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사이의 2악장
쇼팽, 카밀로 슈만, 코른골트로 다시 듣는 사이의 시간
우리는 음악에서도, 삶에서도 언제나 시작과 끝을 더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데뷔와 성취, 실패와 성공, 입장과 퇴장만이 서사로 남고, 그 사이에서 반복되고 지속되는 시간은 쉽게 요약됩니다. 이 구조는 클래식 음악의 악장 배치와도 닮았습니다. 1악장이 시작의 에너지를 맡고, 피날레가 결말의 인상을 책임진다면, 그사이에 놓인 2악장은 대체적으로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도 가장 적게 되새김 되는 구간으로 남아왔습니다. 서사를 진전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긴장을 폭발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시간은 늘 ‘과정’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왔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가장 많은 변화와 조정이 일어나는 시점은 언제나 서사의 중간입니다. 겉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방향이 바뀌고 감정의 온도가 변하는 시간. 음악의 2악장은 바로 그런 시간의 구조를 닮아있습니다. 이번 큐레이션은 그동안 ‘중간 과정’으로만 통과해 왔던 2악장을 하나의 독립된 감정 공간으로 불러내려는 시도입니다.
소개될 세 개의 2악장은 모두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언어, 다른 방식으로 ‘사이의 시간’을 설계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1악장이 만들어낸 거대한 서사 뒤편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음악의 심장을 뛰게 만듭니다.
올해가 시작된 지금, 여러분은 올해의 ‘사이의 시간’을 어떤 속도와 어떤 감정으로 채우고 싶으신가요.
고백 이전의 2악장
Frédéric Chopin: Piano Concerto No. 2 in f minor, Op.21 - II. Larghetto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은 화려한 데뷔의 한가운데 숨어 있는, 사적인 감정의 시간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과 달리 실제로는 쇼팽이 처음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그가 열아홉 무렵(1829-30년) 자신의 이름과 연주를 동시에 증명하고자 쓴 작품입니다. 당시에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직접 작곡한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습니다. 빠르고 거칠게 몰아치는 1악장, 폴란드 민속춤 리듬을 품은 론도 형식의 3악장은 마치 많은 관객 앞에서 “내가 바로 쇼팽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기세를 품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젊은 작곡가의 에너지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순간들입니다. 하지만, 이 뜨거운 표정들 사이에 놓인 2악장 라르게토(Larghetto)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납니다. A♭장조의 느린 선율로 시작되는 이 악장에서 쇼팽은 달리지도,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혼자서 속삭이듯, 조용한 음성으로 노래합니다.
이 악장은 쇼팽이 마음에 품고 있던 소프라노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를 동경한 데서 영감 받은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음악은 고백이라기보다, 고백을 하기 직전,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마음속에서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쳐 쓰는 시간에 더 가깝습니다. 이 2악장에서 인상적인 점은 음악이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선율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감정은 폭발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머뭅니다. 그래서 이 2악장은 서사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보다 오히려 시간을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합니다.
어느 날 밤,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남아 있을 때, 이 2악장만 따로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그 순간 이 음악은 화려한 협주곡의 일부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감정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단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기록 바깥에 남은 한 사람의 2악장
Camillo Schumann: Cello Sonata no.1 in g minor, op.59 - II. Andante Cantabile ed Espressivo
우리가 음악회에서 반복해서 만나는 작곡가들의 이름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카밀로 슈만(Camillo Schumann)’이라는 이름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습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과 같은 성을 가졌지만, 그는 이 흐름의 중심에 서지 못한 작곡가입니다. 카밀로 슈만은 1872년 독일에서 태어나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하며 실내악과 관현악, 오르간곡을 꾸준히 남겼습니다. 첼로 소나타 1번 g단조 Op.59는 1905-6년 무렵 완성된 작품으로, 전통적인 세 악장 구성의 소나타입니다. 그러나 이 곡은 오늘날 연주회 무대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놓인 위치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소나타의 2악장 안단테(Andante)는 곡 전체에서 가장 감정이 전면에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첼로는 감정을 호소하지 않으며 말하듯 낮은 호흡으로 선율을 이어가고, 피아노는 그 흐름을 조용히 받쳐 줍니다. 이 2악장이 들려주는 것은 성공한 인물의 빛나는 순간도, 비극적인 실패의 장면도 아닙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한 개인의 시간이 조용히 흐르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이 2악장은 음악사의 중심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제자리를 찾는 음악처럼 들립니다.
영화에서 건너온 2악장
Erich Wolfgang Korngold: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 II. Romanze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은 원래 영화 속 장면에서 태어나 콘서트홀로 옮겨진 음악입니다. 이 Romanze의 주제는 1936년 미국 영화 〈Anthony Adverse〉의 러브 테마로 쓰인 멜로디였습니다. 코른골트는 이 작품을 통해 아카데미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그는 이 선율을 협주곡 2악장으로 옮겨 와, 영화 속 감정의 시간을 무대 위로 이동시킵니다. 그래서 이 협주곡의 2악장은 이미 한 번 ‘장면’으로 기능했던 음악답게 감정의 표정이 분명합니다. 선율은 상황을 설명하듯 또렷하고, 흐름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 음악의 성격은 코른골트의 인생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신동으로 출발해 1930년대 중반부터 빈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영화 음악 작업을 병행했습니다. 영화 감독 막스 라인하르트의 초청으로 시작된 이 활동은,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귀국이 불가능해지면서 망명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전쟁 시기 영화음악으로 명성을 확립한 뒤, 그는 전후 영화 산업에서 한발 물러나 순수 음악으로의 복귀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변화한 음악사적 환경 속에서 끝내 그 중심에 안착하지 못했습니다. 순수 음악과 영화 음악, 유럽과 미국, 전쟁 이전과 이후를 가로질러 형성된 그의 삶의 궤적은, 이 2악장이 지닌 출처와 형식에 그대로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이 Romanze가 품고 있는 시간은 단순한 ‘느림’이 아닙니다. 망명, 산업, 전쟁 이후의 불안이 함께 겹쳐진 시간입니다. 앞뒤 악장을 내려놓고 이 2악장만 따로 들어보시면, 이 음악은 협주곡과 소나타의 한 부분을 넘어, 한 시대를 건너온 감정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음악에서도, 삶에서도 여전히 시작과 끝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살펴본 세 개의 2악장은 모두,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시간 속에서 감정과 방향이 이미 바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쇼팽의 2악장은 전해지기 전의 마음을, 카밀로 슈만의 2악장은 기록되지 않은 개인의 시간을, 코른골트의 2악장은 한 시대를 건너온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이 큐레이션은 2악장을 더 이상 ‘중간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히 머무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으로 다시 듣자는 제안입니다.