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그 사이의 시간

쇼팽, 카밀로 슈만, 코른골트로 다시 듣는 사이의 시간

우리는 음악에서도, 삶에서도 언제나 시작과 끝을 더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데뷔와 성취, 실패와 성공, 입장과 퇴장만이 서사로 남고, 그사이에서 반복되고 지속되는 시간은 쉽게 요약됩니다. 이 구조는 클래식 음악의 협주곡과 교향곡 악장 배치와도 닮아 있습니다. 1악장이 시작의 에너지를 맡고, 피날레가 결말의 인상을 책임진다면, 그 사이에 놓인 2악장은 가장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도 가장 적게 되새김되는 구간으로 남아왔습니다. 서사를 진전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긴장을 폭발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시간은 늘 ‘과정’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왔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가장 많은 변화와 조정이 일어나는 시점은 언제나 서사의 중간입니다. 겉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보이지만, 방향이 바뀌고 감정의 온도가 변하는 시간. 음악의 2악장은 바로 그런 시간의 구조를 닮아있습니다. 이번 큐레이션은 그동안‘중간 과정’으로만 통과해왔던 2악장을 하나의 독립된 감정 공간으로 불러내려는 시도입니다. 

소개될 세 개의 2악장은 모두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언어, 다른 방식으로 ‘사이의 시간’을 설계합니다.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1악장이 만들어낸 거대한 서사 뒤편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음악의 심장을 뛰게 만듭니다.

고백 이전의 2악장

Frédéric Chopin: Piano Concerto No. 2 in F Minor, Op. 21 - II. Larghetto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은 화려한 데뷔의 한가운데 숨어 있는, 가장 사적인 감정의 시간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과 달리 실제로는 쇼팽이 처음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스무 살 무렵의 그가 자신의 이름과 연주를 동시에 증명하고자 쓴 작품입니다. 빠르고 거칠게 몰아치는 1악장, 폴란드 민속 춤의 리듬을 품은 3악장은 마치 많은 관객 앞에서 “내가 바로 쇼팽이다”라고 외치는 듯한기세를 품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젊은 작곡가의 에너지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순간들입니다. 하지만 이 뜨거운 표정들 사이에 놓인 2악장 Larghetto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납니다. A♭장조의 느린 선율로 시작되는 이 악장에서 쇼팽은 달리지도,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혼자서 속삭이듯, 조용한 음성으로 노래합니다.

이 악장은 흔히 쇼팽이 마음에 품고 있던 소프라노 콘스탄차 그와트코프스카를 떠올리며 쓴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음악은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 고백을 하기 바로 직전,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마음속에서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쳐 쓰는 시간에더 가깝습니다. 이 2악장에서 인상적인 점은 음악이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선율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되돌아오고, 감정은 폭발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머뭅니다. 그래서 이 Larghetto는 서사를 밀어붙이기보다 오히려 시간을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합니다.

어느 날 밤,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남아 있을 때, 이 2악장만 따로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그 순간 이 음악은 화려한 협주곡의 일부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감정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단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기록 바깥에 남은 한 사람의 2악장

Camillo Schumann: Cello Sonata no.1 in g minor, op.59 - II. Andante Cantabile ed Espressivo

우리가 음악회에서 반복해서 만나는 작곡가들의 이름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카밀로 슈만’이라는 이름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습니다. 로베르트 슈만과 같은 성을 가졌지만, 그는 이 흐름의 중심에 서지 못한 작곡가입니다. 카밀로 슈만은 1872년 독일에서 태어나 20세기 초까지 활동하며 실내악과 오르간 곡을 꾸준히 남겼습니다. 첼로 소나타 1번 g단조 Op.59는 1905년 무렵 완성된 작품으로, 세 악장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소나타입니다. 그러나 이 곡은 오늘날 연주회 무대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놓인 위치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소나타의 2악장 Andante는 곡 전체에서 가장 감정이 전면에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첼로는 감정을 강조하듯 호소하지 않고, 말하듯 낮은 호흡으로 선율을 이어가고, 피아노는 그 흐름을 조용히 받쳐 줍니다. 이 2악장이 들려주는 것은 성공한 인물의 빛나는 순간도, 비극적인 실패의 장면도 아닙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한 개인의 시간이, 설명 없이 조용히 흐르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이 2악장은 음악사의 중심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제자리를 찾는 음악처럼 들립니다.

영화에서 건너온 2악장

Erich Wolfgang Korngold: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II. Romanze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은 원래 영화 속 장면에서 태어나 콘서트홀로 옮겨진 음악입니다. 이 Romanze의 주제는 1938년 영화 〈Anthony Adverse〉의 사랑 장면을 위해 쓰인 멜로디였습니다. 이후 코른골트는 이 선율을 협주곡 2악장으로 옮겨 와, 영화 속 감정의 시간을 무대 위로 이주시킵니다. 그래서 이 협주곡의 2악장은 형식부터가 다릅니다. 전통적인 협주곡의 느린 악장처럼 추상적인 서정보다, 이미 한 번 ‘장면’으로 기능했던 음악답게 감정의 표정이 분명합니다. 선율은 상황을 설명하듯 또렷하고, 흐름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 음악의 성격은 코른골트의 인생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빈에서 신동으로 출발해 할리우드에서 영화 음악가로 전성기를 맞았고, 전쟁으로 인해 망명의 시간을 겪은 뒤 순수 음악으로의 복귀를 시도합니다. 순수 음악과 영화 음악 사이를 오가야 했던 그의 삶이, 이 2악장의 출처와 형식에 그대로 겹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Romanze가 품고 있는 시간은 단순한 ‘느림’이 아닙니다. 망명, 산업, 전쟁 이후의 불안이 함께 포개진 시간입니다. 앞뒤 악장을 내려놓고 이 2악장만 따로 들어보시면, 이 음악은 협주곡의 한 부분을 넘어, 한 시대를 건너온 감정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음악에서도, 삶에서도 여전히 시작과 끝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살펴본 세 개의 2악장은 모두,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시간 속에서 감정과 방향이 이미 바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쇼팽의 2악장은 말해지기 전의 마음을, 카밀로 슈만의 2악장은 기록되지 않은 개인의 시간을, 코른골트의 2악장은 한 시대를 건너온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이 큐레이션은 2악장을 더 이상‘중간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히 머무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으로 다시 듣자는 제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