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관계 속 상처를 그린 세 편의 뮤지컬 추천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블랙메리포핀스, 인터뷰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종 공연 예술을 시간 예술이라 부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근래 온라인 중계, 영화관 상영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완성하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단 한 번의 순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극장으로 향합니다. 비대면이 낯설지 않은 시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일이죠.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창작진과 관객들이 서로의 시간에 기대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니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낭만적으로 와닿기도 합니다. 같은 창작진이 같은 배우들로 매일 공연을 올려도 항상 다르게 느껴지는 건, 수많은 이들의 시간이 겹쳐지는 그 찰나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서로에게 기대는 일이 언제나 이렇게 빛나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서로’는 흉터가 남을 만큼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삶을 종말로 이끌기도 합니다. 오늘 만나볼 세 편의 뮤지컬은 모두 그런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지만, 존재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주인공들. 지금부터 그들을 무대 위로 불러보겠습니다.
현실과 허상의 틈새로,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2025.12.10.(수)~2026.03.08.(일) │ 링크아트센터 페이코홀 │ 150분(인터미션 포함)
스페인의 현대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희곡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국내에서도 여러 번 공연되었고, 대학가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역시 같은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뮤지컬로 각색했다는 점에서 2023년 초연 때부터 큰 주목을 받아왔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맹인 학교, 학생들은 학교라는 질서 안에서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은 듯 춤을 추고 보인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곤 하죠. 이때, 이곳의 학생들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지팡이’와 함께 ‘이그나시오’라는 전학생이 등장합니다. 이그나시오는 아이들이 신봉하는 평화가 불편하기만 합니다. 때문에 기존의 학교 질서를 대표하는 모범생 까를로스와 크게 부딪히며 갈등을 빚죠.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여태 본인들이 믿고 의지해왔던 질서가 정말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었는지 고민에 빠지고 학교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극 후반부, 이그나시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작품은 한 번 더 큰 전환을 맞이합니다. 이그나시오의 편에 서있던 학생들이 그의 죽음과 동시에 학교의 질서 안으로 돌아가려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그나시오와 함께 지팡이에 의지해 걷던 아이들이 다시 설계된 안전함 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관객은 기묘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까를로스의 결말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그나시오가 ‘타오른’ 자리에 어떤 것들이 남았는지 생각하게 되죠. 스스로의 한계를 회피하고 외면한 채 꾸며낸 행복과 직면한 채 마주한 불행 사이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요?
생존이 삶에 남기고 간 상흔,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2026.06(예정) │ 링크아트센터 벅스홀 │ 100분
메리 포핀스는 영국의 동화로 시작해 영화와 뮤지컬로도 제작되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유모입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도 등장한 그녀는 우산을 타고 등장해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죠. 영국에서는 좋은 보모의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의 메리는 우리에게 많은 혼란을 남기는 보모입니다.
작품은 그림자를 이용한 아름다운 오버추어(Overture)와 함께 막을 올립니다. 1926년 그라첸 박사의 저택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 네 남매는 그 사건의 생존자죠. 유모인 메리가 아이들을 구했고, 이후 각자 입양되어 삶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12년의 시간이 흐르고, 네 남매 중 첫째였던 한스가 형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읍니다. 사건의 진실을 갈구하는 한스와 조각조각 찢어진 남매들의 기억. 서로의 기억을 맞추며 진실에 다가가는 네 명의 아이들은 결국 본인들이 그저 실험 대상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줄곧 믿고 의지하던 메리는 유모인 척 아이들을 돌보는 실험 조교였죠. 최면에 빠지기 쉽게 만들기 위해 아이들과 라포를 형성하며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었던 메리, 그리고 끔찍했던 실험 중 죽음을 맞이한 박사. 아이들은 이 상처로 얼룩진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다며 메리에게 최면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결국 과거의 트라우마는 긴 시간을 가로질러 돌아오고 아이들은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신뢰했던 대상이 남긴 상처를 외면한 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끌어안고 나아갈 것인가. 결국 네 사람은 기억을 지우지 않기로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불행과 함께 걷기로 결심하는 아이들을 보며 관객들 역시 아픔과 함께 걷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이죠. 2026년 6월, 새로운 극장에서 다시 공연될 예정이라고 하니, 관심이 생긴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보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왜곡된 사랑이 무너지는 찰나, 뮤지컬 <인터뷰>
공연 예정 없음 │ 110분
기약 없는 기다림만큼 서글픈 표현이 또 있다면 떠나간 뮤지컬을 기다리는 관객의 마음이 아닐까요. 돌아올 예정이 없는 극을 소개하기까지 깊은 고민이 있었지만, 언젠가 다시 이 작품을 무대에서 마주할 날이 오길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사실 ‘시작’은 뮤지컬 <인터뷰>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가 ‘시작된 건가요, 인터뷰?’거든요. 대사처럼 이 작품은 두 남자의 ‘인터뷰’를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유진 킴의 사무실에 싱클레어라는 작가 지망생이 보조작가 인터뷰를 위해 찾아옵니다. 면접 중 두 사람은 10년 전 일어났던 조안 시니어의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요. 이때부터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싱클레어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로, 본명은 맷 시니어입니다. 조안의 남동생이죠. 맷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인격을 지나치는 동안, 유진과 관객은 10년 전 살해당한 조안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게 됩니다.
가정 폭력으로 얼룩진 조안과 맷의 삶,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 다소 위태로운 관계를 쌓아갑니다. 그러던 중 조안이 이 집에서 나가겠단 계획을 밝힙니다. 의지하던 대상을 잃는다는 두려움에 무너진 맷의 감정은 극단적으로 치닫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엉망이 되는 맷을 보며 관객은 불편하고 거북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피해자이자 가해자, 가해자 이자 피해자인 맷. 관객은, 아니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공연을 본다는 건 타인의 시간에 기대는 일입니다.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함께’죠. 그 찰나는 분명 빛나고 있을겁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한 세 작품은 서로에게 기대는 일이 반드시 반짝이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무겁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하죠. 그런 무게감이 우리가 왜 서로에게 기대하는지 생각해 볼 여지를 주기도 합니다. 객석에 앉아 서서히 세상 끝으로 추락하는 주인공들을 지켜보는 동안, 의존이라는 행위에 무게를 견딜 방법을 고민하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