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재자의 시선으로 본 세상

답답하지만 아시타카가 필요한 이유

중재자의 시선으로 본 세상
© STUDIO GHIBLI

긴 러닝타임의 고전작품임에도 지금 극장에서 『모노노케 히메』를 봐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의 깊이와 히사이시 조의 OST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조화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브리 작품 중 내 마음속 1순위는 늘 「붉은 돼지」였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선 지금, 『모노노케 히메』는 그와 호각을 다툴 만큼 지브리의 최고작이라 느껴진다. 나우시카부터 이어져 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 담론이 이 작품에서 가장 성숙하게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루어지는 발전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며, 이 질문 앞에서 등장인물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 결과 누구 하나 단순히 악역으로 치부할 수 없는 복합적 존재들이 된다.

특히 아시타카(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의 관점에 주목해보자. 처음엔 그의 중립적 태도가 답답하고 오만하게 느껴졌다. "왜 명확한 편을 들지 않고 성인군자처럼 모든 이를 이해하려고 하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가 끝까지 상생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현실의 복잡한 갈등을 대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이제 아시타카의 시선을 빌려 이 작품을 바라보려 한다.

아시타카가 보는 양쪽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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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등장한 순서대로 극이 나뉘는 것처럼 아시타카, 에보시, 산이다. 각 캐릭터를 보면 에보시는 현실을 직시하며 인간의 발전과 생존을 추구하는 개척자, 산은 자연의 전통적 질서를 지키려는 수호자, 아시타카는 양쪽의 입장을 이해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중재자이면서도 낙원을 꿈꾸는 구세주로 볼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객관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는 등 더욱이 선택받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런 아시타카가 여행을 통해 에보시를 만나고 그녀의 빌런적 행태에 분노하지만, 타타라바 마을 내부에서 목격한 모습들은 단순한 자연 파괴가 아닌 것을 깨달으며, 산과의 적대관계를 더욱 중재하려 한다. 에보시의 과거에는 약자들을 끌어안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나병 환자들을 보듬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고, 나아가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전쟁이 난무하던 시대에 스스로를 지키려 총을 만들었고,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짊어져야 했던 것이다. 결국 신념의 문제였으며, 아시타카는 자신을 환대해준 에보시와 마을사람들에게서 감사함과 동시에 의구심을 품게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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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타카는 에보시의 선의를 이해하면서도 그 방법(자연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에는 동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해야 한다는 논리, 그 속에서 그는 인간의 모순을 목격한다. 종전에는 문명 발전과 자연의 보존, 이 둘 사이에는 무언가가 희생될 수 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우리는 알지만, 그래도 아시타카는 이 모든 것을 중재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 이런 그의 갈등은 에보시에게 한 말에서도 드러난다.



"두 눈으로 진실을 보고 결정할 겁니다."
— 아시타카가 에보시에게

중립이 아닌 '균형'을 추구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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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화해를 모색하면서 아시타카는 '중립'이 아닌 '균형'을 추구하며 중재자로서 또 하나의 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 이유없이 사슴신이 그를 살려준 이유이면서도 말이다. 이분법에서 벗어나 상생을 도모하려 하는 그의 태도에서 막연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처럼 느껴져 이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결말에 가서는 다툼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구심점으로 제대로 역할을 수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디스테이션

그 균형은 하나의 메시지처럼 다가온다. 아시타카처럼 '이해심'을 발휘하라는 것이다. 모두를 포용하는 것은 유토피아적 상상인 반면에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듯이 결국 이해하고 또 이해하는 '아시타카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심화될수록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겹겹이 쌓여간다. 인간은 어쩌면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각자의 진영에 서서 자신을 선이라 여기고 적대할 대상(악)을 고른다. 「기동전사 건담」에서 연방과 지온이 서로가 정의라며 주장하며 다투는 것처럼 어느 한쪽을 선이라고 명확히 정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 또한 영화 내에 등장하지 않음으로서 관객들에게 고뇌의 시간을 선사한다.

악의 축이라 생각하던 자도 깊은 속내로 들어가면 그들만의 사정이 존재했고, 그로 인해 가치관이 형성된다. 에보시는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기를 택한 것이고, 산은 인간에게 버림받았기에 적개심을 가지고 자연의 품을 택한 것일뿐 누구 하나 악이라고 칭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지점에 서있다. 상황과 입장을 따라가다 보면 선과 악을 이분법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

현대에도 적용되는 아시타카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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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에도 우리는 수많은 '에보시와 산'의 대립을 목격한다. 경제성장 vs 약자 보호, 젠트리피케이션 vs 원주민 보존, 청년세대의 젠더갈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아시타카적 사고'다. 한쪽 논리만을 맹신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제3의 해법을 모색하는 자세 말이다.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지도 또는 비현실적이라 치부하지도 않는 것. 결국 아시타카와 산이 이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쪽 모두의 절실함을 인정하면서도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보여준 태도가 아시타카 그 자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한다. 완벽한 해답은 없을지라도, 끊임없이 대화하고 이해하다보면 공존이 시작된다고. '아시타카'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