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균형을 실험하는 방법
지속가능한 예술을 위한 실천의 가능성

예전의 뇌과학과 심리학 이론에서는 ‘마음’을 고정적이고 내재된 것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환경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우세하다고 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전염병과 전쟁 같은 거시적 사건부터 일상의 사소한 루틴 변화까지, 우리는 다양한 환경 변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신념과 가치가 흔들리거나, 내면의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기존의 태도를 고수하려는 마음과 변화에 적응하려는 마음이 충돌하는 순간들 입니다.
예술계 역시 오랫동안 영리와 비 영리, 전통과 현대, 실험과 제도, 중심과 주변 등 상반된 가치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겪어왔습니다. 많은 예술공간이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며 그것을 정체성으로 삼았고, 이는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본래 이분법을 넘어서고, 저항하는 영역 아닐까요? 예술이 우리 삶을 대변하고 더 나은 가치를 제시하고자 한다면, 단일한 정체성에 머무르기 보다는 경계의 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지속 가능한 예술’을 위해 어떤 균형 감각이 필요 할까요? 상반된 가치가 완벽히 균형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실천은 또 다른 실천의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바로 이러한 균형을 실험하며, 지속 가능한 예술을 위한 실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예술계의 딜레마, 영리와 비영리
‘영리와 비영리’는 오랫동안 예술계의 딜레마였습니다. 미술대학 학생들 사이에서는 ‘아트페어 작가가 될 것인가, 비엔날레 작가가 될 것인가’가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판매를 염두에 둔 작업과 예술적 실험 사이에서 방향을 정하는 일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대한 질문이죠.
특히 팬데믹 이후, 전시 만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 하면서 많은 예술공간과 작가들은 자립적인 구조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관람객과 컬렉터에게 접근하고, 소규모 아트 페어를 통해 유통의 문턱을 낮춤으로써 실험적 성격이 강해 제도권 진입이 어려웠던 작품들이 판매될 수 있는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그 결과, 미술시장은 다양성을 얻었고, 비영리 공간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영리와 비영리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 하며 공존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관계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올해 10월 프리즈 런던에 참가하는 실린더는 이미 아트부산, 키아프, 아트 바젤 등 다양한 아트 페어에 꾸준히 참여해왔으며, 동시에 실험적인 전시도 지속적으로 기획해오며 일상적인 소비 미감과 거리가 먼 난해하고 기괴한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아트페어에서는 더 많은 관람객과 컬렉터에게 노출되고, 이를 통해 작가의 존재와 예술적 지향을 설득하는 접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금 실험적인 작업의 판매로 이어질 수 있을 수 있겠죠. 이러한 선순환 구조는 실린더와 같은 예술 공간이 수익을 위해 예술성을 타협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실천을 지속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즉 영리와 비 영리의 균형은 상업적 논리를 일부 수용하되, 그 안에서 예술적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기획의 밀도를 조정할 때 가능합니다. 실린더의 실천이 시장과 예술의 긴장 속에서 독립성과 생존 가능성을 동시에 모색하는 과정인 것 처럼요. ‘예술가는 돈을 밝히면 안 된다’는 말은 이제 옛말입니다. 안정적인 수익 구조야말로 오히려 예술가가 더 깊고 자유로운 실험을 이어나갈 수 있는 최고의 동기부여 아닐까요?
단절된 세대와 미감의 균형
시장의 논리와 예술적 실천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시도가 있었다면, 이제 그 균형은 세대 간 미감의 차이와 전통의 재 해석이라는 층위로 확장됩니다. 예술계에서 ‘세대’는 종종 단절의 논리로 작동해왔습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소위 ‘-이즘’이라고 하는 사조나 단색화 1세대처럼 세대를 명확히 구분하고 그에 맞는 미감과 태도를 요구하는 경향은 세대 간의 소통을 가로막고, 예술이 지닐 수 있는 다양성을 위축 시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기억과 감각을 지닌 작가들이 상호작용할 때, 예술 담론의 지평은 훨씬 넓어질 수 있습니다.
