기장’을 훔쳐보듯, 불친절하고 낯선 리스트에서 나의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내년을 함께 꾸며갈 ‘인생 음악’을 찾는 일의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