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매개하는 단 하나의 시선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가 맺는 모두

문화를 매개하는 단 하나의 시선
이미지 출처 : 오프화이트 공식 홈페이지

2021년 작고한 버질 아블로의 특별한 이력을 읊어볼까요. 그는 2018년 루이비통 역사상 최초의 흑인 디렉터로 임명되어 남성복 라인을 담당했습니다. 여기에는 폴로 랄프 로렌의 중고 물품을 매입해 ‘PYERX’, ‘23’이란 문구를 프린트해서 판매한 파이렉스 비전을 운영한 경험과, 이후 더 큰 유명세를 가져다 준 패션 브랜드 오프 화이트를 설립한 경력이 발판이 되었죠. 버질은 많은 사람에게 ‘패션계 인물’로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 그는 대학 시절 토목공학 학사•건축학 석사를 전공한 건축학도였습니다. 동시에 10대부터 DJ 활동을 전개한 음악가이기도 하며, 널리 알려졌듯 칸예 웨스트의 전성기를 함께한 아트 디렉터이자 동료이기도 하죠.

이제는 버질이 세상을 떠난 지도 꽤나 긴 시간이 지났고, 당장 최근에 그와 관련한 이슈가 재발하지도 않았지만, 제가 버질 아블로를 언급한 이유는 그의 창작법에 있습니다. 그는 ‘기존의 것을 3%만 변형해도 새롭게 재창조할 수 있다’는 의미의 '3% 룰'을 설파했습니다. 그의 컬렉션은 늘 표절 시비와 독창성 논란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물건, 그리고 동료 디렉터•디자이너의 옷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매번 제시했죠. 특히 그는 ‘콜라보레이션 장인’으로 유명했는데요, 대중 널리까지 인기를 구가한 나이키와의 ‘더 텐’ 컬렉션을 비롯해, 이케아, 바이레도, 리모와, 아모레 퍼시픽, 에비앙, 무라카미 타카시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활동 범위를 선보였습니다. 버질 아블로의 창작법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기에 수많은 브랜드와 인물의 러브콜을 받고, 그들과 협업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은 그와 같이 한 인물이, 또 하나의 집단과 브랜드가 수많은 이들과 협력한 사례를 살펴보며, 그 의의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프라그먼트 디자인 FRAGMENT DESIGN

이미지 출처 : 큐티 매거진

후지와라 히로시는 그 인물의 영향력과 유명세, 이력에 비해 많은 정보를 남기지 않은 인물입니다. 국내 아티스트 및 브랜드와도 접점이 많은 그는, 2023년 뉴진스의 팬을 자처하며 ‘Supernatural’ 앨범에 콜라보레이터로 참여해 다시금 한국에서 이름을 알렸는데요. 후지와라 히로시는 ‘Supernatural’ 콘셉트 포토의 배경이자 의상에서 연상되는, 1990년대 하라주쿠 뒷골목의 패션 흐름을 통칭한 ‘우라하라’를 선도한 인물이죠. 그뿐 아니라 오늘날 겐조의 디렉터이자 휴먼 메이드, 베이프를 설립한 니고는 비슷한 외모 탓에 ‘후지와라 히로시 2호(2号)’라는 뜻에서 활동명을 지었다는 일화를 밝힌 바 있습니다. 언더커버, 더블탭스, 비즈빔, 카브 엠트 등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 중 대다수 또한 그의 직간접적 도움과 영향을 받았죠. 또 후지와라 히로시는 1980년대 말 션 스투시와 친분을 쌓으며 스투시의 일본 진출을 담당했고, 패션뿐 아니라 DJ, 힙합 레이블 대표, 잡지 에디터 등 수많은 직함과 영역을 망라하는 활동을 전개했죠.

그가 최근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역은 2000년대 초 설립한 브랜드 프라그먼트 디자인FRAGMENT DESIGN입니다. 하지만 이 브랜드를 마땅히 정의하기란 어려운 일인데요, 혹자는 프라그먼트를 패션 브랜드로, 또는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등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여기에는 후지와라 히로시만의 독특한 활동 방식이 이유가 되는데요. 그는 프라그먼트를 오롯이 ‘협업을 통한 제품•서비스 생산’의 방향으로 전개하기 때문입니다. 프라그먼트는 20년이 넘는 이력 내내 자체 상품을 만든 경우가 아주 드물고, 대부분의 활동을 다른 브랜드•인물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프라그먼트 고유의 번개 로고는 익숙하지만, 다른 브랜드의 로고와 병기된 번개 로고가 아닌, 번개 로고만 삽입된 제품을 찾기 힘든 이유가 이것 때문이죠.

