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속 연대의 얼굴 키스 해링과 공공의 언어

거리와 벽에서 태어난 연대의 언어 키스 해링의 손이 만든 공공의 풍경

낙서 속 연대의 얼굴 키스 해링과 공공의 언어

화합은 늘 '합의'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려는 마음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름을 외면하지 않고, 어긋남을 견디며, 각자의 선을 지닌 채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키스 해링은 선으로 그려냈죠. 연대로 그려진 선은 복잡한 기법도, 현학적인 상징도 없지만, 질문을 품고 감정을 건넵니다. 이해 받지 못한 이들, 침묵을 강요 당한 이들, 사랑을 숨겨야 했던 이들의 언어를 해링은 대신 그려냅니다. 낙서처럼 보였지만 그의 선은 말이 되고 말보다 더 짙은 감정을 품어냅니다. 단절된 존재들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연대의 선을 통해 말이죠.

지금, 우리는 그의 그림을 다시 들여다 보려 합니다. <Radiant Baby>, <Crack is Wack>, <Ignorance = Fear>, <Untitled (We the Youth)>, 그 선들 안에,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화합의 풍경이 있습니다. 완벽한 통일이 아니라, 다름을 안고서 함께 있으려는 노력의 선을요.


거리에서 피어난 언어- 'Radiant Baby'와 공공의 탄생

지하철 역 작품을 그리는 키스 해링, 출처: 키스 해링 재

1980년, 뉴욕의 지하철 역 광고가 제거된 검은 틈 사이로, 어느 날부터 선 하나가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둥근 머리, 활짝 펼친 팔다리, 아기처럼 단순하고 명랑한 형상. 이름 없는 낙서처럼 보였던 그림은 이내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빛나는 아기' 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계층에 닿지 못한다면 예술은 아무것도 아니다."

키스 해링은 지하철 역의 빈 공간을 '누구나 볼 수 있는 미술관'이라 여겼습니다. 그림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누구에게 전하느냐' 였습니다. 해링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그의 그림은 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언어를 넘는 형상, 배경과 지식의 격차를 지우는 문법, 이해보다 먼저 감각되는 정서를 담아냅니다.

키스 해링, Radiant Baby(빛나는 아기), 1990

<Radiant Baby> 속 아기는 단지 생명의 기호가 아닌, 공공의 탄생, 그리고 공존의 가능성을 품은 이미지였죠. 순수에 대한 기억이면서도, 세상에 존재할 자격이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찬사였습니다. 그는 미술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예술이 먼저 거리로 나가야 한다고 믿었고, 그가 그려낸 선은 고립을 말하지 않습니다. 말보다 빠르게 도달하는 선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고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시각적 문법을 완성해냈습니다. 늘 말보다 더 정확하게 사랑을 전해내면서요.

몸과 도시, 저항의 풍경- 'Crack is Wack'과 공동체 분노

<Crack is wack>작품 앞의 키스 해링, 출처: NYC Department of Parks and Recreation

해링은 개인의 분노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모두가 알고도 침묵했던 도시의 통증, 그리고 더 늦기 전에 꺼내야 했던 공동의 목소리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 뉴욕은 크랙 코카인 중독이 확산되며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할렘을 비롯한 빈곤 지역에서는 가난이 마약으로 변했고, 많은 청년들이 사라졌으나, 언론도 정부도 이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해링은 그 침묵 위에 선을 그었습니다.

<Crack is wack>작품 앞의 키스 해링, 출처: haring.com

단순한 문구와 형상으로 구성된 벽화, 그러나 그 앞에서 사람들은 멈춰 섭니다. 허가 없이 그려진 벽화 속, 온 몸을 비틀고 절규하는 형상들, 부풀어오른 눈과 입, 무너져 가는 도시와 'CRACK IS WACK'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림은 해링의 단순한 경고를 넘어 공감의 손짓이었습니다. 마약 사용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닌, 사회 구조 속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아픔에 먼저 반응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번역해 보여주었습니다.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사회의 병든 구조를 먼저 바라봤던 시선 안에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애정이 있었습니다. 공공을 향한 외침이자 연대의 선언인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슬로건보다 먼저 사람의 얼굴을, 손을, 눈을 그려냅니다. 함께 살아야 할 도시에서, 함께 아파야 할 사람들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키스 해링, Crack is Wack, 1986

해링에게 예술은 언제나 구조의 언어였고, 타인을 향한 연대였습니다. 그는 벽 위에 분노를 그리되, 그 분노마저 사람을 껴안는 방식으로 전달했습니다. 정부는 그림을 지우고, 그를 체포했지만 사람들을 그 벽화를 기억합니다. 다시 복원된 그림은 오늘날 까지도 말보다 더 정확한 사랑의 언어로 남아 있습니다. 그림 앞에 멈춰 선 이들은 결국 모두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지금, 누구와 함께 이 도시를 살고 있는가?"