2005년 쌈지 스페이스에서 열린 ‘된장과 케첩’은 20세기 아방가르드를 선도한 이건용 선생과 유머와 풍자로 제도를 비판하는 젊은 작가 고승욱의 타이틀 매치전입니다. 원로 작가와 청년 작가와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서로의 작업을 패러디하는 기획이었죠. 이 기획에서의 초점은 승패 여부가 아니라 세대의 공존입니다. 각 세대를 은유하는 된장, 케첩이 묻은 서로를 껴안는 두 예술가의 퍼포먼스가 직접적으로 세대 간 공존을 시각화 합니다. 대화와 몸짓을 통해 두 작가 사이 시차를 매우고 세대간 구분을 넘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타이틀 매치전 '된장과 케첩', 이미지 출처: 퍼블릭 아트
가나 아트는 전위 예술 1세대 김구림과 민중 미술 1세대를 대표하는 강광, 그리고 94년생의 슬로베니아 출신 작가 이브겐 코피 고리섹(Evgen Copi Gorisek), 그리고 90년대생 이소연 작가를 하나의 전시 흐름 속에 재배치합니다. 단순히 세대를 병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의 전통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도록 유도합니다. 또한 일민 미술관의 ‘IMA Picks 2021’ 에서는 이은새, 홍승혜, 윤석남, 각기 다른 세대를 살아온 3명의 여성 작가를 초대합니다. 여성 예술가라는 공통점을 가진 세 명의 작가의 시선을 통해 서로 다른 시대의 감각이 어떻게 교차 하는지 를 보여줍니다. 상이한 시대정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유하는 공통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소통하기 위한 실마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획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로 작가를 섭외하고 세대를 아우르는 기획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은 제도권 기관에서 만 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기관이야말로 단순한 유명세를 넘어서, 예술 생태계의 균형과 진보를 위한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여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감각과 담론이 만나는 지점
앞서 살펴본 세대 간의 균형이 서로 다른 시대를 관통하는 감각과 태도의 연결을 시도했다면, 이번에는 예술의 실천과 담론, 다시 말해 전시와 연구 사이의 균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예술계에서 ‘전시’와 ‘연구’는 종종 분리된 역할로 이해됩니다. 전시는 시각적 경험과 감각을 중심에 두고, 연구는 이론적 해석과 담론의 생산에 초점을 맞추죠. 그러나 이 두 영역이 단절된 채 작동할 때, 예술은 그 본연의 총체성과 맥락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 감각과 사유가 상호보완적일 때, 예술은 보다 깊고 지속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서울의 복합문화공간 ‘시청각’은 이러한 분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전시, 리서치, 출판을 함께 운영하며, 예술을 감상의 대상으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담론의 장으로 확장합니다. 특히 《계간 시청각》은 하나의 전시를 둘러싼 사회적, 이론적 맥락을 책으로 구성함으로써, 관객이 예술을 둘러싼 다층적인 맥락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전시장에서 함께 열리는 아티스트 토크와 비평 강연, 영상 스크리닝 등은 시각적 경험을 지적 사유로 전환하는 통로가 되었고, 이는 예술이 단지 오브제가 아닌 질문과 사유를 유도하는 지적 실천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대안공간 루프는 전시를 중심으로 퍼포먼스, 강연, 워크숍, 독립 출판 등을 병행하며 실천과 담론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넘나듭니다. 이들은 예술을 제도와 실험, 개인과 공공, 감상과 비평이 만나는 지점으로 조정하고자 하며, 전시와 연구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구조를 지속적으로 시도해왔습니다. 이러한 기획은 관객으로 하여금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예술적 질문에 응답하는 능동적 참여자가 되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실천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전시와 연구를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기획 역량, 이를 안정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 그리고 예술을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질문과 사유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관람객의 관심이 함께 맞물려야 합니다. 실천과 담론의 균형은 결국 공간과 제도, 그리고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작업이며, 이 균형을 꾸준히 유지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예술은 그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더욱 확장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술공간들이 분절된 세계를 다시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단순한 미적 선택이나 정답이 아니라, 예술이 어떻게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더 많은 이들과 의미 있게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들이 실천하는 균형은 완벽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불안정한 경계 위에 머무르며 감각을 조율하려는 태도에 있죠. 상업성과 실험성, 전통과 혁신, 전시와 연구 사이에서 이들은 흐릿한 접면을 만들어내고, 그 틈에서 새로운 감각과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우리 또한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균형을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속도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느림을 선택할 수 있을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책임 사이에서, 혹은 자기 확신과 타인의 관점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균형을 조율해야 하죠. 하지만 예술 공간의 실천 사례가 보여주듯, 균형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가치들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과 감각,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일이죠. 무엇을 선택하느냐보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떻게 함께 머물 수 있을지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균형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삶을 지속해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균형의 감각을 품고 있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