앞서 설명한 후지와라 히로시의 활동 반경과 맞먹을 정도로, 프라그먼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협업 상대를 모색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나이키를 비롯해 루이비통, 로로 피아나, 몽클레어 등 패션 업계는 물론, 태그 호이어, 펜더, 스탠리, 스타벅스, 라이카, 베어브릭, 마세라티, 닌텐도… 사실상 협업한 적 없는 유명 브랜드를 대는 게 빠를 만큼 수많은 브랜드를 자신의 동료로 끌어들이였죠. 그 분야만 해도 패션, 자동차, 매거진, F&B, …, 자전거, 요트, 음향기기, 요요, 게임 등 다채롭고요. 그뿐 아니라 건담, 포켓몬 등 자국의 문화자본과 블랙핑크, 혁오, GD, 트래비스 스캇 등 전 세계 아티스트와 협력했습니다. 또 프라그먼트를 하나의 매체로 삼아 편의점과 호텔 등 공간, 대학교 형식의 강의 플랫폼, 웹 매거진 등 여러 이벤트와 프로젝트를 전개했죠. 이처럼 화려한 이력 속에서 돋보이는 후지와라 히로시의 말이 있는데요, 그는 협업 과정에서 ‘브랜드와의 협업이 아닌 사람과의 협업’을 강조하며, 자신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밀어붙이기보단 파트너와의 소통에 주력한다고 밝혔죠. 그런 만큼 혹자는 프라그먼트 디자인의 협업을 그저 ‘로고만 넣는’ 상술이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그의 협업에는 후지와라 히로시의 감각이 로고 이상으로 큰 힘을 발휘하며, 무엇보다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좋은 협업’의 결과물이 만들어집니다.


미스치프 MSCHF

빅 레드 부츠(아톰 부츠) | 이미지 출처 : 미스치프

일론 머스크,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크 등 세계 최고 부자들의 얼굴 모양을 한 막대 사탕을 팔고, 에르메스의 버킨Birkin 백을 잘라 버켄스탁Birkenstock 슬리퍼로 가공해 ‘버킨스탁’을 제작하는 이들. 2023년 대림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해 인지도를 얻기도 한 미국의 미스치프MSCHF는 미국을 기반으로 하는 아티스트 그룹입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논란과 화제를 몰고 다닐 뿐 아니라, 여러 기업에서 고소장과 수많은 사람의 환호를 동시에 받는 집단이 되었죠. 그들은 ‘장난’이라는 뜻의 그룹명을 오롯이 작품 활동으로 풀어내는데요. 그들의 장난이 향하는 대상은 단지 글로벌 시장의 기업이나 인물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때로 기업 풍자를 경유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금기로 여겨지는 종교를 다루거나, 사회와 문화가 ‘정전’으로 여기는 것들에 반기를 들죠. 미스치프의 도발적인 행보가 단지 비난의 대상이 되기보다 극단적 호평과 혹평을 그러모을 수 있는 데에는, 이들이 자신이 풍자하고 장난을 걸 대상을 가려가며 찾기보다, 짚고 넘어가고 싶은 모든 것을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사탄 슈즈 | 이미지 출처 : 미스치프 공식 홈페이지

미스치프가 처음으로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오른 건 나이키의 에어 맥스 제품군을 활용해 만든 ‘지저스 슈즈’와 ‘사탄 슈즈’인데요. 에어 맥스 특유의 푹신한 착화감을 만드는 ‘에어’에 요르단 강의 성수를 섞은 액체를 넣은 지저스 슈즈와, 실제 사람의 피를 첨가한 액체를 넣은 사탄 슈즈는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적 파문을 낳았고, 이후 나이키는 이들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도발적인 행보는 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어, 당해에 가장 많이 검색된 스니커즈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죠. 여기서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만든 ‘사탄 슈즈’는 당시 팝 시장의 이단아로 불리던 릴 나스 엑스Lil Nas X와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만들었다는 점인데요. 미국 백인의 음악으로 불리던 컨트리에 힙합을 첨가한 ‘Old Town Road’로 데뷔와 함께 빌보드 1위를 장식하고, 직후 성 정체성을 밝히며 선정적인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등 여러모로 미스치프와 닮은 파격적 행보를 지닌 그가 사탄 슈즈의 모델이 되어 화제성을 더하는 데 큰 몫을 했죠.

모든 브랜드와 인물이 미스치프를 적대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미스치프는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죠. 앞서 소개한 사례와 유사하게, 리한나가 설립한 펜티 뷰티와 케첩 모양의 립 제품을, 프레드 어게인과 자외선을 받으면 색과 모양이 드러나는 티셔츠를 만드는 등 유명 아티스트와 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아톰 부츠(빅 레드 부츠)를 활용한 크록스 콜라보를 비롯해 아크로님, 리복 등 패션 브랜드와 함께하며, 윤활유로 유명한 WD-40와 함께 해당 제품의 향을 담은 향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뿐 아니죠. 유명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 앤 코, 메르세데스-벤츠의 고성능 라인업 AMG는 자사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전복하기 위해 미스치프와 손을 잡았습니다. 휙 바뀌는 유행과 문화의 흐름에서, 고착화된 이미지를 타파하고 싶은, 또는 다채로운 활동 폭을 자랑하고 싶은 이들에게 미스치프의 화려한 장난질은 그 자체로 단숨에 분위기를 전복할 기회의 티켓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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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콜렉티브 ECCO.kollektive