사랑, 두려움, 그리고 이름- 'Ignorance=Fear'의 손짓 언어

정확한 정보보다 소문이 빠르게 퍼졌고, 낙인이 먼저 도착하는 시대에서 해링은 낙인보다도 '말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하여 그려냈습니다. 1980년대 에이즈 위기는 죽음보다 침묵이 더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감염인은 '부도덕하다'는 이름 아래 차별당했고, 병은 혐오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해링은 자신도 에이즈에 걸린 몸으로 살아가며, 사랑했던 친구들을 하나둘 떠나보냈지만, 절망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다시 침묵 속에서 대화를 꺼냅니다.

"내가 세상에 할 수 있는 기여는 그릴 수 있다는 능력이다. 그림은 선사시대 이래로 본질적으로 같다. 그것은 인간과 세상을 연결하며, 마법처럼 살아 숨 쉰다."
키스 해링, 무지=공포(Ignorance=Fear), 1989

"Ignorance = Fear, Silence = Death"는 해링이 온몸으로 쓴 문장이었죠. 그 안에는 입을 막은 사람들, 눈을 감은 사람들, 귀를 틀어 막은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이 말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대신 절규합니다. 형상들은 해링의 방식으로 만든 사회의 초상이었습니다. 감염인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은 시대에서, 그는 침묵이 결국 '죽음'이라고 그려냅니다. 그러나 그 문장은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습니다. 친구들을 위해, 거리의 연인들을 위해, 외로이 죽어간 이들을 위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연대의 방법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공포의 초상인 동시에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한 시각적 선언이었죠.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지를 넘어, 우리는 무엇을 더 알 수 있을까?", "두려움 속에서도, 어떻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그림은 단지 감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감정 너머의 관계를 제안하고 있었습니다. 해링에게 연대는 이해가 아닌 행동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행동은, 아주 작은 몸짓에서 시작되었죠.

함께 그린 세계-'We the Youth'와 화합의 벽화

작품 'We the Youth'를 그리는 키스 해링, 출처: haring.com

해링은 벽을 그리되,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그려냈습니다. <Untitled (We the Youth)>는 1987년, 해링이 생전 남긴 마지막 공공 벽화 중 하나입니다. 필라델피아의 한 거리에서 아이들과 그린 그림에는 형형색깔의 색깔, 웃는 얼굴, 반복되는 리듬이 담겨있습니다.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그 벽에는 우리가 함께한다는 감정이 새겨져 있습니다. 벽화 속 인물들은 성별도, 인종도, 나이도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습니다.

키스 해링, Untitled(We the Youth), 1987

그 장면은 어쩌면 유토피아적 상상이라기 보다, 함께 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해링에게 화합이란 이상이나 합의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한 채 존재할 수 있는 연습이었습니다. 그림은 말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말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차별이나 혐오, 분노와 편견이 담지지 않은 풍경들, 오직 함께 있는 사람들의 색과 손짓들. 그림은 선명하게 존재하되, 강요하지 않습니다.

해링은 '공공'을 단지 다수가 존재하는 장소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공공은, 우리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있음에도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공간이었죠. 벽은 쉬운 시각 언어로 채워졌고, 그 언어가 담고 있는 문법은 더 깊은 연대를 불러왔습니다. 그렇게 해링은 예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키스 해링은 단 한 번도 "우리는 같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이렇게 그렸습니다.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선으로, 그림으로, 몸짓으로 그의 예술은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림 안에 설 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소외된 이들에게 먼저 다가갔고, 이해 받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그렸고,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함께 웃고 춤추는 장면을 상상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써 내려갔던 화합은, 어쩌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도,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그저 서로에게 다가가고, 말을 걸고, 대답을 기다리는 일. 해링은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라 믿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가 남긴 선 위를 걷고 있습니다, 걷는다는 것, 그건 어쩌면 우리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겠죠. 우리는 지금도 매일 새로운 벽 앞에 섭니다. 그 벽이 분열이 아니라 화합의 배경이 되길 바란다면, 해링이 남긴 선처럼 용기 있는 손길로 또 다른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