사실 지금에 와서 ‘협업’이라느니, ‘콜라보레이션’의 멋짐을 말하는 건 진부합니다. 전 세계 어떤 시장이든, 브랜드든 간에 모두가 새롭고 독특한 협력을 전개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시금 강조하자면, 저는 이 글에서 단순한 협업이 아닌, 한 명의 인물, 하나의 브랜드가 자신을 거점 삼아 모두를 포획하는 협력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를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례가 있는데요. 앞서 소개한 프라그먼트와 미스치프가 브랜드를 운영하는 ‘인물(들)’의 역량으로 독특한 협업을 전개한다면, 이 브랜드는 말 그대로 브랜드의 특성과 역사를 통해 멋진 협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덴마크에서 60년 넘게 가죽 원피를 가공, 염색하는 태너리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에코ECCO가 그 대상입니다.

이미지 출처 : 에코 인스타그램

가죽은 패션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재료입니다. 특히 고가의 명품 브랜드의 핵심 자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죽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브랜드의 중요성은 더 말할 것 없이 거대할 텐데요. 에코는 오랜 시간 쌓아 온 유산을 통해 세계적 패션 브랜드에 가죽을 공급하고, 또 자체적인 제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코의 독특한 협업은 그들이 전개하는 세컨 브랜드 에코 콜렉티브ECCO.kollektive에서 펼쳐집니다. 에코 콜렉티브는 2022년부터 시작한 브랜드로, 자사의 가죽을 리사이클링하고, 브랜드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가 특별한 이유는, 전 세계 패션 시장에서 떠오르는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섭외해 콜라보레이션하는 형식이기 때문인데요. 신진 디자이너들이 에코의 고품질 가죽을 활용해 자신의 독창성을 펼칠 수 있는 하나의 ‘장’이 되기도 하는 셈이죠.

지금까지 에코 콜렉티브에 참여한 디자이너의 면면도 화려한데요. 헬무트 랭의 디렉터로 부임했던 피터 도, 전 세계 고프코어 유행을 만든 키코 코스타티노브를 비롯해, 니나 크리스텐, 오토링거 등 쟁쟁한 패션계 신성들이 프로젝트에 승선해 자신만의 캡슐 컬렉션을 발표했죠. 이들은 프로젝트를 통해 가죽이라는 소재에서 출발한 컬렉션을 공개했는데요, 때로는 디자이너의 고유한 독창성을, 때로는 브랜드 에코의 아카이브를 재해석하기도 하며 흥미로운 결과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에코 콜렉티브가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요. 그들은 60년 전통이라는 오랜 유산을 바탕으로 패션 업계의 새로운 별을 조망하면서, 동시에 자사의 주력 제품인 가죽을 훌륭한 품질과 업사이클링이라는 다채로운 방향으로 활용하도록 하죠. 마치 스스로의 고고한 정체성을 부각하면서도, 외부와의 협력과 지속 가능성, 아카이브 재구성, 제품 다양화 등 모든 방면을 충족하는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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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은연중 언급했지만, 저는 이들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한 명의 인물, 집단, 브랜드가 마치 하나의 ‘플랫폼’처렁 작동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2025년 현재 플랫폼이란 시스템이자 단위는 전혀 새로운 사례가 아니죠. 수많은 시장, 기업, 서비스 등은 그 자체로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자신이 만든 제품이 중요한 플랫폼이 되어 모든 사용자를 끌어들이길 원하니까요. 하지만 그 주체가 다소 작은 브랜드, 집단, 인물로 축소된다면 어떤가요?

그러나, 여기서 놓쳐서는 안되는 또 다른 사안은, 위에서 소개한 이들이 모두 자신만의 뚜렷한 정체성을, 또는 ‘함께하기’에 대한 자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버질 아블로는,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흑인 공동체를 늘상 강조하며, 이를 중심으로 패션, 예술, 라이프스타일 등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매개자가 되었죠. 또한 후지와라 히로시는 무엇보다 자신이 함께하는 대상이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며, 미스치프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장난’에 동참할 이들을 찾았고, 에코 콜렉티브는 자신의 고고한 유산과 고품질의 제품을 ‘새로운’ 시각을 지닌 디자이너가 다룰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처럼 플랫폼으로서 하나의 작은 개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라면, 열린 태도, 재해석과 재구성에 능한 작업 방식, 나와 상대를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독창성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아닌 타인과 함께하는 일을 대하는 진심이 가장 중요해 보입니다. 분야도, 목표도, 작업 과정도 다른 대상과 조화롭게 어울리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일’이 아닌 함께하는 ‘사람’을 향해 보내는 애정과 노력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